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의무휴업제'도 시장의 진화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 정소담 아나운서

어릴 적 외삼촌이 세 들어 살던 집은 시장 통으로 난 좁은 골목에 있었다. 기묘하게 사람 형상을 한 칡뿌리를 세워 놓고 건강식품을 파는 트럭을 지나면 연이어 잡화를 파는 상점들, 맞은편엔 생선 가게와 반찬 가게. 그 옆의 '표구'라고 크게 써 붙인 가게를 끼고 돌면 보이는 골목의 첫 집이었다. 삼촌네 집이 있던 그 시장을 가족 모두 '외숙모네 시장'이라고 불렀다. '시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다.

재래시장이라는 말도 모르던 때다. 아니, 그때는 누구도 재래시장 혹은 전통시장이라는 말을 안 썼다. '슈퍼마켓'과도 '구멍가게'와도 다른 그 펄떡이는 현장. 그냥 '시장'하면 거기였다. 없는 게 없던 그곳은 꼬마 여자아이에게 좋은 놀이터였다. 시장에 가면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지난달 18일 국회 앞에서 열린 대형마트 영업규제에 관한 유통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사회자로 다녀왔다. ‘대형마트 의무휴업제’는 대형마트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는 골목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을 제한하는 법이다. 나름대로는 전통시장을 ‘지키려는’ 취지로 만들어 졌다.

“내가 변한 걸까, 네가 변한 걸까”

묘한 기분이었다. 어려서 놀이터보다 시장을 더 좋아하던 내가 전통시장 보호에 '반대'하는 현장에 마이크를 들고 나선 것이다. 대형마트 규제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흘러나오던 때도 새삼 생각났다. 열변을 토하며 반대하던 내게 당시 연애 중이던 남자친구는 말했다. 넌 애가 왜 그렇게 못됐냐고. 전통시장 상인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모두 힘들게 사는 사람들 아니냐고.

억울했다. 대형마트 로고가 박힌 봉지를 들고 귀가하는 날이면 구멍가게 사장님 얼굴 보기가 왠지 죄송스러워 굳이 먼 길로 돌아가는 나인데. 대형마트 규제에 반대하는 건 내가 못돼서도 냉정해서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지난 12월 18일 국회 앞에서 열린 대형마트 영업규제에 관한 유통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사진=김규태 기자

외숙모네 시장은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화곡동 시장골목. 어릴 적 기억이 마음을 머물게 하지만 이내 발길을 옮긴다. 그곳에는 더 이상 내가 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만 안 가는 게 아니라 엄마도 안 간다. 수십 년을 시장에서 장봐온 할머니는 대형마트 예찬론자가 되셨다. 지금껏 어떻게 시장에서 장을 봐서 명절 준비를 했나 모르겠다며 세상 한 번 "억시게 좋아졌다"신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억시게’ 좋은 세상을 살고 있다. 훨씬 편해지고 살만해 졌다. 더 이상 무거운 장바구니를 양손에 들고 고생스럽게 장보지 않아도 된다. 신선하고 품질 좋은 제품을 비교하고 할인 받아가며 우아하게 집으로 들여올 수 있게 됐다.

‘전통시장’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카드결제도 어렵고 주차할 공간도 없으며 청결하지조차 않은 그 공간은 더욱 낯설다. 휴일에 대형마트가 문을 닫은들 이 낯선 공간에 발을 들일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소상공인 보호'라는 미명으로 포장돼 소비자의 권리는 거칠게 짓밟히고 있다. 대형마트 규제 반대를 위해 영하 18도의 날씨에 마이크를 쥐고 거리로 나섰다가 또 못된 여자 취급을 받은 나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주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권리를 침해당한 수많은 소비자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줄 수 있을까. 역시나 서민인 대형마트 입점 상인들의 억울함은 또 누가 보상할 것인가.

나는 여전히 가장 좋은 것을 찾는다. 가장 편한 길을 택한다. 재래시장의 풍경 역시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시장’은 변했다. 언제나 가장 편한 길을 택하는 소비자. 그리고 그새 진화한 시장. 그 가운데 놓인 전통시장의 ‘한결같음’이 미련스러워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지금은 시장의 강자로 분류되는 대형마트와 '새로운 공공의 적' 이케아도 마찬가지다. 소비자에 맞춰 변화하지 않는 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렇게 진화해가며 새롭게 만들어진 풍경을, 나보다 스무 살 어린 여자아이는 언젠가 '전통'이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정소담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