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호 부사장
목욕탕에 들어선 사람이 샤워를 하려고 수도꼭지를 올립니다. 나오는 물이 차가워 급히 수도꼭지를 왼쪽으로 돌립니다. 이번에는 뜨거운 물이 쏟아져 황급히 반대쪽으로 돌립니다. 잠시 미지근한 수온이 흡족하지만 곧 살을 에는 차가운 물의 습격에 본능적으로 다시 왼쪽으로 꼭지를 꺾습니다. 이어 "이 정도면 됐다"고 느끼는 순간, 데일 듯한 뜨거운 물에 놀라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틀게 됩니다. 결국 급격한 냉탕, 온탕을 반복하다가 샤워도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시는 대로 이 맛깔스런 비유의 주인공은 자유주의 경제학의 거목인 '밀턴 프리드먼'입니다. 프리드먼은 이를 '샤워실의 바보(Fool in the Shower Room)'로 부르며 시장의 표피적 안정을 찾는 정부의 과격한 시장개입이 경제를 망친다고 화를 냈습니다. 이후 시장주의를 신봉하는 경제학자는 물론 시장친화적인 정치인들까지 '작은 정부론'을 펼칠 때 수없이 프리드먼의 비유를 활용했고 그 성능은 뛰어났습니다.

오죽하면 오래전, 아주 오래 전인 1976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그의 저서와 아이디어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경제의 담장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겠습니까. 프리드먼의 아이디어는 미국의 황금기라는 로럴드 레이건 대통령 정부의 집권기인 1980년대 꽃을 피웠고 지금도 공화당을 중심으로 진화를 거듭 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프리드먼의 비유에서 인사이트를 얻은 정치인, 학자, 관료, 언론인 등이 넘쳐납니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가 참으로 힘이 세지요.

그래서인지 요즘 대통령선거 과정을 바라보는 여론에도 프리드먼의 그림자가 깊게 투영돼 있습니다. 특히 여야 후보들의 공약이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며 비판하는 여론의 기저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또 언론이 앞장서 이런 후보들의 행태를 '말바꾸기'로 확대·재생산하니 마치 공약을 수정하는 후보는 철학부재 혹은 공약빈곤으로 치부됩니다. 이런 비판이 후보별 지지율에 변동을 주기에 여야 모두 칼날을 세우고 상호비방전을 치열하게 전개 중이지요.

   
▲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사진 좌측)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물론 진보에 뿌리를 둔 정당과 보수를 터전삼은 정당의 후보들이 과거 자신의 발언을 부정하고 말을 바꾸는 것이 교언영색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또 공당(公黨)이 공적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언행을 보면 심사가 뒤틀릴 때도 있습니다. 여성가족부, 기본소득, 양도세, 젠더, 군대, 재난지원금 등 여론의 주요 관심사의 경우 아침과 저녁에 입장이 다르고, 장소에 따라 내용이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게 됩니다.

하지만 공약은 수정돼야 합니다. 유권자와 접촉면이 넓어지면 당연히 기존의 공약은 수정되고 개선돼야 합니다. 과거 우리 대통령선거의 역사를 뒤져보거나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선거과정을 참고하면 모든 후보들의 공약초록은 수정돼 빨간색으로 그득합니다.

우리 선거역사상 대통령 준비를 가장 오래했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DJP연합을 위해 김종필 공화당 총재를 지지하는 보수층의 여론을 공약에 상당 부분 반영했습니다. 또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상대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의 추격에 숨가빠하며 주(州)별 맞춤공약을 내놓느라 수많은 '말바꾸기'를 시도 후 백악관에 입성했습니다.

국민을 위해서도 공약은 수정돼야 합니다. 정당의 색깔과 상관없이 누가 당선되더라도 국민우선의 정책이 펼쳐지도록 국민친화적 정책을 끌어내야 합니다. 또 "내가 먼저 발표한 공약이다", "내 공약을 베꼈다"는 논란은 무의미합니다.

해아래 새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야에 포진된 싱크탱크 거의 모두가 서구지향의 철학을 기반으로 거의 유사한 학문적 배경과 거의 비슷한 정치생활을 했기에 한식에 발표한거나 청명에 발표한거나 차별성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진보와 보수라는 경계의 흔적마저 희미한 요즘, 정당이라는 정체성에서 정책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공약에 민의를 담기 위해 수정을 거듭하는 후보에게 마음이 갑니다.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놓고 고민하며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후보에게 눈길이 갑니다. 괘종시계 같은 후보가 와닿습니다. 괘종시계는 시침과 분침만 있으면 어떤 프레임도 수용하고 흔들리는 시계추를 가졌지만 결코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때가 됐음을 알리는 묵직한 울림이 주변을 깨웁니다.

후보 또한 흔들리지만 민주주의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고, 일정한 진폭으로 안정감이 있는 인물을 그리게 됩니다. 신호와 소음이 혼재된 세상에서 때가 되면 주저하지 않고 정확한 신호를 알려주는 후보가 좋습니다. 이런 후보를 만나고 싶습니다.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미디어펜=편집국]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