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지식인 ‘상대적 빈곤’은 호들갑…개인 문제 사회책임 위험한 발상
   
▲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

서초 세 모녀 살인 사건의 피의자 강모씨는 부인과 두 딸을 목 졸라 살해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죽인 강씨는 이를 경찰에 신고한 후, 본인도 자살을 꾀하려 도주하다 붙잡혔다. 강씨의 가족 살해 동기는 경제적 이유다. 강씨는 빈곤함을 견디지 못해 가족을 죽였다고 스스로 밝혔다. 강씨는 지난 2년간 실직 상태였고 부동산 담보 대출을 5억 원 받아 주식에 투자했으나 실패했다. 강씨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가족과 삶을 끝내려 했다고 전해진다.

가장의 가족 살해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

가족을 죽인 중산층 가장. 그 후 본인은 자살하려 했던 이유에 대해 세간의 시선은 비슷하다. “직장에 다니던 중년 남성이 재취업하기 어려운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원인이다”, “상대적 빈곤이 사회의 새로운 불안 요소로 등장했다” 라는 분석이 잇따른다.

교수라는 사람들이 나서서 “더 이상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없는 상대적 박탈감을 강씨는 충분히 빈곤으로 받아들였을 것”, “재력과 지위로 개인을 평가하는 한국적 문화가 강씨 같은 중산층을 나락으로 이끈 주범”, “강씨가 개인의 일탈에 그치지 않고 가족까지 살해한 것은 상대적 빈곤이 우리 사회의 독특한 가족주의와 결합할 때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얘기한다.

상대적 빈곤? 언제 어디서나 항상 있었던 것

언론과 지식인들은 상대적 빈곤을 지적한다. 그런데 상대적 빈곤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있었던 것이다. 같은 조리원 동기라도 어떤 부모를 두었느냐에 따라 아이가 입는 옷과 먹는 것이 달라진다. 군대에서 지내다 보면 집에서 용돈을 넉넉히 보내주어 PX를 마음껏 자주 이용하는 병사와 군인월급만으로 버티는 병사로 갈린다. 하다못해 초등학교 시절 옆자리 짝궁과 비교하면, 문구류도 차이난다. 회사 옆자리의 동료와 비교해도 입는 옷과 주말에 여가를 보내는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강모씨가 6일 서울 서초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수만 년 전 수십 명의 공동체로 생활하면서 소유-소비를 동일하게 분배하던 원시수렵시대를 제외하고,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재산이 축적되고 빈부는 자연스레 생겨났다. 독재든 왕정이든 중동석유국가든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이든 현대민주주의 국가든 어느 곳에서나 시대를 가리지 않고 빈부 격차는 있어 왔고, 이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양식과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를 인정해야 한다. 단, 유념해야 할 것은 최상위, 상위계층의 구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바뀌었다는 것이고 상위계층이 누리는 삶의 질 또한 현격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상대적 빈곤, 즉 격차는 유전자에 기인한다. 수억 분의 1이라는 확률로 인해 사람들은 각기 다른 유전자를 타고 난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다른 대우를 받는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배우 김태희와 내 아내가 사회로부터 같은 대접을 받지 않는다. 야구동호회에 나가는 친구(무역회사 근무)는 LA다저스의 류현진 선수 보다 연봉이 낮다. 회사에 수십억의 이득을 가져다주는 후배 직원은 나보다 더 빨리 승진할 것이다. 직원들 월급을 마련하고자 불철주야 애쓰는 사장님과 월급쟁이 회사원의 급여봉투는 엄연히 다르다.

상대적 빈곤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이다. 사람마다 그 자질과 능력, 재화를 벌어들이는 수완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대우 받는다. 상대적 빈곤을 이루는 원리가 무너지는 것이 오히려 불공정하다. 공정한 사회란 보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재능으로 섬기는 만큼 다른 이들로부터 대접을 받는 사회다. 공정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개인적으로는 부당할뿐더러 사회 전체적인 발전은 불가능하다. 대접을 제대로 못 받는데 어느 누가 기술혁신을 일으키고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재능이 차고 넘친다고 스스로 여겨도 이를 다른 이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허사라는 점이다. 자신의 유전자 잠재능력을 잘 발휘하느냐 못하느냐는 본인 노력에 달려있지만,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우를 높게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상대방의 수요에 맞춰서 노력해야 한다. 

서초 세 모녀 가족을 죽인 강씨의 착각, 강씨의 경제 개념

서초 세 모녀 살해 사건의 전말은 안타깝다기 보다 잔인하다. 빚더미에 견디지 못해 살기 싫다면 혼자 자살하지 왜 애꿎은 가족들을 죽이나. 강씨는 뭔가 크게 착각했다.

강씨는 서울 강남에 중대형 아파트(44평)를 소유했다. 일제 중형차와 국산차 등 차량 두 대를 보유하고 있다. 부동산을 담보로 5억 원을 대출했는데 이 중 남아 있는 돈은 1억3000만원이었다. 강씨가 소유한 아파트는 시가 11억 원이다. 강씨는 서울 명문사립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IT부품 회사에서 근무했었다. 실직한 후 강씨의 재취업은 계속 안됐다. 대출금으로 했던 주식투자는 원금을 까먹고 실패했다. 강씨는 스스로 “유복하게 살아온 내 입장에선 견딜 수 없는 힘든 상황”이라고 진술했다.

강씨의 경제 개념은 남들과 좀 다른 것 같다. 강남 중대형 아파트를 처분하면 대출을 전부 해소하고 세 모녀와 함께 서울 어디든 얼마든지 집을 옮길 수 있다. 서울 강남에서도 전세라면 충분히 살 수 있다. 차도 국산차 한대만 끌면 된다. 강씨 가족은 강씨의 실직 뒤 씀씀이를 줄이지 않고 다달이 생활비로 400만원씩 대출금에서 빼서 썼다. 엄밀히 말해 월 400만원의 생활비를 쓰는 가족은 중산층이 아니다. 우리나라 상류층에 가까운 소비행태다. 서민 대부분은 가구당 한 달 생활비를 200만원도 채 쓰지 못한다. 진짜 서민은 빚 1억도 힘들다.

사회가 아니라 당신의 책임

서초 세 모녀는 강씨라는 사람이 죽였다. 남편이자 아빠인 강씨가 말이다. 사회의 책임은 아무 것도 없다. 상대적 빈곤은 어느 사회에나 있어 왔다. 지금까지 살다 죽어간 수백 수천억의 인류 중 상대적 빈곤을 겪지 않았던 사람은 백사장의 모래 한 줌도 되지 못하다. 언론과 지식인들이 떠들어 대는 상대적 빈곤은 호들갑이자 위선이다. 상대적 빈곤, 남들과의 격차를 특별취급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서울 강남 등 부동산을 서너 개 갖고 있던 필자의 가족은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모든 재산을 날려버리고 가족 빚이 2억 원 가까이 쌓였던 시기가 있었다. 오천으로 시작했던 빚은 이삼년 넘어가니 2억에 달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냈다. 필자는 매월 닥쳐오던 대출이자 납부와 생활비 인출, 월세 송금을 맞추기 위해 앞만 바라보며 정신없이 일했다. 몇 년 전 모든 일이 잘 정리되기 전까지 가족 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지옥의 나날을 보냈다.

세상에 이런 ‘미생’의 삶은 수두룩하다. 그래도 거의 모든 이가 소중한 누군가를 생각하며 힘내고 웃으며 함께 간다.

송구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 고한다. 핑계대지 마라. 회피하지 말라. 누구나 힘들고 어렵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 책임이다. 실체도 없는 사회가 당신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사회가 아니라 당신의 책임이다.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