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은 상생의 삶, 오이디푸스는 무한 욕망 공멸의 길 질주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47) - 권력 욕망이 부른 가족의 붕괴
아이스퀼로스(BC 525?~BC 456)의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장수>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영화 '국제시장'이 장안의 화제다. 가족을 지키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필생의 신조로 삼아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맏아들 가장(家長)의 눈물겨운 일생을 그린 수작(秀作)이다. 흥남부두 탈출의 아비귀환 속에서 졸지에 아버지와 여동생과 헤어진 덕수네 나머지 가족은 온갖 험난한 일을 마다않고 고생한 끝에 어엿한 가정을 일군다.

가장 덕수에게는 철부지 여동생도 있었지만, 삯바느질로 어린 아이들을 키운 늙은 어머니, 형의 희생에 보답하듯 수재(秀才)로 성장하는 동생도 있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은 덕수가 고생과 굴욕을 달게 여기고 살아야 할, 아니 반드시 이겨내고 살아내야 할 이유가 된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덕수네 일대기가 곧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만들어 온 보통 사람들인 나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의 일생이기도 한 때문일 것이다. 덕수네 가족사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국제시장'이 가족의 행복한 삶이 서로의 희생과 헌신의 바탕 위에 꽃피는 눈물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웅변한다면, 오이디푸스 가족의 삶은 가족 간의 무한 욕망과 이기의 추구가 가족 전체를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는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서로를 죽이는 과정을 묘사한 비극이다. 덕수 형제가 상생(相生)의 삶을 일구었다면,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공멸(共滅)의 길로 질주했다.

세계 4대 비극작가의 한 사람인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퀼로스(Aeschylos)는 기원전 467년 '라이오스', '오이디푸스', '테바이가 공격한 일곱 장수' 3부작으로 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는 전해지지 않지만,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를 통해 이 비극의 전말에 관한 신화를 알 수 있다.

이 비극은 오이디푸스 왕가의 비극 전모를 알아야 비극적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비극의 주인공은 테베의 왕 에테오클레스와 그의 동생 폴뤼네이케스, 그리고 이들의 누이동생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다. 이들은 모두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과 두 딸들이다.

상황은 오이디푸스가 두 아들에게 저주를 남기고 떠난 이후에 두 아들 간에 벌이지는 일이다. 오이디푸스는 우연히 테베의 왕인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미망인이 된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된다. 어머니인줄 모르고 결혼하여 이 비극의 네 자식들을 낳은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모든 전말을 알고 비탄과 절망 속에 스스로 두 눈을 찔러 맹인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난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가 아버지를 홀대하고 결국 오이디푸스를 테베에서 내쫓자 오이디푸스는 두 아들에게 죽음의 저주를 남긴다. 이 상황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 잘 묘사되었다.

   
▲ 테베의 왕이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비극적 사실을 알게 되자, 운명을 저주하며 두 눈을 스스로 찔러 장님이 된다. 그 후 오이디푸스는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에게 내쫓겨 딸 안티고네에 의지하여 방랑하게 된다. 대중들이 오이디푸스를 그를 경멸하고 저주하고 있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Charles Jalabert (1819~1901)의 1842년 작(作), 마르세이유 미술관 소장.
이 비극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이 대를 이어 펼쳐지는 정황을 그리고 있다. 에테오클레스는 아버지가 떠난 이후 테베의 왕이 되었다. 원래 두 형제가 왕위를 1년씩 돌아가며 맡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한번 권력을 맛을 본 에테오클레스는 1년이 지나고도 동생 폴뤼네이케스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다.

폴뤼네이케스는 이에 반발하여 장인이 왕으로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로 망명하고, 아르고스의 왕 아드라스토스의 군대를 빌려 조국 테베를 친다. 그는 아르고스의 용맹스런 장수 여섯 명을 대동하여 테베의 일곱 성문을 각각 전담시켜 공격하도록 한다. 결국 형제 간의 권력다툼이 멀리 떨어져있던 아르고스 왕국과 테베 왕국 간의 전쟁을 야기한 것이다. 두 형제 간에는 양보와 희생, 배려라는 덕목이 애초에 싹트지 않았던 모양이다.

테베의 전령은 시시각각 몰려오는 폴뤼네이케스 군대의 일곱 장수들을 차례로 에테오클레스에게 보고한다. 전령이 각 성문의 공략을 이끄는 장수의 용맹과 돌격해 오는 모습을 상세히 고하면 에테오클레스는 이에 맞설 장수를 한 명 한 명 지명하며 성의 사수를 독려한다.

첫 번째 성문, 두 번째 성문, 세 번째 성문...... 쳐들어오는 지휘 장수들과 대적할 장수들이 차례대로 지정되어 나가는 과정은 비극의 심연으로 한발 한발 깊숙이 빠져 들게 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에테오클레스는 이 전쟁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안다.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그는 동생 폴뤼네이케스와 그의 군대를 반드시 물리쳐야만 한다.

마지막 일곱 번째 성문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장수가 폴뤼네이케스로 밝혀지자, 에테오클레스는 스스로 일곱 번째 성문의 방어 장수로 나선다. 그는 스스로 만든 형제 간의 운명적 대결을 맞닥뜨린 것이다. 결국 아버지 오이디푸스가 저주한 대로 두 형제는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혀 함께 죽게 된다.

   
▲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형제가 창으로 서로의 가슴을 찔러 죽음을 맞게 되는 장면이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Giovanni Battista Tiepolo(1696~1770)의 1725에서 1730년 사이 작(作).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스파르타의 경우 두 명의 왕이 함께 공동왕위를 갖게 하여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만약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스파르타 방식으로 공동왕이 되었더라면, 아니면 우애와 신뢰로 1년씩 교대로 왕위를 주고받았더라면 이런 참화는 없었을 터. 하지만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형제 간의 피를 불렀고 왕국마저 파멸시켰다. 결국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추방하고 난 후 불효자식 간의 벌인 왕위 다툼은 두 형제의 목숨을 거두는 비극으로 끝났다.

이후 테베의 왕위는 이들 형제의 외삼촌인 크레온에게 넘어간다.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를 국가를 수호하다 죽은 영웅으로 후하게 장사지낸다. 반면 테베를 공격했던 적장 폴뤼네이케스는 조국을 공격한 역적으로 몰아 들판에 내다버리고 아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한다. 이에 반발하는 여동생 안티고네가 오빠 폴뤼네이케스를 몰래 묻고 크레온과 갈등을 빚다 죽게 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가 이 과정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이 비극에서 관객들은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아이스퀼로스는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가 서로 대면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상대를 준엄하게 질타한 후 벌이는 처절한 결투 장면을 전혀 묘사하지 않았다. 이는 두 형제의 추악한 대결과 비극적 상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청중에게 맡긴 셈이다.

오이디푸스 왕가의 비극은 대를 이어 그의 네 자식들을 모두 비참하게 죽게 만들며 종결된다. 비극적 신탁을 피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비극적 운명의 굴레를 벌어날 수 없었던 오이디푸스, 어버지를 내쫓고 추악한 권력욕과 탐욕으로 왕위를 다투다 서로를 죽인 두 형제. 그들은 서로가 믿는 신에 의지하여 비극적 운명 속으로 돌진하여 스스로 파멸했다.

한 사람은 조국을 수호한다는 명분, 한 사람은 약속의 신뢰와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명분으로 한 핏줄을 나눈 형제의 가슴에 창을 겨눴다. 아이스퀼로스는 이 비극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두 아들은 아버지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삶을 포용했어야 했다. 아버지를 내친 것부터 비극은 시작된 것이다. 가장(家長)의 운명적 비극을 가족 모두가 안고 함께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았어야 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모진 운명의 개입으로 비극으로 몰린 오이디푸스의 슬픔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있었더라면 두 형제의 비극적 대결과 죽음의 저주도 막았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오이디푸스 가족의 파멸은 가족 간에 희생과 양보대신 이기와 탐욕이 부른 필연적 비극이다. 가문을 일군 가장을 버리고 아무도 진정한 가장 역할을 맡으려 하지 않고 이기적 존재로 질주하는 순간 가족은 공멸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비극경연대회에서 아테네인들이 이 작품을 우승 작품으로 꼽았다는 것은 오이디푸스 가문의 몰락이 주는 충격과 교훈이 매우 컸다는 것을 의미할 것 같다. '국제시장' 못지않은 대흥행작이었다는 얘기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1, 2쇄). 6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