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뽑지 않고도 상대방의 수를 읽는 능력이 진정한 고수

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방민준의 골프탐험(38)- 죽음 앞에서 차를 끓이는 용기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무림(武林)의 고수들은 일합을 겨루기 전에 상대를 알아본다. 굳이 칼날을 부딪치지 않아도 승패를 알 수 있다. 검도를 하는 친구로부터 들은 얘긴데, 서로 대결의 자세를 갖추고 마주하고 있으면 이미 상대방의 수준이 눈으로, 피부로, 느낌으로 전율처럼 전해져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칼을 빼어들어 일합을 겨루지 않더라도 승패를 알 수 있는 것이 무림 고수의 세계라고 했다.

상대방이 나보다 고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구차하게 굴지 않고 스스로 무릎을 꿇고 스승으로 모시고, 고수로 인정받은 사람은 넓은 아량으로 무릎 꿇은 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무릎을 꿇은 자의 자세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만 미래에 이 고수와 다시 부딪혔을 때를 대비해 나의 결점을 보완하고 수련을 계속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허장성세나 복수심은 얼치기들이나 갖는 것이다.

골프에서도 고수는 첫눈에 드러난다. 보통 골퍼라면 한 라운드 돌아보면 스코어에 상관없이 상대방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는 알아낼 수 있다. 로우 싱글이라면 한 홀만 지나면 그 사람의 골프수준을 가늠할 줄 안다.
진짜 골프고수는 첫 티잉 그라운드에서의 행동을 보고 알아낸다. 아주 예리한 분석력을 갖추었다면 라운드 직전 덮개가 벗겨진 골프백에 있는 클럽을 보고 골프백 주인이 어느 수준의 골프를 쳐왔는가 짐작할 수 있다.

   
▲ 한 라운드의 결과를 놓고 판단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 것이 현명한 골퍼의 자세다. 상대방에게 주눅만 들지 않는다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인가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마음속의 갈등요인을 없애고 내 리듬대로 플레이하는 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삽화=방민준
첫 홀 티잉 그라운드에서 티를 꽂고 어드레스를 취하는 것을 보고는 “아 이 분은 나보다 한수 위다”라거나 “잘 치긴 하겠지만 좀 덜 익었다”거나 골프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데 십중팔구는 들어맞는다. 굳이 한 라운드를 겨루어보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승부를 짐작할 수 있다.

골프의 묘미가 깊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나보다 한 수 위라고 승복하고 들어갔는데 한 라운드를 끝낸 결과는 정반대의 경우가 생길 수 있고, 내가 한 수 위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반대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미묘한 심리대결이나 정신적인 자세에서 자칫 평정심을 잃은 결과일 것이 자명한데, 한 라운드의 결과를 놓고 판단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 것이 현명한 골퍼의 자세다. 상대방에게 주눅만 들지 않는다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인가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마음속의 갈등요인을 없애고 내 리듬대로 플레이하는 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300여 년 전, 중세 일본에 다도(茶道)의 대가가 교토(京都)의 번화가를 걸어가다가 우연히 무사의 검을 건드렸다. 일본 무사에게 있어 검은 바로 그의 정신과 같은 것으로, 그것에 누가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자신의 명예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겼다. 무사는 불같이 화를 내며 “모욕을 당하고 참을 수 없다”며 결투를 신청했다.
다도의 대가는 용서를 구했으나 무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별수 없이 다음 날 새벽에 성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평생 다도에만 전념해온 다도의 대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잘 아는 상인을 찾아갔다. 그 상인은 그를 다도의 스승으로 존경하며 딸에게도 다도를 가르치게 한 사람이었다. 상인은 자초지종을 듣고 나더니 낮에 만난 무사는 뛰어난 검객으로 누구에게도 패배한 적이 없는 자라고 말했다.

다도의 대가는 이번엔 친한 친구인 대장장이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칼을 좀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친구가 물었다.
“칼은 어디에 쓰려고? 자네는 싸우는 법 같은 건 모르지 않나. 평생을 차와 함께 살았으니 그런 자네에게 칼을 줘 봤자 큰 소용이 없을 텐데.”
“그래도 나는 내일 새벽 그 무사를 만나러 가야만 하네. 이건 내 명예가 걸린 일이야.”
“그렇다면 가게! 하지만 이건 결과가 너무 명백하지 않나. 그러니 명예를 지켜 죽음을 맞이하게나.”
다음 날 새벽 무사는 성문 밖에서 몸을 풀면서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다도의 대가가 다가왔다.
다도의 대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결투 전에 마지막 다도를 행할 수 있게 해주시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들고 온 보자기를 펼치고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능숙하게 작은 불씨를 만들어 차를 끓이고는 정성을 다해 찻잎을 끓고 있는 물에 뿌렸다. 그는 조그마한 막대를 잡고 처음엔 시계방향으로, 그 다음엔 반대방향으로 차를 저었다. 무사는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그와의 모든 결투에 임했던 자들 중 이처럼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고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30분쯤 지나 다도 의식이 끝나자 무사는 다도의 대가에게 큰 걸음으로 다가가 땅에 엎드리며 말했다.
“다도의 대가여, 내가 죽여 왔던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죽기 전에 용서를 빌었소. 어떤 자는 목숨 대신 금을 주겠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려 했소. 하지만 당신처럼 용감한 사람은 본 적이 없소. 당신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차분히 차를 만들었소.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대한 다도의 대가임이 분명하오. 나는 내 자신이 다인처럼 고요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소. 다도의 대가여, 내 경솔한 도전을 용서해주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다도를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오. 그리하여 내가 죽음을 앞두고서도 고요할 수 있도록, 오늘 당신이 보여준 것과 같은 그런 수양을 쌓을 수 있게 해주시오.”
다도의 대가는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무사의 청을 받아들였다. (피터 루이스의 『무도의 전설과 신화』중에서)

골프를 다도처럼 할 수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