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지방케이블 종합미디어기업…드라마 합작 등 글로벌 경쟁력 우뚝

   
▲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
우리나라 유료방송 50년사 공든 탑이 올랐다. 그것도 지방에서 시작했고 지방의 힘으로 일궈낸 금자탑이다. 대전과 대구 광주 등 지방 케이블 방송으로 커 온 종합미디어기업 CMB가 그 주인공.

1965년 중앙음악유선으로 시작된 CMB는 유선방송, 지금의 케이블 방송만으로 50년의 사업경력을 축적한 한국의 대표적인 유료방송이자 지방방송이다. 자칫 관둘 뻔, 멈출 뻔도 했을 이 놀라운 토종 지방 방송 스토리로 미디어 산업 향방을 한 번 생각해 보련다.

우리 케이블방송사는 공식적으로 20주년이 되어 이번 3월 13일 동대문 DDP에서 큰 행사를 연다. 1995년에 종합유선방송업이 정부 승인으로 개시한 역사다. 이전은 중계유선방송 시기였다. 전파 케이블 전송망으로 묶어세운 동네방송 꼴이었다.

홍콩 무협영화 비디오나 종일 틀어주는 뭔가 ‘대한늬우스’ 시대 이미지 가득한 그 옛날 미디어 신석기 시대였다. 이런 구체제를 버텨와 종합유선방송이란 메이저리그로 진입하고 전환한 1세대 시조가 바로 50주년를 맞은 CMB(Central Multi Broadcasting)다.

1982년이 큰 분기점이었다. 이 때 비디오 플레이어가 본격 보급되면서 동네 마다 중계유선방송들은 복덕방이며 만화방, 미용실, 점방이나 가정집들에 자체 조달 영상콘텐츠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5공 초기 타는 목마름으로 괴로워하던 동네 주민들 목을 축여주는 옹달샘 쪽박 노릇을 했었다.

성룡, 홍금보 나오는 홍콩 영화나 간간이 은밀하게 틀어주는 <엠마뉴엘> 부인 급 성인물 같은 외래 통속 콘텐츠들이 꿀처럼 대한민국 구석구석 동네방송, 지방방송이라는 모세혈관을 타고 흐르던 시절이었다. 원조 효시 CMB도 1982년 기존 대구음악유선방송을 대구중앙유선방송으로 바꿔 설립하면서 영상미디어 산업에 뛰어들었다.

   
▲ CMB 홈피 캡처
그 전까지는 음악 오디오 중심으로 서비스 해왔던 동네 라디오 스타쯤에 불과했다. 그렇게 뭔가 쎄시봉 LP판이나 다방 뮤직 박스 느낌 물씬한 구석기 시대를 창립 후 무려 27년 동안이나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서 이끌고 버텨온 미디어가 CMB였다.

이런 우직하고도 꾸준한 풀뿌리 지방방송 역사가 살아 견뎌주었기에 오늘날 화려하게 디지털 스마트폰 모바일까지 휘젓는 <삼시세끼>, <미생>, <쇼미더머니>,<슈퍼스타K> 같은 케이블 유료방송 킬러콘텐츠들도 탄생할 수 있었다.

CMB 50주년 기념식과 비전 선포식에서도 두드러지게 ‘버팀’이란 개념과 표현이 화제가 되었다. 쉽지 않았고 위험했지만 그럼에도 버텨낸다는 것, 서로 마음을 모아 버틸 수 있다는 것의 가치를 그야말로 바람찬 들판 풀 한 포기였던 벤처 미디어 기업 하나가 지난 50년 동안 입증해 보였다.

이 회사는 인내하고 이겨낸 그런 버팀을 기념 출간한 2권의 책을 통해 외치듯 보고하고 있다. 책 하나는 우리나라 미디어 역사에 헌정하는 『대한민국 유료방송 50년사』이고 다른 하나는 버팀을 시작하고 총 설계하고 지휘해온 창립자를 보여주는 『이인석 회고록, 유료방송 50년에 살다』로 나왔다.

초창기 1961년 8월 유선방송수신관리법이 제정된 것을 시작으로 1963년 12월 방송법 제정 공포를 거쳐 1963년 유선방송협회 발족을 계기로 1965년 CMB 50주년 모태가 된 명동의 서울 중앙음악방송 설립 등이 이뤄졌던 시기가 먼저 구분되어 있다. 50년을 맨 손에서 시작해 스스로 힘으로 커 온 실제 사례를 마주하게 해주는 귀한 자료들이다.

요새 KBS가 광복 70주년 창사 42주년 특별 행사에 한참 열중인 것을 보면 법적, 재정적, 언론 차원 보호 장치도 없었던 어느 민간 미디어 벤처가 지방방송으로 50년을 성장해온 것은 정말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인석 회고록, 유료방송 50년에 살다』에도 이렇게 나와 있다. “나에게는 실속이 중요했다. 추기 음악유선방송 사업을 할 때 동창이나 친지들은 전봇대에 오른 나를 볼품없고 장래성 없는 불쌍한 막노동쟁이로 인식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천박하게만 본 막노동쟁이로 사업의 기반을 다지고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MSO를 일으켜 세웠다”.

하나 더. “하늘도 나의 이런 삶의 방식을 돕지 않은 적이 없다는 얘기다. 또 나는 살아오면서 한 번 작심한 것을 힘들다 해서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다. 삶은 선택이 아닌가.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삶은 선택하지 않은 나머지를 가차 없이 버려가는 것이다. 나는 나의 판단을 믿기에 내가 버린 것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유선방송사업자로서 외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고 전해준다.

술회한대로 삐삐선과 대나무 사다리, 공구혁대와 낡은 자전거, 스즈키 방송작업복 외길 50년이라는 막대한 역사를 지켜온 이인석회장은 한국 미디어산업 역사 큰 바탕을 도맡았다. 그가 버텨 냈기에 오디오에서 비디오까지 확장한 중계유선방송이 자리 잡았고 이후 제대로 된 지역방송이자 멀티미디어로서 종합유선방송이 잉태될 수 있었다.

종합유선방송 20년 성장기를 거치면서도 지상파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벽에 압도당하지 않고 좀 더 자유로운 콘텐츠, 더 많은 전문성과 치열한 장인정신으로 빚어내는 진짜배기 유료방송을 일궈낼 수 있었다. 케이블 유료방송 업계 전체도 CMB처럼 잘 버틸 줄 알았기에 K POP을 비롯한 한류 콘텐츠 전진 기지로서 마침내 높이 오를 수 있었다.

CMB는 홍콩 민영방송사 TVB와 공동 제작하는 창사 5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7일간의 사랑’ 제작 발표도 하였고 이미 디스커버리 채널 등과 합작 사업을 할 정도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복합 뉴미디어그룹으로서 발돋움하고 있다. 지난 5일 남산을 쩌렁 쩌렁 울린 비전선포식에서는 설립자 이인석회장 대신 인사를 한 두 아들 이한담 부회장과 이한성총괄사장이 “그간 50년의 역사를 토대로 소통과 공감을 통해 앞으로도 저희 임직원들과 희망의 가치를 공유하고 혁신의 비전을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지켜낸 지방방송이 우람한 미디어 기업으로 발전한 CMB 미담은 개척자 1세대들의 위대한 기업가 정신을 다시 한 번 우러러 보게 해준다. 아울러 도전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사회적 지원과 내 역사 내 콘텐츠를 아끼는 분위기가 매우 중요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농담이라도 ‘지방방송 끄라’고 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이다. 차돌같이 단단하게 자라나 글로벌 미디어 기업으로 도약하는 50살 꽃중년 CMB에 녹아 있는 고귀한 역사를 아끼고 기쁘게 널리 나눠 가질 일이다.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