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성문화의 모든 것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우리나라는 산성(山城)’의 나라다.

도읍지를 포함, 각 고을마다 시가지를 둘러싼 읍성(邑城)을 쌓았지만, 이 읍성들은 실전에서는 그다지 큰 방어효과가 없었다. ‘군사요새로서의 기능 보다는 도시의 울타리역할에 더 충실한 성곽이었다.

반면 방어용 요새(要塞) 역할은 산성이 맡았다.

삼국시대부터 전쟁이 터지면 조정과 관리, 군대 및 일반 백성들까지 도시를 버리고 험준한 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전(籠城戰)으로 적과 맞섰다. 가능한 한 적에게 이용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불태우고서다. 바로 고구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청야전술(淸野戰術)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는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 그런 기능을 했다. 두 산성은 여러 가지로 차이점이 있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의 암봉들을 빙 둘러 쌓은 산성이다. 이를 테뫼식산성이라고 한다. (봉우리)에 테두리를 둘렀다는 뜻이다. 적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는 데는 유리하지만, 산꼭대기에 있어, 장기간 포위당하는 지구전에는 불리하다. 보급, 특히 식수가 문제다.

그 반대는 포곡식(抱谷式) 산성이다.

상 안에 비교적 넓은 골짜기가 있고, 물이 풍부하다. 큰 성에는 촌락과 농경지까지 있어 장기 농성에 강점이 있다. 성곽의 규모도 테뫼식보다 상대적으로 크고, 면적이 넓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바로 대표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 남한산성 성곽/사진=미디어펜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산성으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 터를 활용, 조선 인조 4(1626)에 대대적으로 축성했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광주시(廣州市)를 중심으로 성남·하남시에 걸쳐있다.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km에 달한다.

성곽 안에 도시가 생길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였다.

특히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주 전장이었다. ‘엄동설한고립무원상태로 장기 포위를 당하고, 특히 주변의 높은 봉우리에서 최신 서양식 대포를 쏘아대는 청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결국 항복하고 무릎을 꿇은 삼전도(三田渡) 굴욕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이후 대대적 보수와 증축을 거친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築城術) 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즈치·모모야마시대), 중국(명나라,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다.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火砲)의 도입이 이뤄졌고, 무기 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의 성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성곽 밖에 있는 높은 봉우리인 남한산’, ‘벌봉’, ‘한봉’, ‘연주봉등과 본성을 잇는 옹성(甕城)과 외성들은 청군의 원거리 포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경험의 소산이다.

특히 남한산성은 20146월 등재가 결정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이다.

세계유산 등재는 탁월한 보편적(普遍的 가치를 바탕으로 한 등재기준을 충족해야 하며, 이와 더불어 완전성, 진정성, 보존 관리를 중점적으로 평가한다.

국내에선 사적 제57, 1971317일 지정된 경기도 도립공원(道立公園)이기도 하다.

도립공원이 되면서, 비로소 남한산성의 체계적인 관리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경기도는 문화재를 보호하고 시설물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1976남한산성관리사무소를 개소했고, 지금은 세계유산센터가 됐다.

한파가 덮친 겨울날, 이 남한산성 성곽을 한 바퀴 도는 순성(巡城) 길에 나섰다.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내린다. ‘남한산성입구가 아니다. 산성역 2번 출구에로 나와 조금 내려가면, 시내버스 버스정류장이 있다. 여기서 9-1번을 타면 남한산성 로터리로 바로 갈 수 있다. 9번은 돌아가므로, 시간이 좀 더 걸린다.

로터리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남문이 보인다.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이다. 다른 성들과 마찬가지로, 남한산성 역시 남문이 정문이고, 가장 규모가 큰 성문이다. 인조(仁祖)가 청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성을 나간 곳도 이 곳이다.

여기서 오른쪽 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성곽길이 능선을 오르내리며 이어진다. 이 구간에서 가장 좋은 볼거리는 남옹성(南甕城)들인데, 1, 2, 3남옹성 3개나 있다. 끝에는 화포를 설치하고 주변을 감시하는 대가 있다. ‘남장대터 정면이 2남옹성이다.

멀리 검단산이 보인다. 524m로 여기보다 훨씬 높다. 하남 검단산과는 다른 산이다.

옹성 3곳과 암문(暗門) 5곳을 지나면 동문이다. 암문은 누각 없이 낸 작고 좁은 문으로, 적의 눈을 피한 보급과 기습 등에 활용된 곳이다.

성곽 길은 곳곳에 매우 가파른 구간이 있고 낙엽 밑에 살얼음이 숨어있어, 자칫하면 다칠 수도 있다. 계단 폭도 넓어 오르막은 힘들고, 내리막은 위험해 조심조심 내려간다.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다. 통과는 못하게 막아놓았다.

이어지는 길도 급경사 오르막이다. 꼭대기는 송암정(松岩亭) 터다. ‘솔바위 정자라는 송암정이 있던 곳이란다. 성곽 너머엔 가파른 바위절벽에 소나무 고사목이 한 그루 서 있다.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작은 고찰 장경사(長慶寺)가 나온다.

장경사는 남한산성을 수축할 때 건립된 사찰로, 성을 쌓고 지키는 데 동원됐던 승병(僧兵)들이 머물던 곳이다. 8도의 승병들이 모인 성내에는 절이 10곳까지 늘었다가 일제 때 모두 파괴된 후 4곳이 복원됐는데, 장경사가 건립 당시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절이라고...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다보면, 암문 밖에 장경사신지옹성도 보인다.

동장대 터봉암초암문이 나타난다. 암문 밖으로 봉암성(蜂巖城)이 있다.

봉암성은 조선 숙종 때 본성의 방어력 보강을 위해 쌓은 외성이다. 내부에 벌봉(봉암)이 있어, 벌 봉()자를 쓴다. 517m의 벌봉은 본성 내 최고봉인 청량산(482.6m)보다 더 높다. 인근 최정상인 남한산(南漢山. 522.1m)도 바로 옆이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직접 올라 대포를 쏘아대며, 항복을 압박했던 곳이 바로 여기다.

봉암성에는 동림사 터’, ‘외 동장대 터벌봉 암문등 암문 3개가 더 있다. 그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한봉(418m)까지, 용도(用道) 형태의 한봉성(漢峰城)이 길게 이어진다.

계속 본성 성곽을 따라 걷는다.

이 길은 전망이 그야말로 최고다. 서울시내와 하남시 등 주변 일대가 드넓고 장쾌하게 조망된다. 저 멀리 왼쪽에 보이는 산이 북한산이고, 오른쪽 끝은 예봉산(禮蜂山)이다.

머지않아 북문 전승문(全勝門)이 나온다.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지키기만 하던 조선군이 기습공격을 벌였다가, 전멸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습격을 나갔던 곳이 이 문이니 전승문이란 이름이 창피한데, 정조 때 개축하면서 붙인 이름이란다. 이 문을 통해 세곡(稅穀)을 운반했다고...

북문에서 산성로터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전시에 왕이 머무는 행궁(行宮)을 보려면, 이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 남한산성 행궁/사진=미디어펜

행궁을 둘러보고 그 오른쪽 길로 올라 숭렬전국청사를 거쳐 서문에 오를 수 있고, 영월정(迎月亭)에서 왼쪽으로 가면 어정을 지나 성곽과 만난다.

성곽 길은 북문에서 직진, ‘북장대터연주봉옹성 앞 암문을 지나면, 서문 우익문(右翼門)이다. 여기서 지하철 5호선 마천역으로 바로 내려갈 수 있다. 성곽은 서문에서 청량산으로...

청량산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가 있다.

수어장대는 성을 지키는 최고사령관의 지휘본부 건물로, 202112보물로 지정됐다. 1624년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그 오른쪽에 있는 무망루(無忘樓)는 영조 때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 내편 문루였는데, 그 편액만 남은 것을 따로 건물을 지어 보관중이다. ‘무망루란 이름은 인조의 치욕,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효종(孝宗)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명명했다고.

바로 밑 건물은 청량당(淸凉堂)이다.

청량당은 축성 당시 동남쪽을 책임졌던 이회가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처형되고, 부인도 자결했는데, 나중에 억울함이 밝혀져 세운 사당이다. 그의 넋을 달래는 도당굿도 거행됐었다.

성곽 길 조금 아래에는 서암문과 영춘정(迎春亭)도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은 기가 막히다. 맨 오른쪽에 북한산, 왼쪽 끝은 관악산을 사진 한 컷에 담을 수 있다. 이런 곳은 거의 찾기 어렵다. 관악산 옆 청계산(淸溪山)은 지척이다.

굽이굽이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다시 남문과 만난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