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45) - 전투의 승리보다 전쟁의 승리자가 되라
소포클레스(BC 496 ~ BC 406)의 <아이아스(Aias)>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아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아티카 반도 건너 북서쪽에 있는 섬 살라미스의 영웅이다.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아이아스는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텔라몬의 아들인 대(大) 아이아스이고, 다른 이는 로크리스의 왕 오일레우스의 아들로 소(小) 아이아스로 불린 사람이다. 이 두 사람 모두 공교롭게도 오뒷세우스와 경쟁하다 아테나 여신의 미움을 받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소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절친 파트로클로스의 추모 장례식의 일환으로 열린 달리기 경주에서 1등으로 달리다, 아테나의 도움을 받은 오뒷세우스에게 1등을 빼앗기자 아테나 여신에게 반감을 품게 된다. 그는 그 분풀이로 트로이 함락 이후 아테나 신전의 사제 카산드라를 겁탈한다. 하지만 그는 에게 해를 건너는 귀로에 분노한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징벌에 의해 익사한다.

이 작품은 대 아이아스의 죽음에 관한 비극을 그렸다. 그 역시 오뒷세우스와의 경쟁이 화근이었다. 이 작품은 이전에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생략하고 있다. 따라서 전사(前史)를 알아야 아이아스의 좌절과 고통, 그리고 분노의 광기를 이해할 수 있다.

잠시 이 작품에 나오지 않은 사연을 살펴보자.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쏜 화살에 ‘아킬레스 건(腱)’을 맞아 전사하자, 그의 어머니 테티스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특별 주문하여 만들어준 ‘아킬레우스의 불멸의 무구’를 놓고 그리스 군 진영의 장수들 간에 누가 차지할 것인가 경쟁하게 된다.

오뒷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승전에서 자신의 지략이 크게 공헌했음을 앞세우고, 아이아스는 자신의 용맹이 더 큰 기여를 했다며 아킬레우스 무구가 서로 자신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팽팽히 맞선다. 이에 난처해진 그리스 군 진영에서는 장수들의 투표로 결정하게 되고, 아이아스는 다수표를 얻은 오뒷세우스에 패한다. 결국 아킬레우스의 방패와 갑주(甲冑)는 오뒷세우스의 차지가 된다.

   
▲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서로 갖겠다고 다투는 아이아스와 오뒷세우스, 가운데 말리고 있는 이가 아가멤논이다. 르부르 박물관, 사진 Jastrow

사실 아이아스는 헥토르와 일대일로 맞섰던 용장이다. 그는 아킬레우스와 함께 그리스 군의 양 측면을 맡았던 만큼 용맹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입장이었다. 양 측면은 적의 공격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매우 위험한 위치다. 따라서 그 위치는 항상 최고의 용맹스런 전사에게 주어졌다. 아이아스는 무공이 많은 자신이 당연히 명예로운 아킬레우스 무구의 새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아이아스와 오뒷세우스가 장병들 앞에서 서로 무공을 자랑하는 연설 장면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잘 나타나있다. 독자들은 이 대목을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이 작품에서 아이아스가 왜 자살하게 이르는지 그 내면의 동기를 잘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아이아스는 자신이 아킬레우스와 사촌 간이라는 점, 헥토르와 맞대결해서 물리친 점, 전투에서 오뒷세우스의 ‘비열한 목숨’을 구해준 점 등을 강조했다. 반면 오뒷세우스는 아킬레우스를 설득하여 참전시킨 점, 아킬레우스의 시신과 무구를 자신이 둘러메고 왔던 점(다른 전거에서는 아이아스가 아킬레우스의 시신을 운반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은 싸우는 일보다 아가멤논과 함께 ‘싸울 때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아이아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 아킬레우스의 시신을 둘러메고 가는 아이아스, BC 540~530 작, 독일 뮌헨의 Staatliche Antikensammlung 소장, 사진 Bibi Saint-Pol

누구의 공로가 컸던가는 논외로 하고, 말 주변이 없는 아이아스는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오뒷세우스에게 혹독하게 비판받고 큰 망신을 당한다. 용맹과 무용을 앞세우던 아이아스는 지략으로 승리에 공헌했다는 오뒷세우스에게 판정패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킬레우스 무구를 욕심내던 아이아스는 이 패배로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공적과 이미지가 다 무너지는 것 같은 수치심을 느꼈을 법하다.

패배한 아이아스는 모멸감과 분노가 극에 달해 애꿎은 막사 밖의 가축 떼를 도륙하여 분풀이 한다. 한참 후에 자신이 저지른 광기의 추태를 깨닫고 칼을 땅에 꽂고 뛰어들어 자결한다. 그 칼은 헥토르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다. 두 사람의 전투 중 대결에서 아이아스는 자신의 혁대를 헥토르에게 주고, 헥토르는 자신의 칼을 아이아스에게 답례로 주었었다.

서로의 선물은 곧 상대에게 죽음의 선물이 되었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해 자신의 혁대로 발목이 묶이고 아킬레우스의 전차에 매여 끌려 다녔다. 그 때 사용된 혁대가 바로 아이아스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 아닌가. 헥토르의 칼은 아이아스의 분노의 몸을 향했다. 이 작품은 전반부에 아이아스가 자책과 절규 속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후반부에는 아이아스의 이복동생 테우크로스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이아스의 죽음에 대해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그의 아우 메넬라오스는 그가 가축을 도륙한 것이 사실은 그리스 장병들을 도륙하려 한 것이었다며(신이 개입해서 간신히 짐승들로 향하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아스의 시신을 내다버리라고 명령했다. 아이아스를 그리스 군에 칼을 겨눈 ‘공공의 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일개 궁수에 불과했던 아이아스의 아우 테우크로스는 이 두 최고 지휘관에게 강력하게 반발하며 누구보다도 공적이 큰 아이아스를 홀대하지 말라며 두 사람의 횡포와 부정의를 질타한다. 이 과정에 아이아스와 치열하게 맞섰던 오뒷세우스가 개입하여 탁월한 전사였던 아이아스의 명예를 존중하라고 아가멤논을 설득한다. 결국 한 때 아이아스를 야멸차게 몰아세우던 오뒷세우스가 베푼 아량과 관용에 의해 아이아스의 장례를 치르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이아스의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전쟁이든 선거든 승리 이후에는 기여한 사람들의 공로의 크고 작음을 따지게 되고 이에 따른 전리품과 포상이 배분된다. 기업이나 어느 조직이든 큰 성과 뒤에는 누구에게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성과가 크면 클수록 보상에 대한 경쟁이 심각해진다. 승리 또는 성공에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이냐는 평가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아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개별적인 전투에서는 용맹하고 뛰어난 무술로 자주 승리했지만, 전쟁의 판세를 뒤집는 전략적 성취는 이루지 못했다. 반면 오뒷세우스는 전사로서의 역량은 아이아스에 비해 떨어졌지만, 아킬레우스의 참전을 이끌어내고, 트로이 진영을 야습하거나, 트로이 목마 작전을 주도하는 등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지혜와 권모술수가 뛰어났다.

결국 동료 장수들은 우직한 독불장군 같은 아이아스보다 조직 전체의 이익을 위해 적기에 다양한 역할을 해준 교활한 오뒷세우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아이아스의 패배는 전투에서 승리하기보다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아이아스가 동료 장수들의 투표에 의한 결정에 승복하지 못하고 끝내 자살하고 만 것도 어쩌면 아이아스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충동적 성격을 그대로 대변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소포클레스는 이 작품에서 충직하고 용맹하지만 지혜가 부족했던 아이아스의 죽음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반면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아이아스를 적대적으로 대해 죽음의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게 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과연 실제로 그랬을까? 작품 속의 정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이아스가 분풀이로 군수품이기도 했을 가축 떼를 도륙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그리스 군에 재정 손실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죄만으로 그를 ‘공공의 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트로이 전쟁에서 그가 보여준 혁혁한 전공을 감안하면 지나친 처사일 수 있다. 다만 군대에서 표결로 결정한 사항에 불복하는 아이아스의 오만(hybris)과 방종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가 커서 그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이는 이해할만 하다.

어떻든 소포클레스가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를 죽은 동료 장수의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게 하는 냉혹한 지휘관으로 설정한 것은 과장된 것 같다. 소포클레스는 이런 대립적 구도를 설정해서 죽어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아이아스의 비극적 운명을 강조하고, 이와 대조적인 테우크로스의 항변과 오뒷세우스의 역성을 통해 아이아스의 실추된 명예를 세우주려 했던 것 같다. 그가 즐겨 쓰던 ‘비극의 확대(parekstasis tragica)’ 기법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아가 이런 추정을 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소포클레스는 아테네인이다. 그는 조국에 대한 애정과 충심이 남달랐던 사람이다. 그는 생애에 여러 차례 아테네의 장군으로 선출되기도 하고 다른 고위직도 여러 번 맡을 만큼 아테네의 사회 지도층이었다. 그는 어릴 적 3차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의 분기점이 된 살라미스 해전의 승전을 축하하는 소년합창단의 선창자로 신께 감사드리는 찬신가(paian)을 선창했었다. 그런 그에게 살라미스 해전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졌던 살라미스 해협을 내려다 본 모습이다. 현재도 살라미스의 좁은 해협에는 많은 상선들이 정박하거나 왕래하고 있다. 건너다보이는 섬이 살라미스 섬이다. 본토의 해안에는 그리스 해군이 주둔하는 등 군사적으로 상업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사진 촬영 지점 언덕 어딘가에서 크세르크세스는 전투 장면을 관전했었다고 한다. ⓒ박경귀

실제 그리스와 아테네 세계의 기회회생을 이끈 살라미스 승전은 아테네의 융성기를 이끈 최고의 계기가 되었었다. 아테네 전 시민이 살라미스 섬으로 피난을 가서 그곳 주민들의 신세를 졌다. 특히 그곳 주민들은 페르시아에 함께 맞서 싸우며 피를 나눈 동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아테네 시민들이 살라미스와 그곳 주민들에 대해 각별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살라미스의 영웅인 아이아스를 어떻게 소홀히 대할 수 있었겠는가?

애국심이 투철했던 소포클레스가 이 희곡을 통해 아이아스의 비극적 상황을 최대한 옹호하고, 당시 아테네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스파르타와 인연이 깊은 미케네 왕국의 왕 아가멤논과 옛 스파르타의 왕이자 아가멤논의 동생인 메넬라오스에게 악역을 맡겼던 건 아닐까? 테우크로스가 항변하는 과정에서 아가멤논의 출신을 언급하며 모욕을 주는 대목에서 아테네 시민들은 묘한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탄원하는 여인들(Hiketides)>,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1, 2쇄). 6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