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파괴에 대한 일시적 열매...자본주의 발전 가능케 하는 열쇠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통찰 : 슘페터의 독점론

   
▲ 이영조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독점은 무조건 나쁘다?

표준적인 경제학 교과서에서 그리는 독점시장 모형에 따르면 독점은 ‘시장실패’의 대표적인 원인은 하나로 무조건 나쁜 것으로 돼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독점은 네 가지 부정적인 효과를 지닌다.

첫째, 독점은 경쟁자들의 시장 진입을 막음으로써 독점 기업에 자의적으로 가격을 결정할 힘을 부여한다. 둘째, 독점은 어디에서나 생산량에 제약을 가해 경쟁적 가격보다 높은 독점가격을 가져온다. 셋째, 이러한 독점가격은 독점가에게 불로소득인 독점이윤(지대)을 허용하는 한편 자중손실(deadweight loss)을 가져옴으로써 소비자에게 돌아가야 했을 편익을 축소시킨다. 넷째, 자원배분의 효율성은 가격이 한계비용과 일치할 때 극대화되는데 독점 가격은 자원 배분의 효율적인 배분을 방해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저해한다.

이런 내용을 학생들은 의심 없이 달달 외우게 교육을 받고 있다. 그 결과 독점은 누구에게나 나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독점 기업가는 악덕 모리배로 그려지고 진입장벽을 줄여 경쟁자를 늘리고 독점기업의 시장지배력을 허무는 정부와 정책은 소비자의 편익을 증대시키는 선의 사도로 추앙된다.

그런데 “완전경쟁”을 이상화하는 반독점 이론과 정책이 정말 맞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조지프 슘페터의 글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 민노총 등 제도적 독점노조세력들은 좌파와 연대해서 코레일등의 민영화 민주화에 극렬 반대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기업들의 시장점유율 확대에 대해선 독점이라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제도적 특권에 대해선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전투적 노조들은 제도적 독점권을 국민들에게 반납해야 한다. 민노총 신승철 위원장이 코레일의 민영화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잊혀진 듯 잊혀지지 않은 경제학자 슘페터의 독점 변호

조지프 슘페터 (1883-1950)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로 1932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사망한 1950년까지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친 인물이다. 관심도 다양해서 지금은 경제학자보다는 정치학자와 사회학자 그리고 경영학자들이 더 많이 읽고 인용하게 되었지만, 미국경제학회 회장과 미국통계학회 회장을 역임할 만큼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글에서는 1942년에 초간된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독점에 관한 슘페터의 이론을 살핀다. 이 책에서 슘페터의 최대의 관심사는 자본주의의 존속가능성을 점치는 것이었지만, 자본주의의 내재적 활력을 살피는 과정에서 독점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슘페터가 미국에서 활동한 시기는 반독점의 수사와 정책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슘페터는 독점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 매우 독특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당시 미국의 반독점 체계도 현재 우리나라의 공정거래 시스템과 비슷하게 시장지배력의 ‘남용’이 아니라 시장지배력 그 자체를 문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본주의의 놀라운 실적

자본주의의 역사를 검토한 슘페터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본주의가 재화와 용역의 생산량을 계속 확대시키는 데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따금 씩의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가져왔다.

게다가 이런 성장은 그 결실이 엘리트 집단에만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체제의 놀라운 생산성 덕분에 대다수의 사람이 자본주의 이전 시기의 왕조차도 누리지 못한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실의 분배 면에서도 저소득 집단에게 돌아가는 몫이 상대적으로 더 커졌다. 순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자본주의의 성과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슘페터의 주장이다.

자본주의의 성공은 유인구조에서 비롯

그러면 자본주의가 이렇게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체제외적인 일련의 우연한 정황요인에 자본주의가 힘입었다는 주장들을 일축한 슘페터는 자본주의체제의 보상구조(reward structure)를 특히 강조한다. 부르주아적 세계관에서는 돈은 성공을 의미하며 더 많은 돈은 더 큰 성공을 의미한다. 규제되지 않은 자본주의체제는 성공적인 기업가(entrepreneur)에게 엄청난 액수의 돈을 벌 기회를 부여한다.

엄청난 이득이라는 당근은 궁핍의 위협이라는 회초리와 더불어 부르주아계급의 생산 능력과 의욕을 끌어내는 데 특히 유효한 방법인 동시에 이 계급으로의 진입과 그 안에서의 성공 그리고 그로부터의 퇴출(退出)을 규율하는 자동적인 기제(機制)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윤(profit)이 사회내 자원의 생산적인 사용을 보장하는 강력한 유인인 동시에 개개 기업가의 성공과 실패를 재는 객관적이고 비인격적인 척도라는 이야기다.

있을 법한 자본주의(Plausible Capitalism): 슘페터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모델

물론 여기까지는 경쟁적 자본주의체제에서의 이윤의 기능에 관한 고전경제학의 원론적인 논의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슘페터는 원론적인 자본주의경제관을 신봉하지 않았다.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다.

원론에서 그리고 있는 경쟁적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무수한 소규모의 회사가 시장에서 비인격적으로(impersonally) 경쟁하고 있으며 이들은 개별적으로는 시장에 대해 아무런 통제력도 갖지 못한다. 각기 나름의 이윤을 추구하는 이들 소회사들의 분산된(decentralized) 결정작성이 결과적으로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가져온다. 그 이유는 바로 어떤 일개 회사도 시장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슘페터의 ‘있을 법한 자본주의’(plausible capitalism)의 세계는 자신들이 시장에 대해 상당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는 대규모 회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이 경제에서는 주요 산업이 독점가 아니면 소수의 대규모 과점적 회사들에 의해 통제된다. 비교적 분산된 시장에서도 고전경제학류의 “완전히” 경쟁적인 회사들보다는 독점적으로 경쟁적인 회사가 주도적일 가능성이 더 크다. 뿐만 아니라 이들 대회사들은 시장에서의 자신들의 힘을 의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를 사용한다. 가격담합 (price fixing), 진입억제를 위한 과잉설비투자, 경쟁회사의 흡수 등은 모두 슘페터적 자본주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경쟁적 행동의 예이다.

   
▲ 2013년 12월 30일 김명환위원장(가운데) 등 파업주동 코레일노조 간부들이 파업철회를 선언하면서도 현장투쟁은 계속하겠다는 말을 늘어놓은 후 손을 들며 투쟁을 외치고 있다. 철도 부문은 독점이 부질없는 영역이다. 철도를 포함하여 버스, 승용차, 트럭, 항공기, 선박 부문 모두 수송 경쟁의 과정에 함께 놓여있다. 실제로는 독점이 아니다.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그렇다고 한다면 기업가를 추동하는 이윤동기가 자원의 생산적인 사용을 가져온다고 슘페터가 주장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경제학개론 정도만 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종 제한적 방법을 통한 독점가의 이윤극대화가 보다 높은 가격과 보다 낮은 산출, 따라서 자원의 비효율적인 배분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슘페터는 그의 독창적인 사상 가운데 하나인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는 개념 틀을 가지고 답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어떤 경제체제가 어느 한 주어진 시점에서 어떤 실적을 내고 있는가는 별반 적실성이 없다고 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체제가 장기적으로 어떤 실적을 내는가이다.

“어느 주어진 시점에서 그 가능성을 최대로 활용하는 체계(경제적 혹은 기타 여하한 체계)라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어느 시점에서도 그렇지 못한 체계보다도 열등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후자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장기적 성과의 수준 혹은 속도의 조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정태적 효율이 아니라 동태적 효율이 어떤 경제체제의 실적을 평가하는 관건이라는 것이다. 대기업자본주의가 뛰어난 것은 이러한 동태적 효율의 면에서이며 이것은 창조적 파괴의 과정에 힘입고 있다.

“자본주의적 엔진을 움직이도록 만들고 계속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추동력(fundamental impulse)은 자본주의 기업이 창조하는 새로운 소비재, 새로운 생산이나 수송 방법, 새로운 시장, 새로운 형태의 산업조직에서 비롯한다. (중략) 이러한 제발전은 부단히 경제구조를 내부로부터 혁명화하여 부단히 낡은 구조를 파괴하고 부단히 새 구조를 창조한다. 이러한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적 사실이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응용은 장기적 계획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단기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상당한 확신 없이는 실행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이 대기업과 이에 따른 경쟁제한적 관행이다. 이것들은 일시적 어려움에 대한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점가가 이 같은 경쟁제한적 관행의 보호벽 뒤에서 자족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창조적 파괴의 영속적인 강풍(the perennial gale of creative destruction)은 아주 굳건히 자리 잡은 기업가에게조차 계속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 슘페터가 생각하는 ‘구속 받지 않는 자본주의’(unfettered capitalism)의 모습으로 이를 특징짓는 것은 주요한 기술혁신(innovation)을 통해 엄청난 부를 획득하려는 부르주아 기업가의 주도 하에 재화와 용역의 산출의 지속적고도 장기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자기진화적 과정이다. 이 같은 구속 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경제학 교과서에서 보이는 경쟁적 자본주의와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 제약 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대규모 기업연합이 (사실은 이것도 이전의 기술혁신의 결과이지만)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틈입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새로운 기업가가 내놓는 새로운 기술의 공세에 맞서서 자신들의 위치를 고수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세계이다. 슘페터의 견해로 이 체제는 돌아가도 아주 잘 돌아간다.

독점적 관행은 기업의 투자 위험을 줄이는 일시적인 보험에 불과

이 정도만으로도 왜 독점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지 개략적인 설명은 되지만 슘페터는 추가로 책의 한 장(1942: chapter 8)을 할애해서 통상적인 독점이론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 가운데 몇 가지 흥미로운 것들만 추린다.

경쟁제한적 관행의 폐해는 혁신과 창조적 파괴의 항상적 광풍이 존재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배를 안정시키고 일시적 어려움들을 더는 데 크게 기여”한다. 반독점 규제자는 이런 관행이 장기적인 경제의 팽창을 보호하는 거의 불가피한 장치임을 인식 못하고 있다는 게 슘페터의 주장이다. “자동차들이 브레이크가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것" 같은 역설적 현상이 독점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것(제품과 공정)을 개발하고 전환하는 데는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고 그만큼 위험도 수반된다. 이런 모험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성공했을 때 잠시나마 지배적인 시장지위를 이용해 충분한 이윤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경쟁제한적 관행은 바로 이러한 믿음을 가져다 주는 “갑옷”이다.

반면 부정적인 효과는 장기적으로 보면 없거나 거의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이다.

독점가는 자본보존을 위해 비용절감 개선을 하지 않는다? 우선 실제와 다르다. 콘체른이 만들어지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연구부서의 설치이다. 이론적으로도 현재의 순 자산가치를 극대화하려는 경영진이라면 새로운 생산방법이 현재의 생산방법에 비해 (현재 가격으로 할인된 미래의) 단위 지출 대비 단위 수익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를 선택할 것이다.

독점 가격은 경직적이다? 그럴 수도 있으나 “새로운 상품의 침범”이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가격을 경직적으로 유지하기는 어렵다. 실제로도 “장기적인 가격 경직성”의 실례는 거의 없다.

독점 가격은 경쟁 가격보다 높고 독점 생산은 경쟁 생산보다 작다? 이 주장은 생산의 방법과 조직이 경쟁상태와 독점 상태에서 완전히 같을 때만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영향권의 크기와 금융조달 면에서의 우위 때문에 무수한 경쟁자들이 갖지 못하는 독점가는 우월한 생산방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경쟁 하에서 생산보다 적게 생산해서 경쟁가격보다 높은 가격을 책정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따라서 낮은 가격에 더 많이 생산함으로써도 이윤을 키울 수 있는 게 현실이다.

   
▲ 국가 공영의 전력회사는 독점일까 아닐까. 슘페터는 정부가 뒷받침하는 경우이기에 오래도록 지속되는 독점이 맞다고 답한다. 사진은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부지. /사진=뉴시스 

도대체 무엇이 독점? 독점은 무엇일까

독점은 판매자가 하나인 경우이다. 글자 그대로 하면 포장, 판매장소, 서비스 등 모든 면에서 동일하지 않은 무언가를 파는 사람은 모두 독점가이다. 이렇게 보면 사실상 모든 판매자가 독점가이다. 따라서 좀 더 현실적으로 정의하면 “동일한 상품의 잠재적 생산 그리고 유사한 상품의 현재 생산자의 틈입을 허용하지 않는 시장의 단일 판매자”가 독점가이다.

이렇게 정의하더라도 장기적인 독점의 진짜 예는 극히 드물다. 이에 근접하는 예도 완전경쟁의 실례가 드문 것 이상으로 드물다. 독점적인 금융기관처럼 정부가 뒷받침하는 경우가 아니면 생산 총량에 영향을 줄 만큼 오래도록 지속되는 독점은 거의 존재하기 어렵다는 게 슘페터의 주장이다. 우리가 흔히 자연독점(natural monopoly)이 발생하는 예로 간주하는 철도와 전기 회사의 경우에조차 처음에는 자신들의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 내고 자리를 잡은 후에는 경쟁을 뿌리치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해야 했다. 다른 분야에서는 누가 “단일 판매자의 지위를 차지한 – 그리고 수십년간 유지한 – 것은 독점가처럼 행동하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왜 독점이 논란되나?

이렇게 보면 독점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데도 왜 독점을 두고 소란을 야단법석인가라고 질문을 던진 슘페터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독점이라는 말이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느슨하게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것은 이 말이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대기업’ 혹은 ‘재벌’이라는 말처럼) 뭐든지 그렇게 딱지를 붙이는 순간 대중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오명’(term of opprobrium)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연원을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집단적 기억’에서 찾고 있다.

무수한 상품에 대해 독점권을 부여하는 것이 16-17세기 영국 튜도르 왕조와 스튜와트 왕조의 행정적 관행이었는데 이 독점이 오늘날 독점이론에서 그리는 것과 같은 행태를 보여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 형성된 독점에 대한 거부감이 기업에 대해 나쁜 것은 모두 독점 탓으로 돌리는 습관을 낳았다.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에게 독점은 “거의 모든 해악의 아버지”(the father of almost all abuses)였고 독점이라는 말만 나오면 두 왕조 시대의 독점을 연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를 잘 아는 정치인들 또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독점을 선동의 무기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로버트 필(Robert Peel, 1788-1850)경은 당시 영국의 곡물생산이 보호주의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경쟁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독점이라고 매도해 곡물법 폐지(1842)를 성사시켰다.

슘페터와 한국

유럽의 지성사에서 독점이라는 말은 좌에게도 우에게도 실로 오명 자체였다.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도 독점의 폐해를 이야기하는 데 국부론의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는 독점의 각종 폐해를 “독점의 추악한 정신”(the wretched spirit of monopoly)라는 말로 요약했다. 이후 벤덤(Jeremy Bentham)과 리카르도(David Ricardo)의 견해도 스미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바스티아(Frédéric Bastiat)와 맑스(Karl Marx)는 독점을 약탈로 간주했다.

이러한 지적 토양에서 자라났지만 슘페터는 독점에 대해 이들과는 달리 그 긍정적인 효과를 강조했다. 자본주의가 놀라운 성과를 낸 것은 ‘창조적 파괴의 영속적인 광풍’에 노출된 기업가들의 ‘혁신’ 때문이었고 이러한 혁신을 가능하게 한 것은 성공한 기업가들이 일시적으로 누리는 시장지배력이 제공하는 ‘보험’이었다. 그에게 시장지배력 혹은 독점적 지위는, 정부가 이를 뒷받침하거나 부여하지 않는 한, 이론적으로도 실제상으로도 지속되지 않은 일시적인 현상으로서 장기적으로 보면 폐해보다는 기여가 크다.

슘페터는 독점이 경제학 교과서에서 그리는 것처럼 반드시 경쟁가격보다도 높게 가격을 책정하거나 “완전경쟁” 하에서보다 생산량을 낮출 이론적인 근거도 없고 실제로도 그렇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독점가격이 경직적이지 않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기왕의 투자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생산방법을 도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억측도 일축하고 있다. 오히려 새로운 제품과 공정의 개발에 더 열심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점이라는 말은 좌우를 막론하고 타도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고 일반의 인식 속에서도 나쁜 것이 되어 버렸다. 슘페터는 미국에서 독점이라는 말이 대기업이라는 말과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우리나라도 사정은 비슷하다. 성장과정에서 삼성 현대차 LG SK 등 대기업들이 국가의 도움을 받은 탓인지는 몰라도 대기업은 흔히 청산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대기업이 하는 것은 모두 악취 풍기는 독점행위로 간주되기 일쑤이다. 굳이 슘페터의 돋보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조금은 더 차분하게 대기업의 공과를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영조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 자유주의연구회에서 개최한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통찰: 슘페터의 독점론' 토론회에서 이영조 교수가 발표한 주제 발표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