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가 들인 양자, 과연 효자 될까?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북한산(北漢山) 둘레길 총 21개 구간 중 10구간은 ‘내시묘역길’, 11구간은 ‘효자길’ 또는 ‘효자마을길’로 불린다. 내시묘역길은 약 3.5km, 효자길은 3.3km 길이다.

내시묘역길은 과거 국내 최대의 내시묘역(內侍墓域)이 있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고, 효자길은 조선말기의 이름난 효자 박태성을 기리는 효자비(정려비)가 있어 이렇게 명명됐다.

서로 인접해 있을 뿐 별다른 연관은 없는데, 생각해보니 이어지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옛 내시들은 오로지 국왕 한 명만을 그림자처럼 보좌하는 최측근 특수 관리들로서, 반드시 거세(去勢)를 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여인을 가까이할 수도, 자녀를 둘 수도 없었다.

   
▲ 효자 박태성 정려비/사진=미디어펜
그런데 이들 중 후손을 둔 이들이 꽤 많이 있었다. 내시 중 부유한 자들이 가문의 제사를 잇기 위해, 양자(養子)를 들인 것이다.

다만 양자는 실제 ‘피붙이’가 아니라 들인 자식이므로, 언제든 다시 내칠 수 있었다. 그러니, 양자들은 적어도 부친이 사망하고 유산을 상속(相續)하기 전까지는, 내키든 그렇지 않든 효자노릇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과연 그들은 끝까지 효자로 남을 수 있었을까?

필자 제멋대로 이렇게 추리하면서, 인수봉에서 발원해 한강을 향해 흐르는 창릉천(昌陵川)이 에둘러 돌아가는, 두 구간을 이어 걸어본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舊擺撥)역 1번 혹은 2번 출구로 나와, 34번 혹은 704번 버스를 타고 ‘사기막골 입구’에서 내린다. 근처에 사기막골이 있는데, 예로부터 이 곳에서 사기(沙器) 그릇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길 옆 한 민가는 지금도 토속적인 돌담이 있어, 정겨운 모습이다.

쭉 따라 들어가면,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작은 초소가 있고, 그 위에 ‘효자길구간’ 안내 말뚝이 있다. ‘사기막교’ 입구란다. 왼쪽은 둘레길 12구간 ‘충의길’로 이어지고, 가운데는 북한산 정상 백운대(白雲臺) 가는 길이지만, 우리가 갈 곳은 오른쪽 ‘밤골공원 지킴터’ 방향이다.

근처에 능성구씨 통덕랑공(通德郞公) 묘소가 있다는 콘크리트 말뚝도 서있다. 철책 옆 길을 따라 숲길로 들어섰다. 밤골공원 지킴터를 지나, 작은 계곡을 건넌다.

조금 더 가니, ‘북한산 국사당’이 보인다. 우리 전통 무속문화(巫俗文化)를 엿볼 수 있는 굿당으로, 지금도 제사를 지낸다.

이곳 등산로를 오르면, 백운대 바로 밑에 숨어있는 ‘숨은 벽’에 이른다. 정상아래 숨어있다고 해서 산악인들이 숨은 벽이라고 부르는데, 북한산에서 가장 험한 곳 중 하나로 유명하다.

잠시 대로를 끼고 가던 길은 곧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데, 그 입구에 효자비가 있다. 정식 명칭은 박태성 정려비(旌閭碑)다.

조선 고종 때 이 곳 고양시 효자동에 살던 박태성(朴泰星)은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묘를 근처에 모시고 3년 동안 시묘(侍墓)를 했고, 그 후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새벽 일찍 묘를 참배했다.

사나운 호랑이도 그의 효심에 감복, 등에 태우고 모셨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박태성이 사망하자, 그 호랑이도 함께 죽어 곁에 묻혔고, 사람들은 박태성의 제삿날에 호랑이 무덤에도 제사를 지냈다는 것.

그의 효행은 조정에까지 알려져, 고종 30년(1893) 효자비를 세우고 포상했다고 한다.

고양시 향토문화재(鄕土文化財) 제35호인 이 비석은 높이 117cm, 폭 41.5cm, 두께 12cm이며, 비문은 후손 박윤목이 썼다. ‘조선효자 박공 태성 정려지비’라는 글씨가 아직도 대단히 선명한 것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 곳에서 약 300m 위에 박태성의 묘와 그의 부친 묘가 나란히 있다. 박태성 묘 근처엔 천신당(天神堂)이란 굿당도 있다. 이 동네 효자동과 ‘효자마을’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둘레길은 그 안쪽으로 이어진다.

도랑 옆 좁은 둑길을 한 사람씩 겨우 지나는 구간을 지나, 산기슭 고개를 넘어간다. 왼쪽 등산로로 오르면, 북한산성 북문(北門)이다. 깊 옆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석물 하나가 놓여있다.

고개 너머엔 ‘포토포인트’가 있는데, 데크길 중간을 뚫고 나무 한 그루가 ‘Y자’ 모양으로 가지를 양쪽으로 벌리고 있다.

둘레길은 산길과 마을, 도로를 들락날락하면서 이어진다.

계속 따라가니 관성사(關聖祠)다. 관성사는 삼국지에 나오는, 명장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관운장은 사후 무운(武運)과 ‘복록장수’의 수호신으로 추앙 받아, 각지에 무묘(武廟)가 많다.

이곳 관성사는 김은주(金銀珠)씨가 친정어머니에게서 이어받아 제사를 지냈으며, 1955년 ‘호국수호’와 복록장수의 수호신으로 신봉하고자, 사재를 털어 창건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이 곳도 민간신앙의 요처인 셈이다.

관우를 상징하는 관성제군(關聖帝君)과 ‘옥관도사’ 및 ‘제갈공명’을 모신 본전, 산신각과 칠성각이 있다고 한다.

다시 길을 따라간다.

효자동마을금고를 끼고 마을길을 오르니, ‘효자동공설묘지’ 뒤로 원효봉(元曉峰)이 우뚝 솟았다. 원효봉 뒤로 고개를 빼꼼 내민 것이 바로 백운대다.

   
▲ 원효봉 뒤에 백운대가 보인다./사진=미디어펜
곧 내시묘역길 입구가 보인다.

길 옆 작은 꽃밭에 맨드라미와 채송화가 한창이다. 맞은편 집 앞 설악초는 화려함을 뽐낸다.

이윽고 ‘서흥군(西興君).위성군(渭城君) 묘역’이 나타난다.

서흥군은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둘째 왕자인 해안군(海安君)의 차남이고, 위성군은 그 서흥군의 아들이다. 철책 안으로, 두 왕손 및 그 후손들의 무덤 군들이 보인다.

길 앞에 제법 큰 데크 다리가 나타났다. 그 밑으로 흘러내리는 물길이 북한천(北漢川)으로, 북한산 일원에서 꽤 큰 하천이다. 고개를 들어보면 원효봉, 백운대, 노적봉 등 북한산의 연봉들이 잘 조망된다.

다리 건너가 북한산성(北漢山城) 오르는 등산로다.

큰 나무 앞에 탐방지원센터가 보이고, 등산객들이 꽤 많다. 그 건너편엔 ‘북한산국립공원’ 조형물이 반기고, 땀을 식히기 좋은 쉼터도 제법 크다. 하산길과 주차장은 오른쪽이지만, 둘레길은 왼쪽으로 이어진다.

북한산초등학교를 돌아가는, 한적한 산길이다.

좀 더 가니, 경천군(慶川君) 송금물침비(松禁勿侵碑)가 손을 흔든다. 여전히 선명한 음각 글씨로, 쉽게 비문의 뜻을 알 수 있다. ‘경천군에게 내린 땅이니, 그 안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한다’는 뜻이다.

경천군은 한석봉과 함께 당대의 명필로 ‘사자관’을 담당했으며, 인진왜란 직후 통신사(通信士)의 일원으로 일본과의 화평교섭에서 활약한 이해룡에게 봉해진 군호다. 그에게 왕이 하사한 사패지(賜牌地)인 이 곳은, 지금도 ‘경주이씨 경천군파’의 사유지로, 멋대로 들어갈 수 없다.

비석을 지나, 울창한 숲길이 이어진다.

다시 내시묘역길 아치형 문틀 밑을 지나는데, 아직 내시묘역길은 좀 더 이어진다.

곧 백화사(白華寺) 앞을 지난다.

그 뒤쪽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내시묘역이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내시 후손들이 팔아치워, 묘역이 다 사라졌다고도 하는데,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으니 ‘확인불가’다. 사실이라면, 불효자(不孝子) 후손들이다.

아무튼, 내시묘역길에서 정작 내시묘역을 볼 수 없다는 게, ‘팩트’다.

여기는 북한산 의상봉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이기도 하다. 북한산에서 가장 험한 ‘마루금’인 의상능선(義湘稜線)이 의상봉에서 이어진다.

둘레길을 얼마 더 가면, 느티나무 보호수(保護樹)가 서있다. 200년이 넘은 이 나무는 높이 19m, 둘레 470m다.

어느새 서울 은평구 진관동이다. 이제 ‘여기소마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소(汝其沼)에는 애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하던 당시, 동원된 관리를 만나러 먼 길을 온 기생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 연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못의 흔적은 간 데 없고, 동네 정자 옆에 작은 표석이 ‘여기소터’임을 알릴뿐이다.

이제 내시묘역길도 다 끝나간다.

‘방패교육대’ 앞 입곡삼거리에서, 올 때와 마찬가지로 34번이나 704번 버스를 타면, 구파발역으로 돌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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