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성장잠재력 0%대로 추락하지 않으려면…좌승희 경제학의 경고

   
▲ 조우석 문화평론가
국문학자인 조동일(76) 전 서울대 교수가 예전 대학본부에 저술연구비를 신청했다가 퇴짜 맞았던 경험을 고백한 적이 있다. 스스로 곰곰 생각하니 이유는 하나였다. 저술제목이 평균적 한국인이 보기에 너무 거창했다. 대학 측이 아예 감당을 못해 절절 맸던 것이다. 당시 저술 제목이 이랬다.

<우리 학문의 길>. 자신의 전공인 국문학 울타리를 넘어 철학을 포함한 인접학문을 통섭한 뒤 모든 인문학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론체계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래서 가히 끝판왕 일반이론(general theory)이다.

바다 건너 서양의 수입 학문을 소개하거나, 각주 붙이는 게 고작인 훈고학(訓詁學)을 접고 세계에 통할만한 한국발(發) 인문학을 위한 담대한 선언이다. 그 저술은 비유컨대 보세가공업을 졸업하고 학문의 글로벌 우량기업으로 가자는 프로젝트였다. 끝내 저술지원비는 못 받았지만, 오기로 책을 냈다.

꼭 20년 전 큰 반향을 일으켰던 <우리학문의 길>(지식산업사)이 그 책이다. 지금 읽어도 설득력있는 그 저술에서 조동일은 우리의 고질인 외국학문 사대주의 풍토를 의미심장하게 지적했다. 왜 한국에서는 <순수이성비판>의 칸트가 출현하면 안 되느냐? 감히 칸트가 되겠다는 학자는 손발을 꽁꽁 묶어둔 채 칸트에 관한 올망졸망한 연구서-개론서만을 쓰라고?

한국경제의 성공스토리를 경제학의 표준으로!

좌승희 경제학에 당초 필자가 매료됐던 건 그런 '오랜 정신적 불구'를 떨쳐낸 용기 때문이다. 일테면 그의 책 <이야기 한국경제>의 부제가 '경제발전의 코리안 스탠더드를 찾아서'이다. 그 아래의 카피는 더 후련하다. "한국경제의 역사를 모르고 경제발전을 논하지 말라." 우리 얘기를 '학문의 올림픽'에 들고 나가서 당대의 표준으로 만들자는 멋진 제안이다.

우리가 어떤 나라이던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괄목할만한 경제발전을 이루지 않았던가? 이 집단경험이야말로 경제학을 위한 최고의 토양이다. 한국경제 70년을 설명한 일반이론을 만들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두루 적용하자는 제안이다.

물론 경제학에 경제발전론이란 영역이 있다. 그건 2차 대전 직후 만들어졌다. 식민지들이 우후죽순으로 독립한 상황에서 빈곤을 떨쳐내는 과제가 발등의 불이었다. 안타깝게도 경제발전론은 당시 시대의 물결이던 좌파이념의 늪에 빠졌다. 평등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당연했다.

일테면 개발경제학의 으뜸가는 모토가 균형발전인데, 그건 평등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데, 발전과 풍요를 일궈낸 유일한 예외가 우리다. 빈곤의 땅 대한민국이 지구촌의 신데렐라로 발딱 올라선 것이야말로 20세기 세계경제사의 최대 드라마다. 필자는 믿는다.

   
▲ 박근혜 대통령이 제2 한강의 기적으로 국민행복시대 열겠다고 밝히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과 2017년 잠재성장률을 4%대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밝혔다./뉴시스
자유주의 경제학마저 던진 실사구시의 태도로 우리를 봐야

좌승희 박사가 1960년대 서울대 졸업 뒤 미 UCLA에서 박사학위를 했지만, 자기 경제학을 일구는 힘은 한강의 기적에 대한 탐구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미 연방준비은행 이코노미스트로 근무했지만, 경제학의 기존 도그마를 버린 채 실사구시의 자세를 취했기에 뭐가 좀 보인 것이다.

그걸 정식화한 게 불평등의 경제학, 즉 차별화 경제다. 세상 모두가 그것 때문에 못 살겠다고 난리치는 불평등, 피케티를 포함한 아류 경제학자들과 못난 좌파들이 아우성인 불평등이야말로 경제발전의 숨은 원리라는 역설이 좌승희 경제학의 핵심이다. 그걸 경제학의 일반이론으로 끌어올렸다.

이때 그는 주류경제학에서 가르치는 이론적 약점에서 탈출했다. 사실 신고전파 경제이론(완전경쟁모형)은 경제력의 차등과 기업의 차등적 성장을 설명 못한다. 불평등-차등을 비정상적인 그 무엇으로 규정하고 규제의 칼을 빼드는 바보짓을 반복한다. 일종의 학문적 함정 혹은 허위(虛僞)다. 또 있다.

주류경제학은 시장경제학과 민주주의 사이의 '썸을 타는 묘한 관계'를 파악 못한다. 1인1표의 민주주의가 말로는 그럴싸하지만, 차등-불평등을 먹고 자라는 경제에 항상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는 입장이 좌승희 경제학이다. 다음 인용문은 주류경제학의 함정을 지적하면서, 개발연대 한국경제 성공에 숨어있는 역설을 암시한 좌 박사의 글이다.

"한국경제는 세계경제발사에서 돌연변이다. 경제학에서 결코 권하지 않는 독재와 관치(官治)경제 아래서 도약을 이루었고, 주류경제학에서 부정하는 유치산업육성을 통해 산업화를 이뤘다. 또 경제학이 우려하는 경제력 집중과 경제적 불균형을 쌓으면서 성장을 이루었다.…유감스럽게도 주류경제학은 한국경제의 도약을 일관되게 설명 못한다. 경제학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해서 성공했으니 (저들 입장에선)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좌승희 경제학은 요즘 유럽 선진국 그룹이 비실대는 현상도 명쾌하게 설명한다. 즉 저들은 평등의 신(神)을 떠받드는 사회민주주의로 돌아선 뒤 저성장에 헤맨다. 사실 유럽은 비민주적인 19세기 풍토에서 부국으로 도약했다. 그게 진실이 아니던가? 좀상스러운 학문 사대주의를 벗어나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법이다.

한국경제의 실패는 개발연대에 대한 진단이 잘못된 탓

반복하지만 좌승희 경제학은 우리를 바로 보자는 학문적 제안에 다름 아니다. 개발연대 우리의 성공의 비밀을 제대로 안다면, 1960~70년대를 근거없이 "암울했던 시대"라고 말하는 입버릇을 당장 멈춘다면, 과거와의 화해가 가능하다.

산업화시대는 불평등-차별화를 동력 삼아 성장하자는 정치 리더의 위대한 비전이 통했다. 그걸 박정희는 국민총화라고 말했고, "싸우며 건설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며 끝내 성공을 거뒀다.

필자는 6년 전 단행본 <박정희 한국의 탄생>을 쓰며 그 시절을 훑어볼 수 있었다. 그건 "박정희 가슴을 들어가 본 경험"이었는데, 그래서 몇 해 전 좌승희 경제학을 어렵지 않게 흡수할 수 있었다. 관건은 지금이다. 저성장에 헤매는 2000년대 초반 박정희 패러다임을 적절히 활용할 경우 우리가 원하는 재도약이 가능하다. 당장 '보편복지 어쩌구' 따위나, 평등주의 포퓰리즘과의 결별이 핵심인데,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주문하자.

첫째 재벌과 대기업이 일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라. 대기업을 불평등의 원흉으로 모는 섬뜩한 반기업 정서로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걸 국민에게 설득해야 한다. 즉 기업에게 성장유인부터 주라는 뜻이다.

둘째 회사를 타도 대상으로 삼는 강성 노조를 정부가 나서 제어하라. 그 역시 당신들의 몫이다. 그리고 셋째 지난 번 칼럼에서 쓴대로 평등주의가 낳은 괴물인 수도권 규제를 당장 풀라. 경제회생의 훌륭한 첫 출발이 될 것을 확신한다. 만일 그걸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찌 될까?

"앞으로 10년 내에 성장잠재력은 0%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 경제는 수년 내 성장을 멈춘다." 그게 좌승희 경제학의 가슴 철렁한 경고다. 중산층의 몰락, 양극화와 빈부격차, 가계부채 증가, 일자리 없는 청년들이 결혼 거부, 출산율의 저하와 고령화 사회 그리고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의 증가…. 지금 이대로라면, 이 최악의 디스토피아를 피할 수 없다.

물어보자. 누구의 말대로 '모두가 가난해지는 평등사회'가 우리의 소원인가? 그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 경제적 자살을 유도하는 평등교(敎) 좌파들과 얼치기 지식인들의 꼬드김일 뿐이다. 지금이야말로 진짜 대안을 찾아 뚝심있게 밀고 나갈 때다.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