자본주의 시장경제 고유현상 아냐…로마·중세시대 훨씬 극심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격차는 주로 자본의 보유량에 달려있다는 것이 피케티를 비롯한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학자들의 견해이다. 하지만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면 자본 뿐 아니라 창의성, 아이디어, 기업가정신 등 부의 요인이 다양해서 빈부격차를 줄이는 효과가 크다는 것이 정설이다. 사람들은 빈부격차의 원인을 자본주의에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유경제원은 자유주의연구회, <역사 속의 격차> 발제를 통해 빈부격차가 커지는 근본적인 원인을 고찰했다. 아래 글은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가 발표한 ‘빈부격차의 역사’ 발제문이다. 발제문은 (상), (하)로 나누어 소개한다.

역사 속의 격차 : 빈부격차의 역사 (상), 로마와 중세 시대에는 어땠을까

1. 들어가며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 빈부격차가 벌어져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자본주의가 붕괴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피케티는 최근에 발표한 『21세기 자본』에서 19세기의 칼 마르크스(1818~183)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 시장경제는 양극화의 힘이 강해서, 세습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빈부격차로 인한 양극화는 민주사회와 사회정의를 파괴할 잠재력이 있다고 경고했다.

마르크스는 유물사관에 기초한 반면에, 피케티는 장기적인 데이터분석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했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현대경제학적 버전이라고 평가받는다. 피케티는 혁명이 아니라 정치적 결단을 통해 자본주의가 개선될 수 있다고 보았다. 자본이탈을 막기 위해서 각국이 서로 협조하여, 최고 85퍼센트의 누진적 부유세(wealth tax)를 도입할 것을 주문했다. 과거 이보다 높은 부유세를 부과했던 사례가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제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피케티는 자본주의가 발전된 19세기말에 빈부격차가 크게 확대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의 파리 등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피케티, 407-410).

   
 

   
 

   
▲ 영국에서의 부의 불평등 1810년~2010년 


 

   
▲ 미국에서의 부의 불평등 1810년~2010년 

이들의 재산이 190-2010년 사이에 연간 13% 증가했고, 물가상승률을 제외해도 연간 10-1% 증가했다는 것이다(피케티, 524).

이러한 피케티의 주장에 대해서 여러 연구자들이 효과적인 반론을 제기했다. 예를 들면 상위 소득계층이 많은 부나 소득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이 바뀐다면 세습사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소득세 자료는 상위 고소득 집단에 누가 들어가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소득계층의 이동성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없다.

미국의 계층 이동성은 높은 편이다. 미국 보스톤대학교의 로런스 코틀리코프 교수에 의하면 201년 포브스선정 부자 리스트의 60%가 1989년에 없었던 사람이고, 25%는 198년에도 없었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의 가계 소득 조사 연구(Cox & Alm)에 의하면 1975-91년 (25년) 동안 1975년의 저소득층 20% 중 5%만 저소득층으로 남아있었고, 나머지 95%는 중산층이나 고소득층으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미국의 경우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와 같은 백만장자의 80%는 1세대이며, 최상위층 1%의 부자들 중 상속의 비중은 15%에 불과하다.

그리고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격차는 주로 자본의 보유량에 달려있다는 것이 피케티를 비롯한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시장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자본의 힘 뿐만 아니라 창의성, 아이디어, 기업가정신 등 부를 가져다주는 요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빈부격차를 줄이는 효과도 상당히 있다.

이 글에서는 피케티의 주장과 관련하여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피케티는 자본주의의 빈부격차가 과거 신분사회 못지않다고 말하면서 주로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시대의 빈부격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전자본주의 시대의 빈부격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첫째, 전자본주의 시대의 빈부격차는 어느 정도였는가를 살펴본다. 둘째, 과거 전근대사회의 각종 신분적 차이를 고려하면 아직까지는 자본주의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없다. 과거 동양의 왕조시대나 서양의 귀족사회는 물론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신분적 격차가 존재했고, 신부도 역시 특권층이었다. 전자본주의 사회의 격차는 대부분 권력과 신분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축적된 자본량의 격차 이외에 사회 신분적 격차에 대해서 비교해보고자 한다.

2. 전자본주의 시대의 빈부격차

프린스턴대학 앵거스 디턴교수는 『위대한 탈출: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를 통해서 인류가 빈곤을 탈출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으며, 아직도 70억의 지구 인류가운데 40억이 성장이 필요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나라가 많다고 주장했다.

빈부격차를 비롯한 각종 격차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고유한 현상이 아니다.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분 격차뿐만 아니라 빈부격차도 극심했다. 버클리 대학의 고대사 교수를 역임한 로버트 냅(Robert Knapp)이 쓴 『9% 의 로마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에 의하면 로마 사회는 전체 로마 제국 5~6천만 인구의 0.5%도 안되는 3만~3만5천명의 호네스티오레스(honestiores, ‘더 고귀한 자’)들이 부의 80%를 소유했고, 나머지 9.5%는 휴밀리오레스(humilores, 덜 고귀한 자)라고 불렸으며, 이 두 계층 사이에 사회적 단절이 있었다.

“로마제국의 지배계층은 로마의 사회경제적 계층 구조에서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 지배계층이 되려면 기사는 40만 세스테르세스sesterces(고대로마의 화폐단위), 원로원 위원은 10만 세스테르세스의 재산을 보유해야 했다. 그렇게 엄청난 재산을 가진 성인 남자는 5000만~6000만명에 달하는 제국 인구 중에서 5000 명 정도였다. 이들보다 한참 밑으로 로마제국의 지방도시를 관리하는 지배계층이 있었다.

촌락보다 규모가 큰 250~30개의 소도시마다 평균 10명~125명가량의 성인 남자들이 3만~3만 5000 명 가량의 부유층을 이루었다. 사회경제적인 양극화가 극심했던 로마세계에서 이들 지배계층이 차지한 부는 전체 부의 80퍼센트를 넘어섰을 것으로 짐작된다. 엄청난 부자를 호네스티오레스honestiores(더 고귀한 자)라 부르고, 나머지 자유민을 휴밀리오레스humilores(덜 고귀한 자)라 부른 것을 보면 로망니들 스스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사회경제적 단절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국 인구의 9.5퍼센트는 바로 이들 ‘덜 고귀한 자’들 이었다.

부자들 밑으로는 훨씬 적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일용할 양식 정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좀 더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관심사를 추구할 만큼 충분한 여가 시간을 누렸다. 소규모 토지소유자, 상인과 숙련공, 성공한 군인들과 이들의 후원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전문직인 교사와 의사, 건축가처럼 지배계층의 후원을 받는 이들이 범주에 속했다. 전체 인구에서 이들 평민과 그들의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25퍼센트 정도였다.”

   
▲ 키케로 흉상, 로마 카피톨리노 박물관, 1세기 중반 작품, 사진 Glauco92 

로마시대의 서열과 신분제도

자본주의의 빈부격차를 비난하는 자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얼마나 신분상의 평등화를 가져왔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로마시대의 서열제도의 예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소도시 페텔리아(지금의 스트롱골리)에 살던 마니우스 메고니우스레오라는 시민은 어느 재단에 1만 데나리 denari(고대로마의 은화)를 기부했고, 재단에서는 레오의 기부금을 굴려 벌어들인 수입을 서열에 따라 분배했다. 즉 매년 수입 가운데 450데나리 이상의 돈이 마니우스 메고니우스의 생일잔치 비용으로 쓰였다.

그 내역을 보면 우선 30데나리로는 해당 지역의 지배계층인 십인대장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고, 연회를 베풀고 남은 돈은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십인대장들에게 현금으로 건네졌다. 또 150데나리를 들여 아우구스탈레스Augustales.즉 부유한 자유인 신분의 성직자들로 구성된 지방 관리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고, 남은 돈은 역시 선물 명목으로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

끝으로 남자 시민 한 사람과 그들의 아내에게는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1데나리만 주고 연회는 베풀어 주지 않았다. 이처럼 선물을 줄 때 차등을 두거나 원형경기장에서 계급에 따라 좌석 배치에 차등을 둔 것을 보면 얼마나 철저한 계급사회였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철저한 계급사회 속에서 중간계층에 속한 평민들은 자신들만의 생존 전략을 체득했다. 즉 같은 계급의 사람은 대등하게 대하고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용하며, 자신보다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에게는 복종한 것이다.”

로마시대의 차별의식

로마시대에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차별의식도 대단했다. 넵은 로마시대의 차별의식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의 말을 따르거나 자기보다 낮은 계급(예를 들면 노예)에 동화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이들 평민 남자들은 자신과 동등한 지위를 지닌 사람을 대할 때보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우월한 존재(지배계층)나 명백하게 열등한 존재(노예)를 대할 때 더 확실한 태도를 취했다. 학자들은 고대 로마의 평민 남자가 가장 흔히 가지고 있던 반감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해방노예에 대한 반감, 가난한 자에 대한 반감, 노예에 대한 반감, 상인에 대한 반감, 노동에 대한 편견이 그것이다. 자유인들 사이에서도 해방노예에 대한 반감이 팽배했을 거라는 시각이 일반적이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거의 없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 대한 반감만큼은 실제로 존재했다. 평민들은 노예에게도 강한 반감을 품었다.”

로마시대의 빈민

냅에 의하면 로마제국의 대다수 사람들이 빈민층이었다. 빈민층은 기본적으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남녀 자유민을 말하는데, 이들은 근근이 목숨이나 부지하고 있을 뿐 저축이나 투자 따위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오로지 생존이었다. 출세나 성공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고대 로마인이 직접 쓴 '점성술의 노래'에는 가난에 대한 비슷한 정의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즉 가난은 “배를 채울 빵이나 입을 옷”이 없는 상대이며, “일용할 빵을 찾을 수 없는”상태이다. 아르테미도루스는 '꿈 풀이'에서 사회의 맨 밑바닥에 있는 가난한 자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난한 자는 배설물이나 그 밖의 쓰레기 따위를 내다버리는 지저분하고 어두운 장소와 같다.”

“이들은 구걸과 소작, 날품팔이에 생계를 의지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한 가정이 대도시에서 1년 동안 최저 생활수준 이상으로 생활하려면 30데나리 정도의 현금 소득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 하루에 약 1데나리우스를 벌어야 했다는 얘기다. 이 정도 액수가 표준임금이었다고 쳐 보자. 당시 로마에는 하루에 1데나리우스의 절반도 벌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게다가 도시나 자방 가릴 것 없이 불완전 고용이 만연해 있고 노동과 제품에 대한 수요가 불안정했던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정적인 일자리를 갖거나 좋은 임금을 받을 수 없었다. 매순간 그렇지는 않아도 거의 모든 순간 벼랑 끝에 몰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고대로마의 빈민층이었다. 소농은 누가 봐도 확실한 빈민층이다. 소농의 기본적인 정의는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다. 로마제국 시기에 그러한 자작농은 많았다.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모레툼Moretum'(이스트를 넣지 않고 식초 등을 넣어 구운 납작한 빵이라는 뜻)이라는 시에서 어느 농부의 누추한 삶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농부가 가진 것이라곤 그야말로 입에 풀칠만 할 정도의 먹을 것뿐이다. 그는 밭에서 키운 채소를 시장에 내다 팔아 버는 쥐꼬리만 한 수입으로 살아간다. 소작농도 흔했다. 소작농은 남의 땅을 부쳐 먹고 산다. 소작농 중에는 원래 자기 땅을 갖고 있다가 빚을 갚지 못해 지주에게 땅을 잃고 소작농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지주의 허락을 받고 그 땅에서 계속 농사를 짓는 대신 해마다 수수료나 농작물의 일부를 지주에게 바쳤다.”

   
▲ 12월 17일 자유경제원에서 열린 자유주의연구회, <역사 속의 격차>의 전경.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로마 빈곤층의 인구

로마 제국의 총인구는 약 5천만~6천만 명으로 한다. 이 중에서 냅은 노예와 자유민 등 ‘벼랑 끝’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비중을 로마제국 인구의 65퍼센트였다고 추산했다. 그들은 자연재해와 전염병, 기근 등의 재난에 의해 자신들이 영위해 오던 최저 생활이 무너지면 곧바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로마제국은 격변과 불평등의 세계였다. 그들의 삶은 불확실한 순간의 연속이었고, 조세징수원이 됐든, 국가 관리가 됐든, 지주가 됐든, 대부업자가 됐든,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정치적으로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예속된 존재였다고 한다.

노예

마르크스는 그리스·로마 사회를 노예제 사회라고 규정했다. 노예제도는 고대 그리스 경제의 근간이었고, 로마제국을 건설했다.

로마시대 노예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며 노예들의 처우는 어떠했을까? 노예는 몇 명이었고 어떤 사람이 노예가 되었을까? 냅에 의하면 노예제도는 로마제국의 농촌에서는 지배적인 노동의 형태가 아니었다. 노예의 노동력은 주로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있는 소수의 대 사유지에 집중되었고, 규모가 큰 읍과 대도시에서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비중이 제국의 전체 평균보다 높았다.

평균적으로 따지면 일곱 가구마다 한 가구가 노예 한 명을 소유했다. 노예를 소유한 이들은 대부분 지배계층이었으며, 노예는 주로 농업이나 상업이 아니라 가사 노동에 투입되었다. 추산에 따르면 제국 전체인구의 약 15퍼센트가 노예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노예의 수가 인구의 평균 15펴센트에 훨씬 못 미쳤을 것으로 추정한다(198).

로마법에 따르면 자유인을 노예로 사고파는 것은 불법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자유민을 노예로 파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적어도 로마 시민은 자신을 노예로 팔 수 없었지만 실제로는 돈을 못 갚는 대신 자유민의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고 ‘계약’을 맺었다.

노예들의 처우를 보면 “말대꾸를 해 주인을 짜증나게 했다는 이유로, 혹은 주인을 툭 쳤다는 이유로 노예로 몇 년씨이나 감금하는 처벌을 내렸다(204쪽).” “사티리콘]에서는 노예에게 낙인을 찍어 오랫동안 흔적을 남기는 수모를 안겨준다. 하인들은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거나 무식하거나 나쁜 짓을 저지르거나 무례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수시로 따귀를 얻어맞거나 매질을 당했다. 심지어 주인의 심기가 불편 할 때는 단지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손찌검이 날아들었다.”

중세 농노들의 생활

마르크스는 서구 중세시대를 농노제라고 규정했다. 이 시대의 농도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18세기까지 인구의 거의 8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 대부분은 문맹이었다. 1152년의 제국평화령으로 농민은 창과 검의 휴대가 금지되었다. 1179년의 라인. 프랑켄의 평화령이 갱신되었을 때 농민이 마을 밖에서 검을 휴대하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프리드리히 1세는 1186년의 제국평화령으로 농민은 기사의 자격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고 규제했다.

그로 인해서 그때까지 대체로 말해서 자유인과 비자유인밖에 없었던 유럽사회에 기사와 농민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신분이 기사신분, 농민신분이라는 타고난 신분으로서 성립되었고, 농민은 명예에 있어서 열등한 신분이 되었고, 사회적 서열에서도 하층에 자리매김된 것이다.

마르티노축일(11월 11일)에 농민은 현물과 화폐의 공물을 영주에게 바쳤다. 보통 땅 1후페에 닭 두 마리와 돈 2마르크 외에 달걀. 버터. 치즈와 그 밖의 현물을 바쳤고, 사제에게는 십일조의 봉헌금도 바쳐야 했다(곳에 따라서는 가족 전원에게 인두세가 부과되었고, 주인이 죽으면 유산 중 가장 좋은 의복과 가장 좋은 가축이 영주에게 사망세(헬리오트)로 징수되었다).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