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입니다’. 오늘날 모든 산업과 시장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한 가지 꼽는다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모든 기업들이 똑같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들은 모두 제품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고 제품군의 종류를 확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노력들은 결국 다른 경쟁자들과 똑같아져버리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여기 동일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독특한 전략으로 '느리지만 꾸준히' 시장을 지배하는 '물건'들이 있어 주목된다.

[미디어펜=김세헌기자]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변한다. 외모도, 하는 일도, 미약하나마 성격도, 그리고 입맛도. 어렸을 때는 질색하던 선짓국 한 그릇이 간절해지고 입에 달고 살던 사탕과는 점점 멀어져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고해지는 맛도 있다. 추억의 맛이다.

누구에게나 혀끝 깊숙이 박혀 있는 추억의 맛이 있다. 때로 그 맛은 구체적인 음식으로 표현되는가 하면 기억과 기억 사이의 다리로 존재하기도 한다.

   
▲ 빙그레 '바나나맛우유' 배우 김슬기 유튜브 광고 동영상 캡처

지난해 출시 40주년을 맞은 빙그레 ‘바나나맛우유’는 오랜 세월에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가공우유 브랜드다. 1974년 출시된 이후 하루 평균 80만개 이상, 1년에는 2억5만개 이상 판매되는 가공우유 M/S와 편의점 판매 ‘넘버원’ 제품이다.

1970년대 초 정부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값에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우유 소비를 장려했다. 그렇지만 흰 우유는 생각만큼 소비가 늘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가공우유 제품 개발을 식품 회사들에게 독려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초코맛, 딸기맛 우유 등 다양한 가공 우유가 나왔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예상만큼 폭발적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빙그레 연구팀은 당시 비싸고 귀했던 바나나를 활용한 우유를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를 내기에 이른다. 당시만 해도 고급 과일의 대명사였던 바나나는 과즙을 내기가 어렵고 가격도 비싸 가공식품 원료로 사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빙그레는 1년 이상 연구를 거듭한 끝에 바나나를 넣지 않고 바나나 맛이 나는 우유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풍부한 맛을 내기 위해 우유 함량을 85%까지 높였고, 용량도 당시 가공우유에서 일반적이던 200mL가 아닌 240mL로 늘렸다.

또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바나나의 노란색이 소비자의 눈에 그대로 드러나게끔 반투명으로 만들기도 했다. 워낙 맛이 탁월하기도 했지만 소비자들로 하여금 ‘먹기 힘든 바나나, 우유로라도 먹자’라는 반응을 끌어냄으로써 결국 최고의 가공우유로 정상에 등극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