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신자유주의’에 개념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는 우선 ‘자유주의’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 학계와 사회에서 이에 대한 구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서 혼란이 생겨나고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 중 하나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체제 혹은 정치이념상의 개념이라고 하면, 이에 대척되는 정치체제의 범주로서 현대에서는 ‘전체주의’를 들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말하는 ‘권위주의’는 정치적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자유민주주의의 한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자유민주주의는 근대 민주주의의 유일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본주의경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이다. 경제체제의 범부에 속하는 개념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있다. 수정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경제적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의 변형 중 하나이다.

이렇게 보면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적 범주로서 수정자본주의에 조응하는 것이고, 정치적 범주로서는 자유민주주의의 한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범주를 완전히 혼돈한 데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경제체제로서 잘못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추구하다가 보면 정치체제상으로는 전체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구분에 기초해 보면 발제자가 논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라는 범주와 관련된 개념이고 그 변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변형된 개념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이런 경제체제의 개념이 어떤 정치체제로 연결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라는 그 자체의 개념적 의미 뿐만 아니라 그 논리상의 당연한 결과로서 추구하는 정치체제가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존 롤스가 ‘공정의 정의’로서 ‘자유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을 제시하고, 이 두 원칙은 우선 순위상으로 제1원칙인 ‘자유의 원칙’이 항상 먼저 전제되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불평들을 해소하려는 경제적 고려가 정치체제에 결정적 손상을 가져오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발제가가 발표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고전적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내세우면서 현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논자들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적 경제체제가 어떤 정치체제로 연결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따라서 발제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무분별한 신자유주의라는 개념 사용의 의미를 분명하게 따져보는 것이 중요할뿐만 아니라 그 정치적 결과에 대해서도 비판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중도’(中道)라는 말에는 ‘길’이라는 ‘도’(道)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마치 뚜렷한 이념이나 지향적이 있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렇지만 ‘중도’는 좌와 우 사이에 솟아있는 매우 불안정한 비탈길에 비유될 수 있다. 발제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중도’는 좌와 우 사이에서 상황에 따라서 필요한 부분만 취하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가 어필하는 이유는 한국 정치가 극단적인 진영 논리에 따라서 생산적인 타협정치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중도’를 마치 좌와 우와 같은 하나의 이념적 지향으로 설정하는 사고는 목표 설정과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 양자를 혼돈한 데서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정책은 이상적인 형태로 그대로 실현될 수 없고 그것을 논의하고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정한 타협과 변화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때 중도적이라고 하는 것은 경직된 교조적 사고와는 달리 유연한 입장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고를 서양정치사상에서는 prudence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prudence라는 것은 임기응변과는 다르다.

prudence는 뚜렷한 목적을 유지하면서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 현실에서 생겨나는 어려움을 유연하게 극복해나가는 의미를 갖고 있다. 수단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목적 그 자체를 흐리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라는 경제 행위의 발전 과정에서 정신적 측면, 그 중에서도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발제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신교는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유대교의 투기적이고 무분별한 이윤 추구는 ‘천민자본주의’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발제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를 무차별적으로 비판하는 데 사용되는 것처럼 ‘천민자본주의’도 자본주의 전체를 비판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천민성’은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다른 경제 형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에서 이윤 동기를 뺀다고 하는 것은 불이 위험하다고 산소를 없앰으로써 모든 사람이 호흡 곤란으로 죽는 것과 같다.

문제는 그런 현실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시장경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하고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모순점들을 완화시킬 수 있는 현실적 방안들을 모색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제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는 풍기는 천민자본주의 대신에 사용 문맥에 따라서 “비윤리적 이윤 추구”, “무분별한 사치 추구”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 오해를 줄일 것으로 보인다. /김영호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에서 주최한 <정명(正名)으로부터 정도(正道)가 시작 된다-이념·사상, 문화 분야의 바른 용어> 토론회에서 김영호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발표한 토론문 전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