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미파 우남 이승만은 오해, 대한민국 자유 수호와 진리 위해 싸웠던 대통령
   
▲ 전계운 충북대 정치외교학과

지속가능한 번영을 누리고자한다면
우남 이승만대통령을 넘어선 청년 자유주의자들이 나와야

1. 들어가며

먼저 우남 이승만대통령 탄신 140주년을 맞아 <청년, 이승만과 함께 자유주의 날개를 달다> 토론회에 토론자로 설 수 있어서 매우 영광이다.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초석을 다진 자유의 아버지(The Father of the Freedom) 우남 이승만대통령의 정치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다소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자유주의의 흐름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원류를 찾고 연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의 대표적 도덕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애덤스미스로부터 후학들이 학문을 발전시켜 루트비히 폰 미제스, H.A 하이에크, Murray Newton Rothbard와 같은 훌륭한 자유주의 학자들을 탄생시켰듯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자유주의를 접하고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을 강력히 수호해온 우남 이승만대통령을 연구하는 일은 한국에서의 자유주의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 1899년 대역죄(大逆罪)로 한성감옥에 수감된 이승만은 1904년 '독립정신'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집필했다. 110년 전에 쓰여진 책이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외교전략과 국가정신이라는 면에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규태 경제진화연구회 청년위원의 발제 <우리는 우남 이승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를 보며 본 토론자는 내용을 덧붙여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의 대미투쟁기와 정치사상 및 현실인식에 대해 짧은 지식이지만 발표해보고자 한다.

2. 우남의 대미 투쟁기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친미파(親美派)라고 한다. 그래서 건국과정에 있어서 철저히 미국의 등을 업고서 정권을 잡았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04년 한성감옥에서 출옥 후 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대서 수학(受學)을 한 뒤 YMCA에서 교육활동을 하다가 기미년 만세 운동이 일어난 그해 1919년 4월 11일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추대되고 8월 25일 워싱턴 DC 구미위원회를 설치하면서 대통령직에서 하야직전까지 미국과 끝없는 투쟁기를 보냈다.

그는 틈만 나면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사례를 들며, 자유민주진영의 리더인 미국이 자유를 수호해야할 책무를 버리고 조-미 수호통상조약의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대한인(大韓人)들은 제국주의압제와 공산도당들에게서 고통과 신음 속에서 살아왔다며 미국정부를 힐난하고 신의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며 워싱턴에 있는 국무부관리들에게 매섭게 호통을 친 진정한 자유인(Libertarian)이었다. 친미파(親美派)라는 주장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인 것이다.

(1) 미국정부에게 무기요구와 공산주의의 야욕을 경고

한국 사람들은 일본인으로부터 끊임없이 받아온 모욕과 부당한 처사들이 가슴 속 깊이 쌓여 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1905년 일본의 굴레에 자신들을 넘겨준 미국 정치가의 배신에 분개하고 있소. (중략) 당신은 미국 정치가의 그런 행동이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좋은 감정을 일으키고 미국과의 통상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또 그런 행동이 극동에서 평화의 대의(大義)를 증진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중략) 만약 미국이 한국 사람들이 제대로 싸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무기대여 원조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경우에도 한국국민들에게 공정함을 보여주기 위한 명분으로도, 몇 푼어치 안 되는 2,3천 발의 소총탄약만이라도 민주주의란 무기고에서 그들에게 선물로 제공하는 것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오. 오히려 한국은 공동 참전국 축에도 끼지 못하고 있소.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한국이 미국의 적이 되어 있는 셈이오. 왜 그리되어야 한단 말이오?

- 1945년 4월 9일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내는 편지 중 -

2차세계대전중에 한반도는 “일본의 특수 보호지역”으로서 사실상 일본인과 더불어 조선인(朝鮮人)도 미국의 적이었다. 종전 후 군사재판이 열린다면 한반도에 있는 조선인(朝鮮人)들은 전범국을 도운 죄로 처벌 받을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세계만방에 독립의 정당성을 외칠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이를 미리 꿰뚫어 본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인(大韓人)의 유구한 역사를 미국의 대중에게 알리는 운동을 하는 한편, 워싱턴 국무부에 로비를 적극적으로 펼치며 대한인(大韓人)들을 무장을 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건물 짓기에 수고한 목수들이었다. 

워싱턴 국무부로서는 매우 황당한 요구였을 것이다. 한반도내에서 대표성이 불분명한 “이승만”이라는 사람의 말만 듣고 무기를 원조해주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기요구는 건국 이후 국군을 3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중무장을 시켜달라는 요구로 더욱 크게 발전한다. 그의 규명운동이 우리 모두를 살렸다. 이런 업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선언합니다.

- 1948년 12월 19일 편지 중 -

 

자유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다. 이 두 가지는 합쳐질 수가 없다. 공산주의와 타협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기름과 물을 섞으려는 것과 같다.

-1953년 휴전협약 조인을 앞두고 반대성명을 내며-

우남 이승만대통령은 일찍이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1923년도에 이미 <왜 공산주의로는 안 되는가?>라는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을 쓴 뒤 1933년 그는 스위스 제네바와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모스크바로 방문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짧게 체류했지만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보고 느낀 점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유럽 농가와 비교했을 때 러시아 농가가 가장 빈약하다는 점이다. 기차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러시아 길거리에서 굶어 죽은 사람을 자주 보았다고 하였다.”

노동자와 농민의 천국이라는 소련에서 노동자가 굶어 죽어 죽는 것을 보곤 공산주의의 허구와 본질을 몸으로 깨닫게 되자 그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평생 싸워야할 대상이라 했다.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나 폴 새뮤얼슨(Paul Anthony Samuelson)와 같은 경제학자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마치 신(神)이 내린 이념인 것처럼 추앙받던 시대에서 대단한 혜안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2) 미군정과의 갈등

우리가 미군정을 지지하지 않으면 자기들은 철수하고 공산주의자들이 내려올 거라고 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소.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자신에게 알맞게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으나 당신네가 한국에 와 있는 목적은 오직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하였소. 그리고 우리 또한 우리들의 목적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 못지않게 그들을 위해서도 싸우고 있는 것이니 어떤 식의 공갈도 여기에서는 소용이 없소. 우리는 ‘만일 한국 사람들이 복종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자기들이 힘을 행사하겠노라’는 식의 성명서로 미군정이 공갈을 치는 일에는 우리는 이제 신물이 나고 피곤합니다. 그리고 여러 번에 걸쳐 자기들이 미국으로부터 ‘쏴 죽이라’는 명령까지 말한 적이 있소.

-1948년 3월 2일자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내는 편지 中-

우남 이승만 대통령이 친미파(親美派)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무색해지는 대목일 것이다. 사실, 조금 더 시간을 뒤로 돌아 이야기를 한다면 하지의 미군정은 우남이 환국 전부터 한반도에 들어오지 못하게 방해공작을 하기도 했다. 미군정의 입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타협 따윈 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 늙은이’라 소련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한반도 내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 분명하므로 중도 좌파인 여운형과 중도 우파인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통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으로 추진해나가고자 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맹렬히” 반대했다. 연립정부는 결국 공산주의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것이며, 미국이 또 다시 한번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재현한다고 끝없이 미군정과 워싱턴 국무부 관리들을 괴롭혔다.

   
▲ 초대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제헌헌법에서 서구식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명문화하고, 재산권보호 등 시장경제발전의 토대를 쌓았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아 공업화에 투자함으로써 한강의 기적을 창조하는 데 밑거름역할을 했다. 

그리고 정치적 승부수로 정읍에서 남한 지역만이라도 자유민주국가를 세울 것을 주장하는 “정읍발언”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조치는 워싱턴의 국무부를 경악케 했다. 하지만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1947년, 좌익과 연립정부를 세웠던 동유럽은 모두 공산화되었다. 이후에 1952년 전쟁 중 직선제 개헌과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 대통령을 체포하고 한국을 다시 미군정하에 두는 계획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세웠을 정도로 미국과의 갈등은 첨예했다.

3. 우남의 정치사상

(1) 자유주의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自由)라는 개념을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을 통해서 처음 접했다고 한다. 과거 준비생 이승만으로 하여금 위정척사에 집착하는 보수적 유교 사고와 결별하게 만들었다는데 여기서 이 대통령이 배운 자유는 인위의 자유(Liberty)가 아닌 천부의 자유(Freedom)이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재산권)를 보장 받는 로크의 권리이론과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애덤스미스 고전경제학의 인식을 가지고, 헌법에도 이를 골자로 하여 사망하기 직전까지 그 흐름은 계속 유지했다.

(2) 머리는 서향, 가슴은 동향

“이 대통령의 정치사상은 ‘서향(西向)주의’와 동시에 유교전통이 끈질기게 작용했다. 그의 머리는 서향했지만 폐부(肺腑)는 동양에 머물고 있었고, 동과서의 융화(融和)나 퓨전(fusion)을 시도했다. 이 대통령은 서향식 민주발전을 역설하면서도 동방예의지국 전통의 부활과 진흥을 바랬고, 기독교와 유교 사이에 근본적 모순이 없다고도 주장했다.”

로버트 올리버의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에 나온 자료를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동양철학, 공자의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기독교의 가부장적사상과 유교사상은 별 다른 차이가 없다고 보았고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자유 민주를 이야기하면서도 가슴속으로는 민족주의를 품으며 유교적 전통질서의 부활을 꿈꾸었다.


4. 결어

얼마 전 두산 백과에서 제1공화국 정치와 사회상이라는 키워드를 보았다. 내용이 매우 가관이었다. “건국 초기의 혼란 속에서 6 ·25전쟁을 겪고 난 정부로서는 전후복구라는 시급한 난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당은 전후복구보다는 장기집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로 시작하며 시종일관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담긴 내용이었다. 한국 현대사를 배우는 청소년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날조와 부정으로 점철된 역사교육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그의 쓸쓸한 말년을 생각해서라도 진실을 바로잡아 이승만대통령의 명예를 회복해야한다.

   
▲ 자유경제원이 26일 자유경제원 회의실에서 개최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 탄신 140주년 기념 청년토론회 <청년, 이승만과 함께 자유주의의 날개를 달다>의 전경. 발제자인 김규태 경제진화연구회 청년위원이 발표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주의를 품으며 자유민주제도를 통한 대한민국의 번영을 꿈꾸었다. 민족주의가 한국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인 경제적 자유의 보장을 함으로써 눈부신 번영을 이루어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이러한 번영을 계속해서 구가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뛰어 넘는 청년 자유주의자들이 많이 나와야한다. 먼저,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을 탈피해야 한다. 이것은 자유주의로 가는 첫걸음이다.

이것을 탈피하지 못하면서 경제적 자유를 지향한다는 이유로 자유주의자로 불리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혹자는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을 한국형 자유주의자라고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글로벌 시대, 하루하루가 혁신과 변화로 일렁이는 시대다. 사해동포주의를 지향하며 경제적으로도 자유주의적인 움직임을 끊임없이 취해야한다. 또한 비자유주의적 정책과 행태에 대해서는 절대 묵인해서는 안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인해 국군의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자유인은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자유(自由)를 향한 진리와 진실 수호를 위해 싸워야 할 몫은 청년 자유주의자들에게 남겨졌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전계운 충북대 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