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다운 나라 만들겠다"…철저한 원칙·실용주의로 선진국 이끌어

현재 1인당 GDP 5만6113달러로 세계 8위(아시아 1위), 세계경제포럼(WEF) 조사 국가경쟁력 세계 2위, 국제투명성기구 조사 국가청렴도 세계 5위로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평가받고 있는 싱가포르의 건국과 부국의 뒤에는 영웅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있었다.

리콴유 전 총리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닮은점은 강력한 국정 리더십, 효율 제일주의와 엘리트 시스템 그리고 서구 민주주의와 또 다른 토착화된 아시아적 정치철학으로 부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유경제원에서는 지난 23일 타계한 싱가포르의 경제 기적을 일군 리콴유 전 총리의 리더십을 조명하기 위한 토론회를 마련했다.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씌워진 친일파·매국노라는 좌파들의 그릇된 인식과 함께 아시아의 번영을 위해 살다간 두 거인의 생애와 사상이 다시 한번 재조명 되기를 바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리콴유는 능력주의와 업적주의를 강조했다. 학업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왕따’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직업을 국가에서 일일이 찾아주어, 어느 누구도 쓸모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 없게 한다. 리콴유의 교육관이 가져온 결과"라고 말했다. 아래는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의 토론문이다. [편집자주]


   
▲ 박동운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어떤 정치가들은 훌륭한 정치가로 존경받는다. 왜 그럴까? 그들은 나라와 세계를 개조(改造)하여 ‘잘사는 나라, 잘사는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2015년 3월 23일에 타계한, ‘나라를 개조한 정치가’ 리콴유를 이야기한다. 싱가포르는 말레이 반도 끝자락에 붙어 있는 작은 섬으로, 크기는 서울의 약 1.1배, 인구는 450만 명 정도의 도시국가다.

싱가포르는 1826년에 영국의 해협식민지가 된 후 1867년에 영국 식민지로 편입되었고, 제2차 대전 중에는 말레이시아를 침공한 일본군이 점령했고,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하자 영국군이 다시 지배했으며, 1965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런 역사를 가진 싱가포르는 오늘날 초일류 국가다. 리콴유 (李光耀, 1923.9.16~2015.3.23)가 도시국가 싱가포르를 세계 초일류 국가로 만든 것이다.

리콴유는 어떤 사람인가?

리콴유는 1870년 중국 광둥(廣東)에서 이주한 리복분의 증손자로, 1923년에 태어났다. 그는 1935년에 중등학교 입시에서 싱가포르 지역 1위, 1940년에 졸업시험에서 싱가포르·말레이시아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 일본은 1941년 12월에 싱가포르를 침공 하여 영국군을 몰아냈다. 리콴유는 아버지의 소개로 일본기업에서 일하면서 일본과 일본어를 배웠다. 그러던 중 일본 보도담당부서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모집했는데 리콴유는 지원하여 일본군 밑에서 일했다.

리콴유는 일본 점령 시절에 값진 경험을 했고, 이를 계기로 정치에 눈을 떴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전쟁 후 그는 영국 캠브리지의 필즈 윌리엄대학에 유학했다. 그는 법을 전공하여 변호사 자격을 땄다. 그는 1949년에 싱가포르로 돌아와 레이콕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했는데, 레이콕이 식민지의회 역할을 하던 입법의회 의원 후보로 출마하자 본의 아니게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듬해 그는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당시 집배원과 전 화교환수 노조가 영국 식민정부와 임금협상을 벌였는데, 진전이 없자 식민정부가 ‘새 내기 천재 리콴유 변호사’에게 일을 맡긴 것이다. 그는 협상을 멋지게 마무리하여 유명세를 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영국 식민정부가 민중과 너무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리콴유는 1954년 10월에 인민행동당(PAP)을 창당했다. 이듬해 4월 선거에서 그는 싱가포르에서 최다 득 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 식민정부와 투쟁했고, 공산 세력과도 맞서 싸 웠다. 영국은 싱가포르가 1948년 이후에는 자치 정부가 될 수 있도록 민주화 정책을 추진했다. 영국은 1957년에 싱가포르의 자치권을 허용한 후 외교, 국방, 헌법 정치 등 에 관한 권한만 가질 계획이었다. 그래서 1959년 선거는 싱가포르 자치정부 구성과 관련된 중요한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이 총 43석 중 41 석을 얻어 집권당이 되자 리콴유는 수상이 되었다. 그의 나이 35세. 그는 1965년에 영국으로부터 싱가포르 독립을 얻어냈다. 그 후 그는 1990년까지 30년 이상 수상을 역임했고, 퇴임 후에는 3대 수상인 아들 리셴룽 수상을 조언하는 특별직을 맡아 오고 있다. 리콴유는 어떤 일을 했는가? 1959년에 초대 수상이 된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비전을 가진 정치가였다. 그의 비전은 다음과 같은 정책에서 나타난다.

   
▲ 20세기 세계의 지도자로 뽑힌 리콴유는 냉철한 현실감각과 능수능란한 정치술, 그리고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리더였다./사진=연합뉴스
(1). 독립 국가를 만들다 싱가포르가 독립하기 전 영국은 말레이시아 중심의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분리하려 고 했는데, 리콴유는 이를 영국이 싱가포르를 영구 식민지로 만들려는 전략이라고 우 려했다. 여기에다 싱가포르는 당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큰 시장이 필요했다. 그래 서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되기를 원했다. 이 무렵 말레이시아 라만 수상은 연방국가를 세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리콴유가 이끄는 싱가포르 자치정부는 국민투표를 통해 말레이시아의 자치주가 되었다. 그러나 2년 후 말레이시아와의 이념 차이로 싱가포르는 분립하여 1965년 독립국가로 출발했다.

(2). 인재 양성에 국운을 걸다 리콴유는 자원이 부족한 싱가포르가 세계 일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 최고의 인재를 길러내고, 자체적으로 그럴 능력이 없으면 세계 끝까지라도 가서 인재를 데려 오려고 했다. 싱가포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인재 양성에 국 운을 건 리콴유의 인재관 덕분이었다.

(3). ‘싱가포르가 바뀌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정책을 실행하다 싱가포르가 1965년에 독립할 때 당면한 현실은 혹독했다. 공산 세력은 확대일로였 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시장은 굳게 닫혀 있었고, 경제의 젖줄인 영국군마저 철 수를 앞두고 있었다. 리콴유는 생존 전략을 찾아야만 했다. 그는 생존이란 오로지 국 가 이익과 공동선(共同善) 실현으로 가능하다고 믿고, 이를 국가의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싱가포르의 이데올로기로 ‘사회민주주의’를 택했다. 사회민주주의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혼합된 것으로, 그 특징은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이익과 공동선을 앞세운다’는 이념이다. 리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싱가포르가 바뀌어야 한다’는 신념을 굳혔다. 이를 위해 리콴유는 다음과 같은 정책을 추진하여 성공했다.

∙부패와의 전쟁을 벌여 성공했다.
∙불법노조를 ‘법과 원칙’으로 다스려 싱가포르 노조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클린과 그린(Clean & Green) 정책으로 싱가포르를 가꿨다.
∙충성심을 높이고자 토지 국유화로 86%의 국민에게 공공주택을 제공했다.
∙싱가포르를 완전 개방하여 해외자본 유치에 성공했다.

(4). 경제를 완전 개방하여 해외자본 유치에 국운을 걸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경제를 완전 개방하여 해외자본 유치에 국운을 걸었다. 이 결과 2013년까지 싱가포르에 유입된 해외직접투자 저량(貯量)은 8329억 달러에 이른다. 같 은 기간 해외직접투자 유입이 중국은 9568억 달러, 한국은 1674억 달러다. 싱가포르가 이처럼 해외자본 유치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법인세가 아일랜드 (12.5%) 다음으로 낮은 17%이기 때문이다.

리콴유는 해외자본 유치를 통해 좁디좁은 국토에다 자원도 고급 인력도 없는 싱가포르를 세계 초일류 국가로 만들 수 있었다. 싱가포르는 무역이 국내총생산의 3배를 넘어 이 비율이 세계 첫째다. 외국인투자는 국내 총투자의 70%를 차지한다. 싱가포르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기업은 6000개가 넘는다. 싱가포르의 항구와 공항은 세계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계적 물류 허브다. 싱가포르는 런던, 뉴욕, 홍콩, 도쿄와 더불어 세계 5위의 외환시장이다.

싱가포르는 금융시장, 자본시장, 선물시장도 탄탄해 명실공히 세계 금융의 중심지다. 쉘(Shell), 영국석유(BP), 에소(Esso), 칼텍스(Caltex) 등이 진출해 싱가포르는 세계 3대 정유산업국이다. 싱가포르는 1990년대의 전자제품 생산 기지와 물류 허브에서 2000년대에는 연구개 발센터의 허브로 도약하는 등 21세기형 지식기반산업의 허브로 방향 전환을 모색했다.

싱가포르는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 국가를 건설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워놓고, 첨단기술을 보유한 다국적 기업을 유치했다. 싱가포르는 수준 높은 의료와 전통적인 관 광을 결합하여 의료관광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2000년의 경우 의료관광객 1만7000여 명이 싱가포르에서 4억1000만 달러를 썼는데, 싱가포르 정부는 2012년에는 그 10배인 100만 명을 유치하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성공했다. 이 결과 싱가포르는 30 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1만3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한국이 배워야 할 정책이다.

   
▲ 2006년 5월 20일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와 면담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싱가포르는 현재 어떤 나라인가?

싱가포르는 고도성장 국가다. 1971∼2013년간 연평균 성장률이 7.2%로, 같은 기간 9.1%의 중국 다음으로 높다(한국은 7.1%). 싱가포르는 고도성장의 결과 1인당 국민소득이 1989년에 1만 달러, 1994년에 2만 달러, 2006년에 3만 달러, 2010년에 4만 달러, 2011년에 5만 달러(2013년 현재 5만3363달러)에 이르는 선진국이다.
싱가포르는 IMD가 평가한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2014년에 60개국 가운데 미국, 스위스에 이어 3위다. 대부분의 연도에서 싱가포르는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해 왔다. 싱가포르는 프레이저 인스티튜트가 평가한 경제자유지수(이는 시장경제 활성화 수준 을 나타냄) 순위에서 2012년에 152개국 가운데 홍콩에 이어 2위인데, 홍콩은 국가가 아니므로 사실상 1위다. 대부분의 연도에서 싱가포르는 5위 이내에 들어 왔다.

리콴유는 어떤 평가를 받는가?

리콴유는 비전과 진정성을 가진 정치가다. 그의 일생은 작은 섬나라 싱가포르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는 권력을 행사할 때는 한 치의 잘못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싱가포르를 더욱 좋은 나라로 발전시키고자 꾸준히 노력했고, 국민들도 자신을 따라줄 것을 끊임없이 부탁하면서 이끌었다.

그래서 싱가포르 국민은 35년 가까이 1당 독재체제로 통치한 리콴유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리콴유는 국가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구에게서라도 거리낌 없이 배우는 실용주의 정신을 가졌다. 그는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에게서조차 배울 것이 있다면 당당히 배웠다.

노무현 정부에서 과거사청산위원회가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일부 ‘대단한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친일파’로 몰아세운 것은 과연 잘한 일일까? 리콴유는 한 번 세운 원칙은 어떤 난관이 있어도 지켜냈다. 다른 나라에서 비인도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져도, 상대가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싱가포르에서는 싱가포르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관행을 만들었다. 리콴유는 능력주의와 업적주의를 강조했다.

싱가포르 교육제도는 잔인하리만큼 어릴 때부터 능력에 따라 인재를 길러낸다. 학업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왕따’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직업을 국가에서 일일이 찾아주어, 어느 누구도 쓸모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 없게 한다. 리콴유의 교육관이 가져온 결과다. 청렴결백한 통치 스타일, 비전과 의지를 갖고 도시국가 싱가포르를 세계 초일류 국가로 만든 리콴유 같은 정치가가 우리에게는 없을까? /박동운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