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공재 영화감독
조우석 선생님의 발제문을 읽으면서 반드시 이겨야 하고, 이겨야만 되는 싸움에 관한 전체적인 그림을 인상적으로 보았다. 늘 느끼는 건 큰 테두리 안에서 펼쳐지는 용어들의 전쟁은 전쟁의 목적에 가깝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전체적 의미)은 늘 논쟁의 대상일 뿐, 실질적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건 발제자님의 말씀처럼 “우파는 문화를 정치-경제-사회영역의 옆 부문의 하나로 보는 산술적 접근에서 벗지 못했다.”는 이유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경제원에서 문화에 자리를 내어준 이 시간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 좌파는 30년이라는 시간을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준비하며 그람시가 주창한 ‘진지전’을 기준으로 문화 진지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문화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미 그 진지전의 근거지로 전락해 버렸으며, 영화를 포함한 영상 미디어계는 90%가 넘는 경이로운 이념 쏠림 현상이 일어났다. 그렇게 서서히 문화계를 지배해 나가면서 그들이 내세운 것은 단지 하나의 ‘단어’였다. 그 하나의 단어로 그들은 뭉쳤고, 그 단어 아래서 그들은 깃발을 치켜들고 싸웠다.

그들이 쓴 단어는 무엇이고, 그 단어 안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발제자님이 전략적 용어였다면, 필자는 현장에서 보고 느낀 전술적 용어를 가지고 얘기하고자 한다. 영화계에 사용되는 용어들의 대부분은 잘못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왜곡된 두 개의 단어를 가지고 그들이 원하던 것의 진정한 의미와 대응책을 찾아 보자.

한국의 독립영화는 ‘이념영화’일 뿐이다

1979년도부터 시작된 ‘투쟁 수단으로서의 영화’는 한국 영화의 자양분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할 독립영화의 태생적 변형을 이루어 버린다. 자유의지에 의해 만들어지고 진화해야 할 독립영화는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투쟁수단으로 전락하며, 전혀 독립적이지 못한 영화로 전락해 버렸다.

웃기게도 이 ‘독립영화(independent film)’라는 단어는 그들이 주구장창 ‘반미’를 외치던 미국에서 만들어진 단어였다. 일본에서는 ‘자주영화’라고 자신들의 나라에 맞게 의미를 재해석해서 단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어처구니없게 그토록 혐오하던 미국의 단어 ‘독립(independent)’를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영화’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영어로는 movie, film, cinema 등 다양한 단어(세부적으로는 다른 단어)들이 있고, 중국은 ‘전영(電影)’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한국은 일본에서 만든 ‘영화(映畵)’라는 단어를 또 그대로 사용한다.

어쨌든 그렇게 자신들의 상황에 맞는 단어를 만들지 못하고 남이 만든 단어에 자신들의 의식과 형태를 담아두려 하다 보니 이런저런 문제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도,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의 ‘독립영화’는 그대로 두고 거기서 파생된 사조들을 만들어 분리를 시키는 작업을 한다.

예를 들어 미국 독립영화의 힘을 알린 데니스 호퍼 감독의 ‘이지 라이더(easy rider, 1969)’는 독립영화가 아닌 ‘뉴 아메리칸 시네마(New American Cinema)’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80년대부터 이념적 의도로 만들어진 한국의 독립영화계는 현재 자중지란에 빠져 있다. 이념과는 무관한 신세대 영화인들의 약진으로 제대로 독립된 작품들이 나오면서 그간의 의미들을 흔들고 있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커다란 캐치프레이즈는 이제 무의미해졌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이 말도 알고 보면 참 어이가 없는 용어일 뿐이다. 미국의 독립영화는 헐리웃 메이저 제작사의 자본에서 벗어나 그저 작가정신에 충실한 영화였다.

위에 언급한 ‘이지라이더’ 같은 독립영화들이 성공하던 당시의 상황은 히피들의 출현으로 인한 반전의식과 국내 상황이 맞물려 난데없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물론 맞는 말이고, 미국의 독립영화는 그런 캐치프레이즈가 없이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독립영화는 말 그대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가?

CJ를 비롯한 대기업들의 돈을 다 지원받고, 정부로부터 매년 지원금을 받는 것이 언제부터 독립영화였는지 독립영화협회라고 간판 붙인 자신들도 핑계를 대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그들에게 ‘독립영화’가 뭐냐고 물으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으며, 아직도 독립영화의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독립영화계다.

국가지원이 줄어들라치면 문체부 앞에서 시위나 하고, 독립영화전용관 개관행사에 국회의원 40명(당시 민주당과 민노당 국회의원들)을 초청하는 부류가 과연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했다는 독립영화인들이 할 일인가? 전세계 어디서고 진정한 의미의 독립영화(일본은 자주영화)는 존재하며, 한국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념적으로 독립영화를 망쳐놓은 386세대와의 단절 없이 한국의 독립영화는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은 독립영화의 틀 안에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라는 사조를 만들어 정리를 하고, 또 다른 독립영화를 위해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

한국도 이젠 투쟁수단으로서 사용되던 한국 독립영화를 새로운 용어로 정리해 두고 다음 세대로 도약할 수 있는 발걸음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만들어지던 그런 영화들은 ‘독립영화’가 아니라, 단지 ‘이념영화’였을 뿐이다. 독립영화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함에도 기업과 국가의 세금, 뜻 맞는(?) 국회의원 등 정치 권력들과 행동을 같이 하는 부류들에게 ‘이념영화’처럼 확실한 용어가 어디 있겠는가?

퍼블릭 액서스(public access)는 ‘대안언론’이 아닌 ‘민중미디어투쟁운동’이다!

위의 문제가 영화인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일반 대중들이 굉장히 심각하게 봐야 할 용어가 하나 있다. 그게 바로 ‘퍼블릭 액서스(public access)’라는 용어다. 일반 대중들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국에 걸쳐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이 것은 심각하다 못해 소름이 끼쳐올 정도로 무서운 현상을 표현하는 용어다.

80년대 이후, 운동권은 실력 있는 영화인들은 현장으로 보내는 반면 그렇지 못한 인력들은 각종 시민단체와 영상교육 전문가로 분별하여 양산한다. 교육 전문가들은 대학가를 점령해 영상을 통한 의식화 교육을 시작하고, 시민단체로 나간 운동권들은 ‘한겨레 문화학교’를 비롯해 미디어교육을 통한 대중화 선동에 나섰다.

그리고, 그들에게 DJ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생의 기회가 온다. 급작스럽게 ‘한국독립영화협회’가 만들어지고, 독립영화 전용관과 미디어센터가 그들에게 맡겨진다. 그들은 매우 ‘독립적’으로 정부가 지원하는 미디어센터의 이름을 ‘미디액트’라 칭하고, 전면에 내세운 것이 바로 ‘퍼블릭 액서스’였다.

영어를 번역하면, ‘(미국 및 일부 국가에서의 텔레비전・라디오 채널의) 공적 이용권’을 말한다. 즉, 퍼블릭 액서스는 시민 스스로 영상을 제작해 매체를 통해 표현하는 형태인 것이다. 넓게는 UCC도 이에 포함되며, 현재 케이블 방송으로는 RTV 등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운동권들에게 이 퍼블릭 액서스는 ‘민중’을 선동하기 위한 또 다른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이었고, 그 단어를 가지고 국가 지원의 미디어센터를 통해 전국적 네트워크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광화문 동아일보 건물에 위치했던 미디어센터 ‘미디액트’는 어린 학생들부터 일반인들에게까지 맑스를 가르쳤으며, 다큐멘터리 편집교육을 러시아의 사회주의 운동 영화들로 구성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커리큘럼들은 전국에 있는 미디어센터로 보내져 전국의 시민들에게 뿌려졌고, 어린이부터 노인들까지 무방비 상태로 영상을 통한 사회주의 공부를 배워야 했다. 그런 퍼블릭 액서스라는 이름 하에 벌어진 최고의 결과물은 바로 ‘광우병 사태’였다.

광화문의 미디어센터 바로 앞에서 펼쳐진 그 사태는 의식화된 인력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고, 인터넷을 통해 그들은 미디어 센터의 수많은 장비를 가지고 영상을 제작해 배포하며 그들을 지원하는 정부를 독립적인 마인드로 흔들어 버렸다. 그런 영상자료들은 전국네트워크를 통해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수많은 자료화면을 근거로 영화로, 다큐멘터리로, 사진집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 이후, MB정부에서 미디어센터를 변화시키려 했지만 1년도 채 안된 시간에 항복해야만 했다. 참 아쉬운 부분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때 퍼블릭 액서스를 넘어서는, 우파의 미디어적 마인드를 제시할 수 있는 용어를 가지고 있지 못한 우파 자체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전국 네트워크를 장악한 퍼블릭 액서스가 과연 철옹성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이 퍼블릭 액서스를 대체할 수 있는 용어도 만들지 못하고, 본래의 뜻도 쓸 수 없어 그냥 영어발음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퍼블릭 액서스를 도입한 ‘RTV’의 실패는 전면적인 의식전환을 요구했다. 더군다나 UCC와 ‘비상업적 목적’의 범주 내에서 그들에겐 순수한 퍼블릭 액서스는 의미 없었다. 그들에게는 ‘시민 스스로’가 아닌 자신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좀비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퍼블릭 액서스라는 국내에서는 해석이 불가능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며, 일반 대중들의 삶 속으로 교묘히 파고들어 갔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대안언론’이라는 명목 하에 범 대중적 투쟁노선을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순수하게 영상을 배우고싶어 하는 열망이 있었고, 반대급부가 발생하고 있다.

퍼블릭 액서스의 정확한 용어를 좌파에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지금, 우파가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만 해도 이 용어의 몰락은 쉬워질 것이다. 퍼블릭 액서스는 ‘대안언론’이 아니라 민중을 선동한 ‘미디어투쟁운동’ 노선의 선전구호일 뿐이다.

하지만, 우파의 비전을 제시할 단어가 없다면, 우리는 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바른 이름(정명)’이 없다면 ‘새로운 이름(신명)’을 만들자!

하나의 단어는 그 안에 많은 시대적, 사회적, 이념적 의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우파는 얼마나 많은 단어들을 선점했으며 활용했는가? ‘보수’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올드하면서 진부한 존재로 포장되어 버렸지만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경쟁’이라는 단어가 자본주의의 폐해로 그려져 버렸지만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우파 내에서만 좋다고 해봐야 공허한 외침일 뿐 아무 소용 없다. 대중이 싫어하면 나쁜 것이 되고, 그것이 사회적인 분위기로 흘러가 버려 어쩔 수 없게 된다. 보수라는 단어가, 경쟁이라는 단어가 지금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다. 본 단어의 원래의 뜻을 다시 정립해서 알려주는 것과 아예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것이다. 무엇이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우파에서는 후자의 것은 생각하지 않는 모양새다. 그런 의미로 위의 예시를 두 가지로 들어본 것이다.

하나는 독립영화의 제대로 된 의미를 찾아가자는 것이고, 후자의 주장은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선점하자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차라리 두 번째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신제품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형성이 되면 그 제품은 망하게 되어 있지 않은가? 결국은 새로운 제품을 내어놓아야만 하듯이, 용어 역시 그러하리라고 본다.

이건 비단 문화만이 아니라, 이념과 자본주의에 있는 용어 모두가 해당된다고 생각된다. 물론 하나의 단어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대중들에게 고정화 되어버린 단어의 의미를 바꾸려면 우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하고, 늘 그렇듯 그때쯤이면 좌파는 또 다른 단어를 선점해 대중을 현혹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단어의 바른 사용’이 아니라 ‘선점’이다! 좌파는 그걸 알고 있다.

예전 국제시장 관련 토론회에서 박성현 주필이 발제한 내용 중에 새겨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어떤 작품을 만들기 이전에 우리의 작품이 어떤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 철학적 근거로서의 ‘사조’가 있어야 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필자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그걸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저들이 안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가 ‘무엇’이냐는 거다. 보수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그러니까 보수영화가 뭐냐는 거다. 알아야 만들지. 아직 한국은 한국영화만의 영화사조가 하나도 없다.

누벨바그니, 뉴저먼시네마니, 대만뉴웨이브니 뭐니 하면서 영화를 얘기할 때도 한국영화는 뭐라고 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수많은 한국영화가 있었고, 60년대의 부흥기부터 지금까지 흥망성쇠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연구조차 없고, 제대로 이름 붙여진 영화사조 하나 없다.

마치 지금의 우파를 보는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파가 선점할 수 있는 용어들을 장악할 곳이 영화계는 많다는 것이다. 언급한대로 한국영화만 하더라도 좌/우 할 것 없이 한국 영화의 역사나 사조 하나 정리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그 점에서는 우파의 대표인물인 조희문 교수가 그나마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우파 문화계에 남은 건 이미 망가져버린 단어의 바른 사용이 아니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의 선점 및 창조일 것이다. 아무리 글로벌 시대라고 해도 한국인과 한국영화인의 뿌리는 한국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 역사를 선점하고 새로운 단어와 사조들을 만들어낸다면, 그 이후에 신명 나게 이게 우파 영화다라고 말하며 영화를 만들 시간이 올 것이다.

그렇게 문화계의 정명(正名)은 신명(新名)에서 시작된다. 필자 역시 신명 나게 우파영화라는 것을 만들어 보고 싶고, 그게 뭔지 정말 보고 싶다. /최공재 영화감독

(이 글은 자유경제원에서 주최한 <정명(正名)으로부터 정도(正道)가 시작 된다-이념·사상, 문화 분야의 바른 용어> 토론회에서 최공재 영화감독이 발표한 토론문 전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