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모호성에 영국 미국에 빼앗겨…한·불 공동포럼 개최

   
▲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
문화하면 프랑스였고 프랑스하면 문화였다.
그런 최고봉 프랑스가 이제야 ‘문화산업에의 착수’에 나서고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순과 모호성은 프랑스대사가 직접 밝혀준 뉴스다. 주한 프랑스 대사 제롬 파스키에는 이번 3월 25일부터 3일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문화통신부와 경제산업디지털부의 공동 주관으로 ‘문화산업에의 착수’라는 제목의 첫 포럼이 개최된다고 알렸다.

파스키에 대사는 “문화가 여타 산업 분야처럼 수요와 공급, 구매력, 투자와 같은 경제적 제약 아래 놓여 있는 하나의 산업이라는 것과 살아남기 위해서는 문화 역시 반드시 환경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프랑스는 아주 비슷한 지점에서 디지털화 되어가는 문화 소비와 재정확충 방식과 같은 현안에 적극 대응해야 함을 짚어주었다.

파스키에 대사의 중요 발언은 지난 20일 대학로에서 열린 한국문화경제학회와 주한 프랑스문화원이 주최 한불문화정책포럼에서 나왔다. 포럼 주제 ‘디지털 경제시대 문화의 미래’에 맞춘 맥락이긴 했지만 사실 프랑스의 늦은 출발은 살짝 충격적인 민낯이었다. 더구나 문화산업에 벌써 들어와 문화로 밥 먹고 살려 발버둥 쳐왔던 한국의 현실에 비하면 현기증 날 정도로 아찔한 차이이면서 동시에 뭔가 위태로움으로 다가왔다. 문화산업에 제대로 투신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낙오하고 도태되고 실패하는 것이라고 여겨왔던 신념이 최소 20년 정도는 이 땅에 철벽처럼 굳건했기에 놀라움은 더 컸다.

   
▲ 휴 잭맨, 앤 해서웨이 주연 영화 '레미제라블'.
돌아보면 사실 프랑스와 독일은 문화산업을 의심해왔다. 문화를 어떻게 거래하고 매매할 수 있느냐는 부정적 견해가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듯하다. 문화를 온 사회와 국가가 향유해야할 공공재나 문화재쯤으로 받아들여 온 오랜 전통과 습관이 작용했기 때문이겠지만 속내는 반발심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문화산업 패권이 영 못 마땅한데다 어느새 삽시간에 추적 불가능할 지경이 되어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예 같이 엮이지 않고 따로 서 있겠다는 심산이었다. 문화 예술 콘텐츠를 콜라나 햄버거처럼 인스턴트 기호품으로 만들어 팔아대는 할리우드식 문화산업과 선을 긋고 뭔가 양심과 전통을 지키겠다는 유럽 대륙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전 세계 최초로 문화부를 둔 프랑스였지만 문화산업이라는 통속과는 거리를 두어왔다. 1950년대 드골 정권에서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낸 <인간의 조건> 작가 앙드레 말로가 상징하는 그대로 순수 문학과 예술 쪽으로만 바라봤다. 그 후로 쭉 프랑스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그 유명한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으로 일관하며 자국 영화산업 종사자를 포함한 문화예술인들에게 돈벌이 산업보다는 지고지순한 예술성을 고취시켜왔다. 그러면서 아주 오랫동안 서서히 외래 문화산업에 잠식되어버렸다. 그 후 디지털 콘텐츠는 그런 프랑스를 거의 넉 다운시켜버렸다. 외국 브랜드 애플과 구글, 삼성만이 프랑스인이 영혼을 매혹시켜버렸다.

문화산업을 유보하고 미워했던 전략적 모호성을 너무 오래도록 보듬어 왔던 결과이긴 하다. 참 얄궂으면서 역설적이게도 영화 예술 본가 프랑스에서 프랑스다운 영화는 거의 없다. 자국 영화시장을 죄다 할리우드에 내줬고 현재는 유라시아 저 너머 꼬마였던 한국을 부러워한다. 대표 감독 뤽 베송마저 할리우드 자본과 리암 니슨 같은 이방인에 의지해 <테이큰> 같은 액션 상품으로 버티는 상황이다.

자존심도 심하게 구기고 있다. 프랑스 문학 국부 빅토르 위고 명작 <레미제라블> 뮤지컬과 영화 대박도 고스란히 비껴가 그저 구경꾼처럼 뒷전으로 물러난 어이없는 현실까지 내몰렸다. 뮤지컬은 영국 거성 카메론 맥킨토시가 제작하고 역시 런던의 웨스트엔드와 미국 브로드웨이가 키워냈다. 프랑스인 뮤지션들이 일부 참여했다지만 전 세계 소비자들은 영국 뮤지컬로서 <레미제라블>, 미국 할리우드 영화로서 <레미제라블>만 기억할 뿐이다.

프랑스어권에서 나온 지상 최대 성공작이라는 공연 기업 시르크 뒤 솔레이(Cirque du Soleil : 태양의 서커스)도 엇비슷하다. 프랑스 자치령인 캐나다 퀘백주에서 태동한 이 불멸의 창조 콘텐츠도 우주 최강 문화산업 소비 클러스터인 라스베이거스에 입점하고서야 날개를 달고 세상을 호령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이 뉴욕양키즈나 FC 바르셀로나, 맨체스터 유니아티드를 능가하는 브랜드 파워로 태양의 서커스를 꼽을 정도로 성장한 힘도 프랑스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킬러 콘텐츠들은 모두 프랑스를 비껴갔다. 뤽 베송도 <레미제라블>도 태양의 서커스도 영미 자본과 마케팅이 뛰어들고 전략적 명확성으로 건설해낸 클러스터(문화산업집적지) 존재 앞에 한 없이 무력해져야 하는 암흑기가 이어져왔다. 속절없게도 문화의 등불이 다른 곳도 아닌 프랑스에서 희미해져가는 현실이 나타났다. 설상가상 디지털 질풍노도의 시기까지....

   
▲  휴 잭맨, 앤 해서웨이 주연 영화 '레미제라블'
그렇게 프랑스 문화산업에는 12척 전함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동네 축제들이다. 리옹 지역에서 축제 콘텐츠 사업을 하는 뱅상 카리 사운드나이트페스티벌 디렉터가 이제 갓 전향적으로 문화산업에 착수한 프랑스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한불 문화정책 포럼 발표자로 나선 그는 “우리도 절실하다. 야근도 자주 하고 친구 만날 시간도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할 일이 많다. 지역 축제를 더 알리고 더 키우기 위해 음악 하는 이들이 경영도 하고 정책도 참여하면서 바쁘게 뛰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단절된 사회와 영토, 세대 문제 해소와 외로운 시민들을 위해 문화를 쓸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공공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팽배해 있고 공동체적 관계 회복이 시급한 이 시대에 문화산업은 ‘재건을 위한 핵심 무기’이다”라고 진단했다.

역시 프랑스 문화예술인 다운 멋진 메시지다. 가장 낡고 오래된 축제라는 장르를 딛고 디지털 범람, 할리우드 지배에 맞서보려는 크리에이터의 당찬 소신이기도 하다. 관련해서 이번 한불 문화정책 포럼 발제자로 나선 조동성서울대명예교수는 ‘창조경제를 위한 한국과 프랑스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역설했다. IT와 기업가정신이 강한 한국과 예술문화와 과학기술 강국 프랑스가 전략적 제휴를 통해 21세기 세계를 창조해나갈 것을 기원했다. 프랑스가 문화대국으로 음악과 미술, 무용, 문학 등 전통적인 예술은 물론 강력한 실험 정신을 바탕으로 사진,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결국 성공적인 전략적 파트너십을 창조키 위해서는 프랑스도 한국도 전략적 모호성을 벗어 던져야 함이다. 프랑스는 이제라도 문화산업에 제대로 착수하겠노라는 결의를 흩뜨리지 말아야 할 터이다. 문화대국이지만 클러스터에 자원을 집중하고 대중 수요에 맞춘 문화콘텐츠를 재창조하는 비즈니스 전략 도입에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창조적 파괴와 변화의 아픔을 겪고 나면 프랑스는 샤넬, 에르메스, 루이비똥 하듯 문화산업 명품을 리드하고 미래 새 지평을 열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그 반대다. 문화산업으로 너무 쏠린 전략적 모호성을 보정할 때다. 전통 축제 등 고유문화와 전통 지식, 예술 교육, 문학이며 과학과 조화를 이루는 진정성 높은 콘텐츠 기획, 연구 개발을 도외시해온 단기업적주의 또는 탐욕주의적 문화산업 전략을 배격할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상업의 영미나 물량의 중국과 고르게 경쟁할 전략적 파트너십으로서 한국과 프랑스의 반가운 제휴와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다. 내년이면 마침 한불 수교 130주년이 되니 둘 다 낡은 전략적 모호성을 벗고 뭔가 새로운 달음박질을 할 절호의 찬스가 왔다.
파리의 연인이 한국이 되고 서울의 친구가 프랑스가 되길 낭만적으로 꿈꿔보는 봄날 아침이다.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