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최상진 기자] ‘연극·뮤지컬은 저마다의 수명이 있다’는 누군가의 말을 믿는다.

기억대로라면 연극 ‘늘근도둑이야기’는 지난 시즌 산소호흡기를 달았다. 비루한 현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던 통렬한 풍자도, 애드리브 아닌 애드리브를 통한 웃음도 갈수록 그 맛이 밍밍했다. ‘신김치도 오래되면 상하는 법’이었다.

그래서일까,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번시즌 유독 매진이 잦고, 인기에 힘입어 연장공연과 지방공연이 바쁘게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제작사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내는 이야기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극장에 불이 꺼지고 딱 10초가 흘렀을 때까지….

   
▲ 사진=이다엔터테인먼트

“쉿, 쉿쉿쉿” 조용히 하라며 깜깜한 객석 사이를 헤집던 박철민이 관객을 향해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자 객석의 긴장감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무대와 객석, 배우와 관객의 경계가 허물어지자 할아버지 도둑들은 이윽고 관객들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작품의 구조는 아주 단순하다. 감옥에서 3일전에 출소한 두 할아버지 도둑이 돈 많아보이는 집을 털기 위해 들어갔다가 발각된 후 관공서(?)로 붙들려가 겪는 해프닝을 담았다. 구조가 단순한 만큼 두 도둑의 입심과 수사관의 호흡이 짜임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11일 덜 늘근도둑과 더 늘근도둑으로 출연한 박철민과 노진원의 마치 만담같은 대사 처리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사람들과 고달픈 현실을 하나하나 꼬집어 대신 욕해주는 맛은 김수미의 욕설 못지않게 찰지고 귀에 쏙쏙 들어왔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관객들과의 능수능란한 ‘주고받기’였다. 배우들은 지속적으로 관객을 활용해 이들이 던지는 풍자가 마치 소주 한 잔 놓고 동네 아저씨들과 나누는 대화처럼 푸근하게 다가오도록 유도했다. 심지어 실수조차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로 활용해 다소 긴 흐름을 군데군데 끊어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 사진=이다엔터테인먼트

윗몸일으키기 50개는 한 것처럼 배가 땡땡해지게 아파오면 어느새 두 노인은 관공서(?) 취조실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간 상황에 처한다. 웬만한 사람은 말도 제대로 못 꺼내는 그곳에서도 온갖 만담과 몸개그를 쏟아내는 그들 앞에 결국 수사관도 관객도 두 손 놓고 무장 해제된다. 유쾌하고 통쾌하고 상쾌하다 못해 찌릿찌릿하다. 그리고 배아프다.

배우들에게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를 들으며 ‘공연의 수명이 언제까지인가’라는 명제에 쉽게 대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반면 대학로 곳곳에 비치된 게시판에 적혀있는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라는 문구가 가슴팍에 팍 내리꽂혔다.

다른 한편으로는 삶이 팍팍하고 어려울수록, 뒤통수를 맞아야 할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 재미있는 ‘늘근도둑이야기’가 이제는 그만 공연될 수 있는 시기가 왔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1989년 초연됐으니 올해로 26년째, 세상만사 다 씹고보는 두 노인네가 여전히 배꼽잡게 웃긴다는건 반대로 세상이 그만큼 씁쓸하다는 뜻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