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50)- 불행을 행운으로 바꾸는 그리스인의 지혜
에우리피데스(BC 484? ~ BC 406?)의 <이온(Ion)>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사생아(私生兒), 즉 혼외자(illegitimated child)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문제가 된다. 특히 미혼자가 본의 아니게 임신하여 아이를 낳고 아이의 아버지와 원만한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할 경우, 부모나 아이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더군다나 영아기에 부모에게서 버림 받아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자라는 아이는 성장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큰 혼돈을 겪고 방황하기 십상이다.

사랑이 아닌 범죄에 의해 임신이 이루어진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이 때 아이 엄마는 불법 낙태나 출산 후 아이를 내다버리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선택을 하게 되는 어머니의 심정은 물론 비통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만 고대할 뿐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아이는 더욱 참담한 상황에 처한다.

설사 인연이 닿는 선량한 사람의 품에서 자라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출생 비밀에 대한 의문은 성장과정 내내 자신의 정체성을 혼란시킬 것이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에 이런 번민을 잘 극복하지 못하면 자칫 방황과 탈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는 개인의 아픔을 넘어 사회가 떠안아야 할 문제로 확대된다.

사생아 문제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해소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천된 것 같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도 사생아는 부모와 가문 모두에게 수치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사생아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와 관습은 오늘날 우리와는 사뭇 달랐다. 그들에게는 신을 매개로 한 암묵적 관습이 지혜로운 탈출구 역할을 해 주었다. 겁탈을 당해 슬픔에 빠진 처녀들 대부분은 그 상대가 올림포스 남신(男神) 가운데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사생아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사회의 냉대와 멸시를 받을 수 있었던 사생아를 신의 가호를 받는 특별한 사람으로 변환시키는 지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 <이온>은 이런 예를 잘 보여준다.

이온은 아테네의 왕 에렉테우스의 딸 크레우사(Creusa)가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 낳은 아들이다. 훗날 이온(Ion)은 아테네의 왕이 되고 이오네스족(이오니아족)의 선조가 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리스의 중심 종족인 이오니아족(Ionian)과 도리아족(Dorian)이니, 이온은 그리스 문명의 주축을 형성하는 아테네를 모국으로 하는 범 이오니아인들의 선조인 셈이다.​

이 작품은 자신의 탄생 비밀에 괴로워하는 이온이 부모를 찾아가는 과정의 갈등과 행복한 결말을 그린 작품이다. 크레우사는 아폴론에게 겁탈당해 아이를 낳자 아버지의 에렉테우스의 질책이 두려워 아크로폴리스 아래에 있는 동굴에 아이를 버린다. 이온은 혼인도 하지 않은 처녀인 크레우사에게서 태어나고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사생아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이 아이는 복을 타고났다. 제우스신의 전령인 헤르메스가 이 아이를 델피의 아폴론 신전으로 데려가 아이는 신전의 하인으로 자라게 된다. 이온이라는 이름도 이때 지어진다.

크레우사는 후일 크수토스(Xuthos)와 결혼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자, 출산을 기원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찾는다. 자식을 열망한 크수토스는 델포이 근처 다른 사제에게서 아폴론 신전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아들이라는 아폴론의 신탁을 듣는다. ​훗날 크레우사는 크수토스 사이에서 두 아들 아카이오스와 디오메데를 더 얻는다.

크수토스가 아폴론 신전에서 이온을 만나자 신탁에 따라 이온을 아들로 삼으려한다. 그러나 이온은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가 갑자기 자기가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에 반발한다. 한편 크레우사는 크수토스가 이온을 아들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남편이 외도로 얻은 아들로 오해한다. 이에 그녀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이온을 죽이려 시도하고 이온에게 발각되자 목숨을 탄원하기 위해 아폴론 신전으로 피신한다.​

   
▲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유적이다. 거대한 신전은 파괴와 지진으로 허물어지고 거대한 기둥 여섯 개만 덩그러니 남았다. ⓒ박경귀
크레우사는 아폴론이 자기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아 놓고도 책임을 지지 않았던 것에 대한 원망과 자기 아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녀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는 정말 아폴론이었을까? 사실여부를 차지하고 크레우스는 그렇게 믿었고, 아버지의 역할을 하지 않은 아폴론을 책망했다. ​

크레우사 역시 마음으로 자신의 아들을 찾고 싶었지만 결혼을 한 이후 자신의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아무튼 남편이 외도로 낳은 아이를 입양하려는 것으로 오해한 크레우사는 이온을 죽이려다 오히려 이온에게 심문을 당하고 죽을 지경에 이른다.

결국 크레우사는 자신이 사생아를 낳게 된 정황을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빗대어 이온에게 밝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온이 바로 자신이 버린 아들임을 알게 되고 격정적인 모자(母子) 상봉이 이루어진다. 그녀와 이온은 이 사실을 감추고 크수토스와 함께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결국 이온의 아버지 아폴론의 가호로 아폴론 신전에서 사생아의 멍에를 벗게 된 셈이 아닌가. 아폴론이 이온의 아버지가 맞긴 맞는가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생아를 낳으면 왜 대부분 신의 자식이라고 주장했을까? 역사상 등장하는 많은 혼외자의 경우 어느 작품에서도, 어떤 주인공도 아비를 모르는 ‘사생아’란 ‘사’자도 꺼내지 않는다. 그리스 여인들은 정체불명의 아버지의 씨앗들은 모두 제우스, 아폴론, 헤르메스, 포세이돈의 자식들이라 주장한다. ​

   
▲ 아테네 학술원에 조성된 아폴론 동상, 좌우의 높은 좌대 위에 아폴론 상과 아테네 상이 조상(彫像)되어 있다. 올림포스 12신 가운데 두 신이 아테네 시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음을 대변해 준다. ⓒ박경귀
왜 그랬을까? 본의 아니게 겁탈을 당한 여인은 인생을 망칠 수 있는 큰 불운을 맞는다. 이 불운의 고통에 자책하며 자살하거나, 평생 죄의식에 시달리며 인생을 불행하게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극심한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행위의 결과를 신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는 가족과 주위의 비난에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 부모 역시 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한당에게 겁탈당한 것 보다, 신에게 겁탈당한 것이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는 나을 수 있다. 신의 사랑을 받은 것은 크나큰 은총이 아닌가. 주변에서 믿어주느냐 마느냐는 둘째 문제다. 어떻든 그렇게 주장하는 편이 명분이 있다. 신과 혈연관계가 됨으로써 가문의 영예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숱한 영웅들이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던가?

헤라클레스, 아킬레우스, 페르세우스 역시 신들의 자식이다. 신의 사랑을 받아 낳은 자식은 혼외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물론 이는 매우 비합리적인 사유방식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사유방식은 그리스인의 신에 대한 특별한 경배의식에서 나온다. 신화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의 태도와 특이한 문화적 현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에우리피데스는 이 작품에서 그리스 사회에서 통용되는 신과 인간의 결합에 의한 자식의 탄생에 대한 종교적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한편으로 종교적 믿음을 사회적 통념으로 인정해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는 이성적 고민과 신적 사유 사이에서 늘 혼동을 겪는 그리스인들의 인식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크레우사와 이온이 서로 모자임을 확인한 이후에 이온이 크레우사에게 하는 귓속말에서 에우리피데스의 회의주의적 태도와 그리스 대중의 이런 시각이 언뜻 비친다.​

“저는 어머니에게 드릴 말씀이 더 있어요. 이리 오세요. 제가 어머니의 귀에 대고 속삭여 그 일을 어둠에 묻도록 말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처녀들이 흔히 그러하듯, 실족하여 은밀한 사랑에 빠졌으면서 신에게 허물을 떠넘기시는 것이 아닌지, 저로 인해 치욕을 당하는 것을 피하시려고, 제 아버지는 신이 아닌데도, 어머니께서 포이보스(아폴론)에게 저를 낳아드렸다고 주장하시는 것이 아닌지” ​

이온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하지만 때론 환상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신과의 다채로운 서사를 만들어냄으로써 인생의 애환을 스스로 다스렸던 것은 아닐까? ​

이온이 자신의 아버지가 정말 사람인지, 아폴론인지 직접 아폴론에게 물어보겠다고 소망할 때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아폴론이 이온의 아버지임을 말해주는 설정은 그리스인의 상식적 회의를 잠재우는 신들의 고답적인 응답이다. 이렇게 신의 개입으로 인간의 방황과 고민은 해결된다. 적어도 신을 믿는 그리스인들에게 그랬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다. 때론 하얀 거짓말(White Lies)이 진실보다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들은 자칫 불행에 허우적거릴 수 있는 인생을 하얀 거짓말을 통해 행복한 삶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관람하면서 그리스 청중들은 예기치 않은 불행을 신을 통해 행복으로 전환시키는 지혜를 배우지 않았을까. ​

모두가 함께 믿으면 거짓도 아름다운 진실이 될 수 있다. 단 인간의 사악한 장난이 아니라 신의 섭리와 신의 신성한 정돈을 수용할 때에 한해서 그렇다. 그리스인들은 최소한 그렇게 믿고 살았던 것 같다. 현대인들에겐 예기치 않은 위기와 불행을 당했을 때 사회적 명분과 위안을 얻어내 줄 구원자가 더 이상 없다. 현대인이 고독한 이유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신화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비극이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 추천도서: <이온>, 《에우리피데스 비극전집 2》,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1, 2쇄). 7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