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주의 만연한 정치, 만성적 불안정·정치인 포퓰리즘 유혹 부추겨
정부의 단기적 정책성과를 위한 개입, 포퓰리즘 통제가 만연하면, 기업은 위험을 감수하며 혁신과 창조에 나서지 않기 마련이다. 자유가 보장된 환경이 조성될 때, 13척으로 왜함 330척을 쳐부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과 같은 기업가정신도 발휘 될 수 있다. 시장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 창조경제의 씨앗들이 싹을 트고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시장의 보복을 부추기는 분열의 철학과 정책을 타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경제원이 이러한 취지에서 2014년 한 해를 되돌아보고 2015년 새해를 열기 위한 대토론회를 16일 개최했다. 아래 글은 자유경제원의 <분열의 철학, 정책 버리고 성장으로 가자> 특별토론회에서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발표한 토론문 전문이다.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이 사회상태로 들어오면서 자연상태의 평등이 깨지고 불평등이 심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루소는 일단 사회상태에 발을 들여놓은 인간들이 자연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점에서 그는 단순한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다. 인간이 원시인처럼 자연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정치사상적으로 규명하고자 한 시도가 그의 유명한 『사회계약론』 이다. 루소의 사상이 맑시즘과 전체주의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은 탈몬(J. L. Talmon)의 The Origins of Totalitarian Democracy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루소의 주장이 이러한 평등사상과 전체주의의 선구자로만 평가하기에는 그의 패러다임적 사고에 비추어볼 때 문제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균형잡힌 시각이 루소가 평등사상에 미친 영향을 더욱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 16일 개최했던 자유경제원의 <분열의 철학, 정책 버리고 성장으로 가자> 특별토론회에서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사회주의/공산주의적 평등관은 프랑스혁명에 대한 헤겔의 역사철학적 해석에 대한 맑스의 반발과 재해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프랑스혁명이 자유와 평등을 인류 이념 발전의 최종적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역사가 마침내 종착점에 도달했다고 헤겔은 주장했다.

이런 헤겔의 역사철학적 해석에 대하여 맑스는 그것은 정치적 차원에만 머물렀고 경제적 불평등은 여전히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거쳐야만 비로소 역사는 종착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유물론적, 평등주의적 역사철학적 입장을 제시했던 것이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역사의 종언’이라는 논문에서 냉전을 헤겔과 맑스 역사철학의 대결이었고 그 대결은 전자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것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적 평등관이 현실적으로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등주의 정책’의 문제점과 관련하여 그것이 가져오는 여러 가지 경제적 차원의 문제점들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필자는 정치학적 차원에서 몇가지 생각을 개진하고자 한다. 민주주의의 위대한 사상가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민주주의의 핵심적 사상은 평등이다.

현대사회는 ‘사회적 평등’이 실현된 ‘민주사회’(democratic society)로서 이전의 ‘귀족사회’(aristocratic society)와 구분된다. 그러니까 루소와 같은 사회계약론자들이 이론 전개를 위하여 가상적으로 설정한 ‘자연상태 하의 평등’이 ‘사회상태의 평등’으로 현실화되었다는 것이 토크빌의 주장이다.

그런데 토크빌이 제기하는 문제는 ‘민주사회’에서는 자유와 평등 중 평등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너무나 강력하여 ‘자유 속의 평등’이 아니라 ‘노예 속의 평등’에 심지어 인간들이 만족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1830년대 이런 주장을 펼친 토크빌은 이 점에서 예언자적이었고 최근 한국 사회의 보편적 복지 주장에서 드러나고 있는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진단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해주고 있다.

   
▲ 자유경제원의 <분열의 철학, 정책 버리고 성장으로 가자> 특별토론회 전경 

한국인의 평등의식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 사회가 토크빌이 주장하듯이 모든 장애물들을 파괴하고 ‘사회적 평등’의 실현을 통해 ‘민주사회’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만이 ‘민주사회’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 나라마다 그 역사적, 문화적으로 독특한 배경 하에서 평등의식으로부터 생겨나는 문제의 양태를 분석하여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다른 국가들이 똑 같은 문제에 직면하여 어떻게 자신들의 현실에 맞게 ‘민주사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 나름대로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 반면교사로 삼는 것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토크빌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평등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민주사회’ 이전의 사회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상태가 아무리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자연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다고 말한 루소의 고민과 같은 사상적, 정치적 문제의식을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평등의식이 강한 현대 한국의 ‘민주사회’가 안고 있는 하나의 문제점은 자유민주주의가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이라는 두 측면을 갖고 있다는 의식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적 민주사회의 평등의식 때문에 이 두 차원에 대한 균형감각이 상실되었다는 것이 한국사회의 정치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 주권을 갖고 있다는 ‘국민주권론’의 민주주의에 대한 ‘수평적 인식’은 우리 사회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비교하여 민주주의에서도 지배-복종관계라는 통치의 문제는 이 체제의 운영을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꼭 필요하다는 ‘수직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 한국사회에서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국민주권의 ‘소유’와 ‘행사’가 인구가 많고 영토가 넓은 한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는 분리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만성적 불안정상태에 처한 한국정치의 대표적 사례, 세월호 유가족. 오천만 국민을 대변하는 대의제민주주의의 산실, 국회가 300명 세월호 유가족에게 세월호특별법 등 모든 관련 사안에 대하여 끌려 다녔다. 유가족들은 특히 새누리당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유가족들에게 저자세로 일관했다. 

‘주권의 행사’는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소수의 대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가장 쉬운 예는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여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실패’가 그 이유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더욱 그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적 민주사회의 평등의식이 만들어내는 ‘통치체제로서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왜곡에서 찾아질 수 있다. 투표를 통해서 대표를 뽑아 놓고 대표성을 인정하기 않기 때문에 한국정치는 ‘만성적 불안정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투표보다는 변덕스러운 여론을 중시하고 정치인은 끊임없이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보편적 복지, 경제민주화 등은 왜곡된 평등의식에 뿌리를 둔 포퓰리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평등의식에서 나오는 왜곡이 정치권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업사회는 평등과 경쟁의 원리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또한 산업사회는 지속적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사회의 기능이 끊임없이 분화되어 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런 분화과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기업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가 생산성이 저하되어 주저앉고 말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한 능력주의는 불가피한 현상이 되고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 ‘리더’ 혹은 ‘대표자’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평등 의식은 이런 당연한 변화와 발전 과정을 수용하는 데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분화로 사회의 분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지면 질수록 이들 분야 사이의 경쟁과 충돌을 ‘조정’하는 역할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 조정 기능은 위에서는 국회로부터 기업의 직장 단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 다원화된 한국의 민주사회는 이런 조정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이런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평등의식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사상적, 정책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