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대한민국 경제 번영의 초석을 닦은 12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연설>에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국제통상과 공업발전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룩한다는 시장경제 원칙이 명시되어있었다. 이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밑그림을 그린 한미동맹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틀은 대한민국을 글로벌 시대 주류세력으로 편입시켰다. 기업가들과 함께 나라를 근대화·산업화·문명화 방향으로 이끈 것이다. 이에 자유경제원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대한민국 시장경제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우남 이승만 시장경제의 틀: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는 4일 자유경제원 회의실에서 열렸다. 아래 글은 김용삼 전 월간조선 편집장(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객원연구원)의 발제문이다.

 

   
▲ 김용삼 전 월간조선 편집장/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객원연구원

이승만 시대의 의미: 대한민국 번영의 초석을 닦은 12년

1948년 8월 15일에 건국한 대한민국은 국토면적으로 보면 9만 9,720㎢로 세계 109위다. 국토면적 세계 109위의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유럽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라시아 대륙이 공산화의 물결에 휩쓸렸을 때 유일하게 우리만 공산화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지켜냈다. 그 어떤 논리를 동원한다 해도 이승만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건국 지도자들이 공산화를 막아낸 공로는 세계사적으로도 큰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건국한 사람들과, 건국에 반대한 사람들의 모습은 극명한 대비를 보이고 있다. 건국에 반대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애국자, 선각자, 민족 지도자로 추앙받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젊은 시절 이승만은 절대군주 왕정시대에 왕정을 타도하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공화제를 주장했고, 민주헌법의 도입을 역설한 혁명가였다. 그가 29세 때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을 보면 과학기술과 제조업, 외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개방과 통상을 통한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의 가치를 발견하고 한국을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이승만이 발견한 미국은 열강들이 배타적 권리를 가지고 있는 식민지를 해방시켜 모든 나라들이 자유롭게 문호를 개방하고 통상을 하여 세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전략을 가진 나라였다. 미국이 과거에 독립을 승인한 국가들의 사례를 조사하여 미국의 외교 원리를 밝혀낸 것이 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 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의 주제다.

   
▲ 1899년 대역죄(大逆罪)로 한성감옥에 수감된 이승만은 1904년 '독립정신'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집필했다. 110년 전에 쓰여진 책이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외교전략과 국가정신이라는 면에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국주의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식민통치 기법은 이른바 분할통치(devide and rule)다. 서양 열강들의 식민지 통치기법을 연구한 일본은 조선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분할통치를 적극 활용했다. 그 결과 조선 사회는 양반과 평민, 지주계급과 소작인, 식민통치 협조자와 반항자, 온건론과 투쟁론, 국내 잔류파와 해외 망명파의 분열 등등 갈가리 찢어졌다.

이러한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해방과 분단, 좌우익 대립, 6‧25 남침 전쟁 등을 치르면서 우리 사회는 오늘날까지 일제 36년의 망령이 지배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식민 유산을 극복하려면 식민 종주국이었던 일본을 경제적으로 추월하여 그들 보다 더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근대 민주국가 탄생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을 비롯한 우리 민족의 선각자들이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왕조국가와는 근본이 다른 정치체제, 즉 선거에 의해 국민이 주인인 공화정부, 그것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근본으로 하는 근대 민주국가를 탄생시켰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나 공산주의자들은 건국이란 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분단정권의 수립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공격을 해댄다.

만약 1948년에 건국이 안 되었다면 좌익세력이 신속하게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여 국제공산주의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북한은 대한민국과는 정반대로 공산주의를 택한 결과 오늘날 김 씨 세급왕조 체제와 폐쇄 쇄국으로 무장하여 조선왕조나 다름 없는 사이비 신정(神政)국가가 되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로 한 세대 이상이 영양실조로 인한 발육부진과 저열화 현상으로 인류 퇴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48년 건국 당시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은 참혹했다. 1인당 국민소득 35달러, 문맹률 78%,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인재가 2만 6000여 명에 불과한 지구상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한반도의 허리가 38선으로 가로막히면서 북에서 공급되던 전력, 지하자원, 비료 등이 끊겨 38선 이남 지역은 산업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 초대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제헌헌법에서 서구식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명문화하고, 재산권보호 등 시장경제발전의 토대를 쌓았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아 공업화에 투자함으로써 한강의 기적을 창조하는 데 밑거름역할을 했다. 

인구는 남한이 2200만, 북한이 900만 명이었지만 발전설비(발전량)은 남한이 11.5%(4%0, 북한이 88.5%(96%)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기가 부족하여 남한의 전력 소비량 10만kW 중 7만 1000kW를 북한의 송전에 의지했는데, 제헌의원 선거가 끝난 직후인 1948년 5월 14일 북한이 송전을 끊어버려 남한은 암흑천지로 변했다.

남한은 농업 위주의 산업구조에도 불구하고 화학비료 생산이 전무하여 북쪽의 흥남질소비료공장 제품을 공급받아 사용해 왔다. 이것도 해방 직후 공급이 끊겨 남한은 1962년 충주비료공장이 가동되기 전까지 매년 미국이 제공하는 원조자금 2억 5000만 달러 중 1억 달러를 비료 도입에 써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북한 지역에는 일제가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해 놓은 수풍발전소, 장진강발전소, 흥남질소비료공장 등 산업시설들이 있어서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았지만, 남한은 쌀농사를 비롯한 약간의 경공업(방직공업)이 거의 전부였다. 이러한 남농북공(南農北工)의 산업구조로 인해 북한이 남한보다 국민소득이 3배나 높은 상황이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조선총독부는 8.15 직후 일본인들의 철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막대한 통화를 풀었다. 현금이 모자라자 일본에서 비행기로 화폐를 공수하여 일본군의 퇴각 비용, 총독부 관리들의 퇴직수당으로 지급했고, 미군정은 남한 주둔 미군 경비와 군정청 운영경비를 중앙은행의 통화증발로 해결했다.

그 결과 남한에선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남한의 도매물가지수는 1945년 8월을 100으로 할 때 1950년 12월에는 4980으로 물가가 50배나 폭등했다. 쌀값을 예로 들면 1946년 대두 한 말에 656원이었으나 1953년 1월에는 무려 9만 1200원이었다.

6‧25 없었다면 이승만 시대에 ‘한강의 기적’ 가능했다

한국이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발전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12월 미국과 한미원조협정(ECA)을 체결하면서부터다. 한국판 마샬 플랜이라 불리는 ECA협정을 통해 미국에서 식량, 비료, 석유, 원료, 공업시설, 발전함 2척, 기술원조 등이 제공됐는데, 미국은 이러한 원조를 조건으로 한국 정부에 국가발전계획의 수립을 요구했다. 그 결과 각 부처별로 산업부흥 5개년계획, 5개년 물동계획, 농림증산 3개년 계획, 석탄생산 5개년계획, 전력증강계획 등을 수립했다. 그리고 경제안정 15원칙으로 광란의 물가를 잡아 사회가 안정을 찾아갈 무렵 6‧25 남침을 당해 사회의 모든 기반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만약 1950년에 북한의 6‧25 남침만 없었다면 우리는 1950년부터 건실한 경제발전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고, 산업화도 적어도 10~15년은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6‧25 남침은 우리 민족의 가난과 저개발 상태를 15년이나 더 연장시키고 민족 전체를 파괴와 살육의 현장으로 내몬 역사적으로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였다.

청년시절부터 과학기술의 중요성, 제조업의 중요성을 설파한 바 있는 이승만은 미국인들도 부러워하는 미국의 최고학부에서 공부하면서 한 나라가 산업화를 하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한지를 절실히 깨닫고 이를 체화시킨 사람이다. 그는 1945년 10월 귀국 직후부터 국내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만나 국가통치를 위한 학습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우리 상황에서 가장 쉽고 빠르게 개발할 수 있는 분야가 광업임을 깨닫고 “국가발전은 광업에서부터”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대한중석을 설립하여 중석의 해외 수출로 외화를 획득했고, 광업인들의 건의를 수용하여 건국된 지 불과 8개월 후인 1949년 4월, 미국 원조당국의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영암선(영주-철암 구간)과 함백선(제천-영월발전소 구간) 철도 건설에 돌입했다. 6‧25로 인해 3년여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휴전 후 공사를 재개하여 영암선은 1955년 12월, 함백선은 1956년 1월 개통되었다. 이것이 박정희 시절 태백산 종합개발사업으로 이어졌는데, 박정희 시절의 태백산 종합개발사업은 이승만 시절 영암선과 함백선 철도를 기반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건물 짓기에 수고한 목수들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국내에서 고급 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자신이 설립한 하와이 한인회관을 매각한 대금을 가져다가 인하공대를 설립했다. 이승만은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공부하던 시절 근처에 있는 MIT를 자주 방문했는데, 이때 한 나라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술 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인하공대는 한국판 MIT인 셈인데, 인하공대라는 학교 명칭은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이다.

이승만은 건국 직후 농업문제의 근본적인 개혁에 나섰다. 1947년 남한의 농가호수 200만호 중 자작농은 자작농 36만호(16%)에 불과했고 소작농이 90만호(42%), 나머지 42%는 자소작농 혹은 소자작농이었다. 소작료는 매년 수확물의 50~70%로 대단히 가혹하여 소작료를 내고 나면 소작인들은 1년 내내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북한은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에 “북한에 공산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에 의해 공산혁명에 착수하여 1946년 3월 5일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이때 토지나 집, 사업체를 빼앗긴 지주나 자본가,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람들, 기독교인, 공산화에 걸림돌이 되는 지식인 등 북한의 핵심계층 10%가 월남했다. 이것은 북한의 공산화를 위한 일종의 인종청소였는데, 그 결과 북한은 고급 인재 부족으로 인해 발전이 크게 정체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불행하게도 북한의 토지개혁은 전 인민의 소작화로 귀결되었다. 몰수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준다고 선전하고는 소유권을 준 것이 아니라 토지 이용권만 주었다. 그리고는 각종 곡물 수확량의 25%를 농업 현물세로 거둬갔는데, 이것은 이름만 바꾼 소작료였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지주를 몰아내고 국가(공산당)가 지주로 나선 셈이다. 북한은 1958년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집단농장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크게 저하되어 해마다 식량 부족으로 수백만 주민이 굶겨죽는 나라로 전락했다.

반면에 이승만 대통령은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임명하고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 실시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 결과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이 단행되어 6‧25가 벌어지기 불과 두 달 전에 농민들에게 농지가 분배되었다. 농지 분배 조건도 농민들에게 대단히 유리했다. 농지대금은 1년 수확량의 150%라는 헐값으로 책정되었는데, 이것도 일시불이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분할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수 천 년 이어온 지주-소작, 부자와 빈자간의 계급 갈등을 타파하는데 성공했고, 농민들이 내 땅을 소유함으로써 필리핀이나 베트남처럼 농민들이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현상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 농지개혁의 성공으로 대한민국은 출범 초기부터 전 국민이 계급 없고, 빈부격차가 사라진 ‘차별 없는 시대’가 전개되었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농군의 아들이라도 판사 검사가 되고, 대기업 고위 경영진에 올라 당대에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이것이 훗날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캔 두 스피릿(Can do Spirit)의 탄생하게 된 계기다.

세계의 발전전략 전문가들은 한국의 성공 요인으로 교육혁명을 꼽는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까지만 해도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 사람은 양반밖에 없었고, 일반 백성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 이름자도 제대로 못 쓰는 문맹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부는 의무교육 6개년계획, 문맹퇴치 5개년 계획 등을 수립하여 거국적으로 문맹 퇴치운동을 벌였다. 이를 위해 막대한 국가 예산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4‧19가 발생한 1960년에는 문맹률이 10% 이하로 떨어졌고, 교육혁명이 일어나면서 전 국민이 읽고 쓸 줄 알게 되어 지력(知力)이 크게 높아졌다.

이승만은 6‧25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도 부산 영도에 전시(戰時)연합대학을 설립하여 대학생들은 군 입대를 면제시켜 우수 인재를 보존했다. 그리고 고등교육기관 확충을 위해 사회지도층들에게 사립대학 설립을 적극 권장했다. 그 결과 1959년에는 대학 진학률이 영국을 앞지르게 되었다.

자신이 미국 유학을 통해 큰 혜택을 본 이승만은 짧은 시간 내에 우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여 선진국으로 국비 유학을 보냈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국비로 해외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2만여 명, 국군 장교단 1만여 명이 해외에 나가 선진 교육을 받고 왔다. 이때부터 한국 사회에 대학 중심의 엘리트층과 군부라는 두 개의 파워 집단이 형성된다. 이 시기에 형성된 두 파워 집단은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격돌하며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산업화의 선봉 역할을 하게 된다.

이승만 시대의 교육혁명은 수천 년 운명처럼 이어져 온 무지와의 전쟁이었다. 문맹퇴치는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위해서도 절실했다. 조선시대까지는(일제시대도 비슷한 양상이었지만) 양반 지주 특권층들만 교육을 받았지만,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도 사서삼경이나 유교경전과 같은 공리공론이 아니라 실용주의적 과학기술교육을 통해 양질의 노동력을 배출했다. 이러한 교육혁명은 박정희 시대에 한강의 기적을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승만은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에 이르기까지 사력을 다해 공산 침략에 맞서 싸우며 나라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휴전 이후에는 전후복구를 위해 모든 여력을 집결해야 했다. 전후 복구가 끝나 경제의 생산력이 6‧25 이전 상태를 회복한 것이 1959년이다.

따라서 이승만 집권기는 공산침략으로부터 안보를 지켜내고, 전후복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시기였다. 만약 1950년에 남침 전쟁만 없었다면 이 시기에 우리는 건실한 경제발전을 추진하여 이승만 시대에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을 것이다.

근대 기업의 출범: 귀속재산 불하, 전시(戰時)무역

해방 당시 남한에 근대적 의미의 기업은 김연수의 경성방직, 박흥식의 화신백화점 정도가 거의 전부였다. 이처럼 기업이 존재하지 못한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유능한 기업인이나 경영자, 기술자가 탄생하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봉쇄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에서 법률가나 문과 계통의 인재를 배출하는 교육 시스템은 존재했으나 이공계나 고급 엔지니어, 경영자를 배출하는 교육기관은 아예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공장들의 기술자는 100% 일본인이 차지하고 한국인들은 잡일이나 하는 그런 구조였다. 게다가 조선조 이래 지속되어 온 사농공상의 신분구조로 인해 상업과 공업 분야를 천시하는 전통 때문에 기업에 뛰어드는 사람이 드물었다.

기업가란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는 사람들이다. 북한 지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월남민,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귀환자들이 몰려오면서 해방 후에 극심한 혼란과 인플레가 만연했지만, 이러한 혼란이 기업인들에겐 큰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혼란이 가져다준 기회를 틈타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김성곤 등 한국의 간판 기업가들이 속속 등장한다.

기업가들이 근대적인 기업의 바탕을 일구게 된 첫 번째 기회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기업이나 공장, 주택, 토지, 가게 등 귀속재산의 불하였다. 귀속재산의 불하를 통해 두산, 한화, SK 같은 기업이 출범하게 되었다. 귀속재산은 시가의 30~60% 가격으로 불하를 했는데, 불하를 받으면 총금액의 10%를 내고 나머지는 이자 없이 15년에 걸쳐 분할 납부하는 방식이었다. 당시는 급속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귀속재산을 불하받으면 거저줍는 것이나 다름없어 귀속재산은 벼락부자, 신흥재벌이 탄생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2600여 개의 귀속재산 기업 중 성공사례로 끕히는 것은 불과 40~50개에 불과했다. 대다수 귀속재산 기업체들은 원료난, 전력난, 자금난, 기술난에 시달리다가 도산했고, 유능하고 기업가 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이 인수한 기업들만 살아남은 것이다. 결국 귀속재산 기업의 성공 여부는 기업가 정신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귀속재산 불하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지주계급이 소멸하고 공업과 상업의 중요성에 눈을 뜬 기업가들이 등장하면서 산업화의 토양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어 정크무역, 마카오무역, 홍콩무역, 그리고 6‧25 때 부산을 중심으로 한 전시무역을 통해 기업가들은 상업 자본을 축적했고, 축적된 상업 자본을 산업자본화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 주자는 삼성그룹을 일군 이병철 회장이었다. 그는 전시무역으로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제일제당(현 CJ)과 제일모직을 건설하여 성공시킴으로써 다른 기업가들도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 경쟁을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

이병철은 이 과정에서 한국은 농업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공장을 지어 공업화를 해야 하며, 당장 공장을 지을 자본과 기술이 없으니 해외에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공업화를 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철학을 요로에 전파하여 우리나라가 공업화로 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3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200만 명(남한 전체 국민의 10%에 해당)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피해를 입었고 사회간접자본과 공업시설의 60%가 파괴되었다. 게다가 주택 36%가 파괴돼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았고, 학교의 32%가 부서져 임시 가건물이나 야외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한국은행은 전쟁으로 인한 남한의 총 피해액을 30억 달러로 집계했는데, 이것은 전 국민의 2년 치 국민총생산이 잿더미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허약체질의 나라가 강력한 행정력을 갖춘 국가로 탈바꿈했고, 원조물자 유입으로 공권력과 정부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인민군 치하에서 가짜 선거, 현물세 징수, 점령지역 주민들의 강제 동원, 인민재판과 무자비한 학살, 납치 등을 체험하면서 국민형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대한민국 체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생겨났다.

또 군이 70만 대군으로 팽창하면서 남성의 대부분이 군 생활을 통해 협동정신을 익히고, 신무기 사용, 근대적 기계 조작술, 행정능력 등을 습득하여 산업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서명하고 있는 변영태 외무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 

이승만은 38선 부근에서 어정쩡한 휴전을 통해 발을 빼고 나가려는 미국을 붙들어두기 위해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승만의 전쟁 수행 원칙은 북한지역을 수복하여 통일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휴전을 결사반대한 이유는 휴전은 분단 고착화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휴전을 막기 위해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약처방까지 동원했다.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은 포로 송환문제에 대한 이견 때문에 휴전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던 터에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하루아침에 석방한 것은 휴전협상이 깨질 수도 있는 중대한 이슈였다.

미국은 반공포로 석방으로 미국을 압박하며 휴전협정에 거세게 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해 에버레디 계획이라는 쿠데타 계획을 수립했으나 결국은 이승만이 요구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는 조건으로 휴전을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세계사적 의미: 동북아 번영의 기초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전후복구를 위한 막대한 경제 원조를 얻어냈고, 70만 대군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한미동맹을 통해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고, 우리의 모든 여력을 경제성장에 투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승만은 이처럼 중대한 의미가 담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애걸하다시피 하여 얻어낸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받아냈다. 값으로 따지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대가를 얻어내면서도 우리가 미국에 제공한 것은 “휴전협정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각서 한 장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 이전의 동북아시아는 그야말로 지뢰밭, 혹은 화약고나 다름 없었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등 10~20년 주기로 대전쟁이 일어나 세계사를 뒤흔들었으나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후 주한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면서 동북아에서는 오늘날까지 60년 이상 전쟁이 억지되고 평화가 정착되었다.

그 결과 패전국 일본이 경제부흥에 성공하여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 되었고,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중국의 개혁 개방으로 오늘날 동북아는 세계의 경제성장을 이끄는 가장 역동적인 지역으로 탈바꿈했다. 이것이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담긴 세계사적인 의미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한 140여 개국 가운데 산업화, 민주화에 성공하여 명실상부한 선진국 진입에 성공한 것은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2012년 6월, 우리가 20-50클럽에 가입하고, 세계 5대 무역 강국으로 떠오른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국가적 혁신(innovation)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가혁신의 최초의 시도는 1953년 유엔의 발전전략 전문가들이 제안한 농업을 통한 발전전략을 폐기하고 공업화로 나선 것이다.

   
▲ 67년 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 당시 기념식 전경. 

유엔한국위원단이 한국의 전후 부흥을 위해 미국 네이산 협회에 의뢰하여 만든 한국의 발전전략은 농업 우선정책이었다. 즉 농업분야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여 농업을 먼저 일으키고, 여기서 얻어지는 잉여가치를 가지고 소규모 공업부터 차근차근 건설하여 국가발전을 추진하라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국가 지도부는 농업으로는 국가발전이 불가능하다면서 이 안을 거절하고 높은 교육수준과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하는 공업화 발전전략을 추진했다.

이승만은 1953년 4월 내각에 철강공장 건설과 관련한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 결과 미국 원조당국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자체보유불 520만 달러를 투입하여 인천에 대한중공업공사를 설립하고 이곳에 소규모 제철소를 건설했다. 이때 도쿄에서 활동하던 유태인 무역상 아이젠버그의 소개로 서독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박정희 정부 때 이 사람을 통해 서독 정부가 한국에 차관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철강공장 건설은 서독 데마그 사가 지었는데, 관련 기술을 배우기 위해 철강 엔지니어들을 국비로 유학 보냈다. 이들이 귀국하여 박정희 시절 포항제철 건설의 주역을 맡게 된다.

이승만 정부는 이어 시멘트, 정유, 유리공장, 비료공장 등을 건설하여 공업화 발전전략을 추진하려 했으나, 미국 원조당국은 “한국은 자본도 기술도 없으니 그런 제품들은 해외에서 사다 쓰는 것이 현실적”이라면서 공장 건설에 제동을 걸었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운크라(유엔한국재건단)로 눈을 돌린다.

당시 운크라 단장 존 B 콜터 장군은 이승만을 흠모하여 이승만의 요청을 받자 운크라 자금을 이용하여 문경에 시멘트공장(문경시멘트), 인천에 판유리공장(한국유리)을 건설했다.

이렇게 되자 미국 측도 한국의 공장 건설에 반대할 명분이 없어져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충주비료공장 건설에 돌입했다. 우리 정부는 산업화의 공신 역할을 한 존 B 콜터 장군을 기리기 위해 어린이대공원에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성공한 이유는 미국이나 세계의 석학이나 발전 전문가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구 선진 국가들은 수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발전전략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단기간에 산업화를 해야 했기 때문에 약간의 무리가 따르더라도 우리의 현실에 맞춰 압축적인 산업화를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우리는 서구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이 주장하고, 국제기구가 권유한 경제발전 공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우리 현실에 맞는 제도를 직접 만들어 썼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만약 네이산협회가 제안한 대로 당시 이승만 정부가 농업 위주의 발전전략을 채택했다면 자원이나 자본, 기술이 턱없이 부족했던 한국은 지금도 발전도상국 중에서도 후미에 위치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원조자금 둘러싼 한미 간의 마찰: 미국은 소비재 도입, 이승만은 공업화

이승만 정부는 3연간의 전쟁으로 거의 모든 국가적 인프라들이 파괴되어 세금을 제대로 걷을 수가 없었다. 국가 재정이 극도로 취약하여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1945년부터 1961까지 우리나라에 총 31억 9900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는데, 미국 원조물자를 기반으로 대충자금 계정을 설치하여 원조물자가 들어오면 이것을 시중에 매각하여 대충자금 계정에 넣었다. 이 자금의 일부는 한국 주둔 미군과 유엔군의 경비로 사용했고, 나머지는 한국 정부 예산으로 사용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원조자금이 정부 세입의 55~6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데 대충자금을 어느 분야에 사용할 것인지의 여부는 미국이 주도권을 쥔 한미합동경제위원회가 주관하게 되어 있어 우리의 경제주권은 제대로 행사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후복구 과정에서 경제재건의 방향이나 투자 우선순위, 투자사업의 선정, 원조물자 구성 문제로 미국 원조당국과 크게 대립했다. 미국은 원조자금으로 비료와 시멘트, 석유 같은 소비재의 도입을 요구했다. 반면에 이승만은 한 번 써버리면 그만인 소비재 도입보다는 공장을 지어 한국에서 소비재를 생산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승만의 공업화에 대한 미국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전체 원조자금의 집행내역을 보면 소비재가 81%로 압도적인 비중이었던 반면, 시설 재는 19%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일본을 부흥시켜 반공의 교두보로 삼고, 한국은 일본의 전초기지 화한다는 일본 우선정책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경제부흥이 급선무였다. 미국은 한국에 제공하는 원조자금을 이용하여 일본의 경제부흥까지를 이끌어내는 전략을 수립했다.

미국은 한국에 제공하게 될 원조물자는 농산물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물품을 일본에 발주했다. 그 결과 일본의 경제가 빠른 시간 내에 급성장하게 되었다.

   
▲ 미주이승만기념사업회가 김문수 전 지사 일행을 환영하고 있다. /사진=김문수 페이스북 캡처 

일본이 경제부흥을 하려면 한국이 계속해서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존재해야 한다. 이승만의 주장처럼 한국에 공장이 건설되어 공업화를 하면 미국이 구상한 일본 우선정책이 흔들릴 위험이 있다. 때문에 미국은 한국의 공업화를 극력 반대한 것이다. 로버트 올리버는 이러한 미국의 정책을 “한국에 제공하는 1 달러로 2 달러의 효과를 내기 위한 정책”이라고 표현했다.

어쨌든 미국의 원조가 우리 사회에 많은 발전의 요인을 제공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이었던 원조는 기술원조였다. 기술원조는 경제 사회발전에 필요한 인재양성, 기술습득, 행정능력 효율성 강화를 위해 사용된 예산인데, 미국은 1955년부터 1959년까지 ICA 기술원조자금으로 1억 9800만 달러를 제공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이 제공한 기술원조자금으로 행정부 관리나 기업체 사원, 이공계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을 대거 유학을 보냈다. 발전소 운영경험을 배우기 위해 이공계 엔지니어들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 연수를 보냈고, 서독으로 철강 기술자를 유학 보냈으며, 영국으로 원자력 기술자 유학을 보낸 것은 모두 기술원조자금 덕분이다.

또 서울대와 미네소타대 공대 의대 농대 간 교수 상호 교류를 했고, 한국 학생들을 대거 미네소타 대학으로 유학 보냈으며, 연구와 관련된 각종 기계와 설비를 미네소타대학을 통해 반입했다. 그리고 워싱턴대학과 연세대‧고려대 간에 협정을 맺고 경영학과를 신설하여 국내에서 선진 경영기법을 강의함으로써 기업인과 경영인을 배출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행정과 국방 분야의 엘리트 교육을 위해 서울대 행정대학원과 국방대학원(현재의 국방대학교)을 설립했다.

이승만 정부는 1955년 5월 한미잉여농산물협정을 체결하여 부족한 식량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67년까지 총 5억 7000만 달러어치의 밀과 원면, 보리와 쌀 등을 도입하여 국내 농산물 부족을 해결하는 데 공헌을 했다. 국내에 도입된 잉여농산물 판매대금은 미국이 15%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한국의 국방비로 사용했다. 특히 잉여농산물 도입액의 15%를 공제하여 풀브라이트 장학금 등으로 한국 인재의 해외유학이나 연수비용으로 투자했다.

산업화의 초석 다져: 원자력산업 시동, 경제개발계획 입안

이승만 대통령은 전란으로 황폐화 된 탄광을 복구하기 위해 육군 파견단(단장 김일환 중장, 후에 상공부장관 역임)을 태백산 일대의 탄광지역에 파견했다. 육군 파견단은 광원용 사택을 보수하고, 탄광 부근에 학교를 신축했으며, 문맹자 퇴치를 위한 광원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공병대를 동원하여 영암선 철도 공사를 추진했으며 석탄 수송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그 후 군 트럭으로 탄광장비를 운반하고, 석탄을 수송하여 석탄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육군 파견단의 맹활약으로 1955년 말에 영암선이 개통되면서 석탄이 대대적으로 증산되었고, 이 석탄으로 구공탄을 만들어 공급함으로써 산림녹화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또 원자력산업 육성의 일등공신이다. 이 대통령은 1956년 2월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 간 협정을 체결하고 1957년 8월에 국제원자력기구(IAEA) 회원국에 가입했다. 1958년 3월에는 원자력법 제정을 공포하고 이 대통령의 지시로 원자력 개발만을 전담하는 각료급 기관인 대통령 직속 원자력원을 1959년 1월에 설립했다.

1959년 3월 1일에는 원자력연구소 설치, 1959년 7월 14일에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 2 기공식을 가졌다. 국민소득 불과 60달러 시대에 원자력산업을 계획하고 실천했으며, 1958년에는 원자력 분야 국비유학생 20명을 선발하여 영국에 유학을 보내 핵심 인력들을 교육시켰다. 바로 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원전산업의 리더가 됨으로써 우리나라는 박정희 시절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할 수 있었고, 한국 표준형 원전을 만들어 해외에 수출까지 하는 원자력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시장경제 신봉자라서 소련식 경제개발계획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체계적인 국가발전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 방식에 계획경제 방식을 가미한 체계적인 국가 차원의 경제발전계획이 필요하다고 보고 1958년 9월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했다. 여기서 경제개발 7계획을 입안했는데, 7개년계획 중 1차분에 해당하는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이 1960년 4월 15일 국무회의를 통과했으나 4‧19로 실각하는 바람에 실행되지 못했다. 장면 정부에서 이것을 이어받아 3개년 계획을 5개년 계획으로 수정 보완했으나 5‧16으로 실행되지 못하고 5‧16 후 박정희 시대에 정식 추진된 것이다.

   
▲ 개뱔연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정주영 현대창업주, 이병철 삼성창업주, 박정희 대통령(왼쪽부터) 

이런 사례로 미루어볼 때 1960년대 이후에 한국이 산업화를 통해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기반은 이미 1950년대 이승만 시절에 높은 수준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 시절 산업화 가능했던 이유는 이승만 시대부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자들이 준비되어 싹트기 시작했고, 근대화에 필요한 경험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요약 정리한다면 첫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 장기적으로 평화를 정착시켰다. 둘째, 문맹퇴치, 전후복구 완료, 산업화에 필요한 공장 등 기반구축, 해외유학을 통한 고급 인재의 대량 양성, 경제개발계획 수립 등을 통해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 셋째, 농지개혁으로 국민 모두에게 평등한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공했고, 넷째, 정치적으로는 독재를 하면서도 전쟁 시기에도 국회를 정상운영하고, 단 한 번도 국회를 해산하지 않았으며,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민주주의의 토대를 구축했다.

무엇보다 이승만이란 존재를 통해 한국은 대륙문명에서 해양문명으로 문명사적 대전환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승만을 비롯한 개화파 선각자들의 꿈은 개방을 통한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이었다. 이승만이 젊은 시절부터 주장했던 개방과 통상, 외국과의 교류, 민주주의 등은 해양 문명적 패러다임의 상징이고, 그것을 이 땅에서 실현했으니 해양문명의 선구자는 이승만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는 해방이 되면서 38선(그 후의 휴전선)으로 대륙으로 가는 길이 막히고 3면이 바다로 포위되면서 바다에서 살 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정크무역과 마카오(홍콩)무역, 원조물자의 도입은 해양화 시대의 개막이었다.

이승만은 1952년 1월 18일 평화선을 선포하여 바다에 주권선을 설정하고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시절에는 임해공업단지를 건설하고 수출 지향적 공업화 전략을 통해 한국이 오늘과 같은 번영을 이루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산업화는 곧 해양화이며 남한이 개방, 교류, 민주, 인권을 통해 산업화, 민주화를 달성한 것은 해양문명화의 성취다.

반면에 북한은 소련과 중국이라는 공산주의 종주국을 지향하는 대륙지향 국가로서 폐쇄와 쇄국의 길로 나감으로써 세습왕조국가로 퇴조하고 결국은 실패국가의 전형이 되고 말았다.

1945년 38선으로 인한 국토 분단과 6‧25 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고착화는 휴전선 이남의 대한민국만이라도 대륙문명권에서 탈피하여 해양문명으로의 전환을 통해 선진화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축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용삼 전 월간조선 편집장,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