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죄 한성감옥 수감 옥중 집필…독립선언서보다 15년 앞서

   
▲ 박종운 미디어펜 논설위원
올해는 1948년 독립 건국으로 우리 민족이 드디어 해방을 맞은 지 67주년이 되는 해이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으나, 우리에게 독립건국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소군정에게 권력을 이양하기까지 일제총독부는 1948년 8월 15일 이후에도 더 존속했었고, 그 후 3년간 더 미소군정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신탁통치를 위한 국공합작 임시정부를 구성하려는 미소간의 협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때 내적으로는 우리 민족이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벌였고, 외적으로는 소련이 독일과 동유럽 등지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점령지사회주의화를 추진하자 미국이 이에 반발하게 됨으로써, 상황이 달라졌다. 드디어 유엔 관리 하의 총선거가 실시되는 쪽으로 사태가 전개되었고, 1948년 독립 건국을 함으로써 비로소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올해를 광복 해방 70주년으로 기념하는 분위기다. 일본의 패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독자적인 독립건국이 중요한 것인데... 차라리 일본패망기념일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에 근접한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의 주체적 독립운동 역량이 국민들의 투표로 인정을 받은 것이 1948년 5.10선거이기 때문에, 독립운동 진영의 입장에서는 뭐니뭐니해도 1948년이 중요하다.

역사를 독립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1945년 일제의 항복선언은 독립운동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지만, 1945년 8.15 항복선언 이후에도 일제 총독부 권력이 1945년 9월 미군의 진주 이전까지는 권력으로서 건재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보면, 벌써 96주년을 맞이한 1919년의 3.1독립만세운동도, 그리고 그 전후의 과정도 새롭게 읽을 수 있다.

1896년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적 민주주의를 만들고 무너져가는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를 되살리려고 했지만, 해산을 당하고 난 뒤에는 1919년 3월 고종 장례식을 활용한 독립만세운동 이후 급기야는 아예 ‘민’국을 세우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였기 때문이었다. 보통 국권이 강탈당한 나라에서의 독립운동은 국권의 회복이 독립운동의 주요한 목표가 되는 것인 만큼, 왕정복고가 정상이건만, 1919년에 이르러서는 독립운동가들은 자유민주주의의 독립 혁명인 대한민국을 꿈꾸었다.

우리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썼던 최남선의 명문(名文)을 외우면서 자랐다. “우리는 오늘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간 우리의 배움에는 약간 치우침이 있었다.

   
▲ 1899년 대역죄(大逆罪)로 한성감옥에 수감된 이승만은 1904년 '독립정신'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집필했다. 고종황제의 탄압 때문에 감옥에 갇혀 마치 입헌군주제를 인정하는 듯이 보이는 부분만 빼고 보면, 도저히 110년 전에 쓴 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쓴 책이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신 면에서나 실질 외교전략 면에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어 거듭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사진=연합뉴스

그것은 3.1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임시정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그것들이 마침내 하나로 모아져서 9월 경에는 하나의 통일된 임시정부로 탄생되었는데, 그것들이 모두 이승만 및 그의 책 '독립정신'과 무척 관계가 깊다는 점에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 왔던 것이다. 최남선이 비록 나중에 친일파로 전락했어도 그의 독립선언문은 불후의 선언문으로 읽혀지듯이, 이승만이 나중에 집권연장과 독재로 과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책 '독립정신'은 독립운동의 정신 그 자체였기 때문에, 이것을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3.1독립만세운동의 와중에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고무되어 임시정부를 3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노령임시정부, 한성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였다. 이 세 정부가 모두 자유민주주의 독립혁명을 꿈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었다는 점이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임시정부들이 추대한 주요 인물들의 면면이다.

3.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노령임시정부는 대한국민의회를 열어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뽑았다. 4월 2일 13도 대표가 한성에서 모여 준비했고 4월 23일 민중과 함께 국민대회를 치른 것으로 알려진 한성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를 뽑았다. 4월 10일에는 상해에서 임시의정원을 개최하여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를 선출하였고,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는 이승만을 선출했다.

그리고 이 세 정부의 난립을 해소하기 위한 협상을 한 결과, 상해와 노령에서 설립한 정부들을 일체 해소하고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한성정부를 계승하기로 하였지만, 정부의 위치는 아직 상해에 두기로 하였는데, 그렇게 해서 9월에 통합된 임시정부에서도 임시대통령에 이승만이 추대되었고, 국무총리에는 이동휘가 임명되었다. 이승만을 빼놓고는 독립운동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임시정부들에서 이승만을 핵심 인사로 내세웠던 것은 자유민주주의 독립운동이 바로 이승만이 주역의 하나로 활동했던 1896년 독립협회에서 뻗어나갔던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가장 체계적으로 기술했던 사람이 이승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승만은 독립협회 시기의 만민공동회라는 대중집회에서 대중연설을 하고 신문에 각종 논설을 싣고 그랬는데, 언제 그처럼 독립운동의 정신을 체계적으로 기술했었는가? 그것은 그가 독립협회 활동을 근거로 해서 황제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아 1899년 대역죄(大逆罪)로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였다.

이승만은 1904년 이때 '독립정신'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썼고, 감옥에서 나온 뒤인 1910년에 미국 하와이에서 출판하였다. 대역죄로 한성감옥에 쇠사슬과 칼을 쓰고 갇혀있던 처지였기에, 책 본문에서는 고종황제를 의식해서 입헌군주제식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는 있으나, 미국의 민주독립혁명에 대해서 4개의 장에 걸쳐 기술하고, 미국민주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던 프랑스민주혁명에 대해서도 1개의 장을 썼던 점을 볼 때, 실제로는 그에게 씌워졌던 ‘혐의와 같이’ 군주제를 폐지한 공화제적 민주주의를 꿈꾸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대한제국의 국권이 강탈당한 이후 국내에서 기독교 관련 활동을 핑계로 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고취했기에, 그의 책 '독립정신'도 국내에 잘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독립운동 관련 활동의 의심을 받았기에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이승만이 각종 임시정부의 중핵으로 추대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3.1운동 이후에 만들어진 임시정부에서 세계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읽은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국내와 가까운 중국을 무대로 중국과의 협력 하에 일제와 싸우는 것을 주로 고려했을 때, 그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야말로 미국이라는 점을 직시하고 미국을 움직여서 일제와 대항하는 노선을 주장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도 미국의 참전이 있었기에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마침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국제연합을 창립했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1913-1921)은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땄을 때의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이기도 했었다.

그 이후 이승만이 '일본의 내막을 파헤친다(Japan Inside Out)'는 책을 내었을 때,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리라는 이승만의 예언(?)적 분석에 코웃음쳤던 미국민들은 실제로 1941년 진주만 폭격이 있자 그의 혜안을 인정했다. 결국 이승만의 판단대로 2차세계대전은 미국의 참전으로 승패가 결정되었고, 특히 태평양전쟁은 미드웨이해전과 일본 본토 공습,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자폭탄 투하를 계기로 승부가 났다. 미국을 움직여야 한다는 이승만의 판단이 옳았음을 역사가 입증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미국을 활용한 것이지 미국을 무조건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일제패망 후 미군정을 움직이는 워싱턴의 국공합작 노선에 반기를 들었다. 이승만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하기로 결정하자 즉시 신탁통치반대운동(반탁운동)에 나섰다. 김구 등 임정세력도 반탁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반탁운동은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었던 민중들의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시켰다. 민중들은 또 다시 식민통치가 연장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었고,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제2의 독립운동’(사실은 독립협회 활동까지 포함하면 3단계 째의 독립운동)이 대한민국 건국의 중심 동력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47년 임시정부가 주최한 국민대회에서는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김구를 뽑았다. (이후, 반탁운동에 열성이던 김구가 갑자기 유엔 총회의 의결에 따른 자유민주적 총선거에 반대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하는 것으로 돌아선 것은 역사의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보면 독립선언서와 더불어 3.1절에 읽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문헌 중의 하나는 3개의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는 독립운동사 내내 일관되게 지도자였던 이승만이 쓴 '독립정신'이다. 이 책은 마침 동서문화사에서 김충남 김효선 씨가 읽기 쉽게 풀어쓴 책으로 발간되어 있다. 쉽게 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독재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민주회복운동에 직접 헌신했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의 공과를 고루 인정한다는 각도에서 보면, 그의 '독립정신'을 편견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최남선의 독립선언서도 읽는데, 하물며 더 큰 영향을 끼친 이 책을 읽지 못하랴.

이 책을 읽으면 110년 전에 썼음에도 마치 어제 쓴 책처럼 생생한 느낌을 받는다. 감옥에서 썼음에도 불구하고 원망의 마음보다는 큰 이상이 돋보인다. 또한 좌파들이 프랑스 민주혁명을 더 크게 치지만, 이승만은 프랑스민주혁명의 원조가 바로 미국의 민주독립혁명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제도는 바로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라는 것을 제대로 밝히고 있다.

고종황제의 탄압 때문에 감옥에 갇혀 마치 입헌군주제를 인정하는 듯이 보이는 부분만 빼고 보면, 도저히 110년 전에 쓴 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쓴 책이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신 면에서나 실질 외교전략 면에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어 거듭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이 책을 순 한글로 썼다는 점이다. 비록 현실에서는 무지몽매하고 천박한 점이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독립혁명의 주된 동력이 바로 그러한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결코 무지몽매하고 천박한 민중을 경멸하거나 고고하게 지적질만 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들 곁으로 다가가 그들을 설득하는 일을 하려고 했다. 이 점은 요즈음 민주주의를 천시하고, 선동가독재를 보지 못한 채 표면적 현상만 보고 대중독재를 운운하며 은연중에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일부 왜곡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 3.1절에는 우리의 오늘을 만든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정신'을 꼭 읽어보도록 하자!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을 읽어보자. /박종운 시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