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소통'의 이름으로 포퓰리즘 득세...사회 분열 시키는 동력으로 전락
   
▲ 김인영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민주주의’(民主主義)는 democracy의 올바른 번역이 아니다. 먼저 'ism’에만 사용하는 '주의’(主義)를 'democracy'에 붙여 '민주주의’로 번역한 것이 잘못된 번역의 시작이다.

'주의’가 붙고 나서 이념(ideology)적 측면이 강조되어, 인류가 경험한 수많은 정치체제의 하나로서의 '민주정(民主政)’의 측면, 그리고 의사 결정의 한 방식으로서의 '민주적’ 절차와 결정이라는 측면이 사상(捨象)되었다. '민주정’이라는 측면과 '민주적’ 절차와 결정이라는 측면이 사라진 '민주주의’는 한국사회에서 이념적 측면만 남게 되었고 결국 '이상화’되고 '절대화’ 되었다.

과거 운동권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이상화’ 하여 투신 등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쟁취해야 한다는 부작용이 생겨난 이유이다. 이렇게 '절대화’된 민주주의는 최근 이념 과잉으로 경제까지 민주화시킨다는 '경제민주화’라는 해괴한 용어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결국 '경제민주화’는 경제적 평등을 목표로 하였고 시장에서의 자유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흔히 인터넷에서는 '민주주의’를 '민(民)’이 '주인(主人)’인 정치(政治) 또는 사상(思想)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democracy는 어원으로 본다면 그리스어의 'demos’(people)와 'kratos’(to rule)의 합성어인데, 본래의 의미는 '인민이 직접 다스리는 통치’로 왕정, 귀족정처럼 통치 방식의 하나이다.

인민이 직접 다스린다는 통치 방식으로서의 의미와 인민이 주인이라는 최고권의 의미는 엄연히 다르다. 인민이 직접 다스리므로 인민이 주인일 수는 있지만 어원 어디에도 '인민이 주인’이라는 뜻은 찾을 수 없다. 나아가 민(民)’이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민주주의는 '민’이 직접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민’의 대표가 통치하는 것도 인정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인민민주주의도 인민이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대표자가 통치하는 간접 통치이며, 대의민주주의 역시 국민을 대표하는 대표자가 통치하는 간접 통치일진데 '민’에 의한 통치 또는 '민’이 주인이라는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민(民)’이 '주인(主人)’인 사상(思想)이다”라는 해석은 고대 그리스 민주정이나 현대 민주주의 정치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한문(漢文) '民主主義’를 어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적절하지 않은 이해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일본을 통해 도입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민주주의’는 우리나라에서 왕정(王政)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공화정(共和政)’(republic)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서양 시민혁명을 통해 왕으로부터 통치의 권한을 빼앗아 성취한 체제는 민주주의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이름은 '공화정’(republic)으로 지칭했었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민주주의가 탄생한 그리스 정치에 근거한다면 'democracy'는 다양한 정치체제 가운데 한 형태로서 '다수정(多數政)’ 또는 '민주정(民主政)’이다. 또는 '민주정체(民主政體)’로 번역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 '민주주의’(民主主義)는 democracy의 올바른 번역이 아니다. /사진=연합뉴스

사실 '민주주의’는 앞에 붙은 수식어가 더 중요하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를 강조하는 민주주의이고, 인민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는 민주주의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인민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공산당 간부 독재로 귀결되었다.

사회민주주의는 '개인’보다 '사회’를 강조하는 민주주의이다. 사회가 없는 개인은 존재할 수 있지만, 개인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음을 생각해본다면 중요한 것은 개인이고 개인의 자유가 사회적 평등보다 우선한다. 사회민주주의는 개인과 개인의 자유에 근거하지 않는 정치이념이기 때문에 인류 보편적 이념이 되기 힘들어보인다.

동일하게 개인의 소유권을 무시하고 공산사회를 만들고자 시도했지만 본성에 어긋난 것이기에 무너지고 말았듯이 개인을 무시하고 전체(사회)를 강조한 체제인 전체주의 공산사회 역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체제였다.

천민민주주의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유사성

천민민주주의는 링컨식으로 표현한다면 천민을 '위한’, 천민에 '의한’, 천민'의’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그리스 민주주의와 상당히 유사하다.

플라톤은 『국가(The Republic)』에서 통치 형태(constitution)를 명예 지배정(Timarchy), 과두정(Oligarchy), 민주정(Democracy), 참주정(Tyranny)으로 나누었다. 명예 지배정은 스파르타(Sparta)를 모델로 한 것으로 현대에는 유사한 형태를 찾기 힘들다.

참주정은 개인통치(personal rule)로 개인의 자의적인 지배를 의미한다. 그런데 참주정은 민주정이 타락한 경우 나타나는 무질서와 분열로 생겨나는 반동적인 형태의 극단적인 1인 권위주의 정치체제였다. 이렇게 플라톤은 아테네 민주정이 보여준 부자(the rich)와 빈자(the poor)의 정치적 갈등과 당파 싸움을 개탄했었다.

가난한 자들에게 부자란 세금을 짜내는 것 이외에 별 이용가치가 없고, 부자는 보복하게 된다. 그래서 철인통치자(the Philosopher King)가 필요했던 것이다. 철인통치자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갈등의 원인과 해결책을 알고 공동체를 위해 올바른 결정을 내려줄 지도자였다. 이상적인 철인통치의 대척점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싸움만 하는 민주정이 존재했다. 플라톤에게 민주주의, 민주정은 일종의 최악의 체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타락한 형태(degenerative form)의 정치체제로서 다수의 통치자가 자신들만을 위한 통치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민주주의를 폭도들의 통치(mob rule)와 다르지 않는 저급한 정치로 보았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대척점에는 이상적인 혼합정(polity)이 위치했다. 왕정, 귀족정, 다수정이 혼합된 통치 형태로 다수에 의한 정치가 공통의 이익(common interest)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형태를 의미했다.

달리 이야기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민주주의는 '빈자’를 위한 정치로서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 배제된 결정을 내리는 체제였다.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빈자를 위한 그리스 민주정(민주주의)과 천민을 위한 천민민주주의가 다르지 않아 보인다.

포퓰리즘(populism)은 민주주의와 다른가?

우리 사회에도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유행인데 포퓰리즘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어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포퓰리즘'이라는 어의에 충실 한다면 ”대중(people)의 의사가 중심이 되는, 대중(people)에 영합하는 정치노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민중주의’(民衆主義)나 '인민주의’ 또는 '대중주의’라는 번역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치인이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거나 또는 대중을 선동하는 행태가 내용에 포함되는 “대중 영합주의”라는 번역이 더욱 적절하다.

근본적인 의문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가 과연 다른가?’이다. 그리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가’이다. 특히 한 때 대유행했던 대중민주주의(mass democracy)라는 용어를 생각한다면 '대중의 인기를 구하는 정치행태’의 측면에서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은 다르지 않다. 물론 포퓰리즘에는 포퓰리스트 지도자와 포퓰리즘 정책이 함께 존재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선거에서도 일정한 정도의 포퓰리즘 정책과 포퓰리스트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서는 당선되기 힘든 현실이다. 따라서 가부장적이고 온정주의적(paternalistic)이며, 중하위 사회계급들의 정치적 연합에 의존하고, 대중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는 측면이 포퓰리즘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소통’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의 정치에서도 민주적인 지도자라면 앞서 언급한 포퓰리스트적인 특징을 가져야 '민주적 지도자’로 분류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대중의 인기를 구하는 정치행태’의 측면에서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은 다르지 않다. /사진=연합뉴스

이쯤 되면 포퓰리즘과 '떼’(대중)의 의사 따르기라고 할 수 있는 '소통’을 강조하는 대한민국의 (천민)민주주의는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은 '친서민정책’으로 반엘리트적(anti-elitist)이며, '동반성장’ 정책으로 반재벌적인 정치지도자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정체불명의 '친서민’ 정책과 '동반성장’ 정책이라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지지율 회복과 '불통’의 대통령이라는 딱지를 떼버리고 싶어 했었다.

대중이 원하는 것들을 알아서 실천하지 않는 지도자는 '불통’의 지도자요, 독재 꼴통의 지도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불통’에서 '소통’의 변신에 실패했다. 포퓰리즘 지도자에게 필요한 대중을 자극하고 선동하는 자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증세를 통한 복지포퓰리즘의 실현은 천민민주주의다

그리스 국가부도의 재정위기가 1981년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Andreas Papandreou)가 총리가 되면서 무분별하게 도입한 각종 복지정책의 결과 때문인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총리가 되자마자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주라”고 하며 대중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복지)포퓰리즘 정책을 폈다.

정부지출을 늘려 의료보험 혜택을 전 계층으로 확대하였고, 평균·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는 등 선심성 복지포퓰리즘 정책을 이어가 정치적으로 인기를 누렸다. 이것이 그리스의 재정위기를 초래한 파판드레우 포퓰리즘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그리스 최고의 정치인으로 국민들로부터 높이 추앙 받고 있다.

선심성 복지 지출로 그리스의 재정 파탄을 가져온 정치인이 역대 최고의 지도자로 추앙 받는 민주주의는 천민민주주의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복지 축소냐 증세냐의 논쟁도 천민민주주의에 가깝게 가고 있다. 포퓰리즘 정치인들은 재정 수준에 맞는 복지 축소는 제쳐두고 '부자증세’와 '법인세’ 인상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고 있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복지 축소냐 증세냐에 대해 김무성 당대표, 유승민 원내대표, 원유철 정책위의장 3인의 의견이 모두 다르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좋지만 토론을 통해 수렴되고 정책이 되면 당은 일관성 있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하지만 새누리당 내에서도 합의되지 않는 의견이 새정치민주연합과의 협상에서 일관된 의견으로 표출될지는 의문이다.

포퓰리즘은 이렇게 사회를 분열로 이끈다. 구체적으로 보면 포퓰리즘은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대기업(재벌)과 중소기업, 부자와 서민, 엘리트와 대중, 무상복지 반대자와 찬성자, 복지 축소와 증세로 구분하고 전자는 강자(强者), 후자는 약자(弱者)로 구분하고 약자의 정서에 호소하는 선동성을 가진다. 이렇게 포퓰리즘 정치는 사회를 이분화 시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그 기반에서 존속한다.

그런데 문제는 부자와 빈자의 갈등 정치로 갈라져 고대 그리스 사회의 몰락을 가져온 민주주의(mob rule)와 현재 우리나라의 복지 논쟁, 즉 복지 축소냐 증세냐의 봉합되지 않는 평행선의 갈등 정치와 결코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아마도 여·야 정치인들은 증세와 복지 유지(또는 확대)에 동의하고 그로부터 얻은 대중의 인기를 바탕으로 2016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2017년 대선에서 정권을 잡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증세를 통한 복지포퓰리즘의 실현, 즉 우리의 민주주의는 천민민주주의에 다름이 아님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 홈페이지(www.cfe.org) '세상일침' 게시판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