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히 죽어간 사람들, 강물은 무심하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그것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우리 만대 자손들에게 경계한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에 있는 낮은 언덕인 절두산, 한 구석에 서 있는 척화비(斥和碑)에 새겨진 비문이다.

조선은 병인년에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공으로 ‘병인양요’를, 신미년에는 역시 강화도에서 미군과 ‘신미양요’를 각각 당했다. 보기 드문 격전과 희생을 치렀지만, 결국은 적군을 격퇴했다.

당시 집권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쇄국’의 의지를 굳건히 하고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이와 같은 척화비를 세웠다.

문제는 죄 없는 천주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병인년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살해됐다.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다. 바로 이 곳 절두산에서, 가장 많은 신도들의 목이 떨어졌다.

그 전에는 ‘양화나루’의 잠두봉(蠶頭峰)으로 불리던 이 곳이 절두산이 된 연유다. 잠두봉은 누에의 머리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이 절두산(切頭山)은 이제 대표적인 천주교 순교성지 중 하나다.

   
▲ 절두산 천주교 순교성지/사진=미디어펜

또 절두산 반대편에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있다. 구한말 이 땅에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이 낯선 나라에서 숨을 거둔 외국인선교사(外國人宣敎師) 들이 묻힌 곳이다.

절두산이 천주교 성지라면, 이 곳은 개신교의 성지인 셈이다.

인근 ‘망원한강공원’에는 함상공원(艦上公園)이 유명하다. 퇴역한 해군 ‘참수리 285 고속정’과 전함인 ‘서울함(952함)이 전시돼 있다.

이 세 곳을 중심으로, ‘마포한강길’을 걸어본다.

지하철 6호선 마포구청역(麻布區廳驛)에서 내려, 7번 출구로 나왔다. 바로 옆 계단을 내려가면, 불광천이 흐른다.

불광천(佛光川) 변에는 따뜻해 진 날씨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자전거타기를 즐긴다.

곧 ‘성산교’ 밑에 불광천과 ‘홍제천’이 합류하는 시점에 이른다. 불광천이 홍제천(弘濟川)의 지류로, 이제부턴 홍제천 길이다.

사람은 좀 더 많아졌고, 하천 물도 많이 불었다. 20~30분 정도 천변을 따라 걸으면, 드디어 한강이 나온다. 바로 망원한강공원(望遠漢江公園)이다.

머리 위로 성산대교(城山大橋)가 지나간다. 붉은 색 아치형 상판을 가진, 아름다운 다리다. 그 앞 눈사람 조형물이 반겨준다.

한강변을 따라 걷는다. 각종 상가가 입주해있고, 오리 배들이 전시된 유리건물 ‘MaPoint’ 앞을 지난다. 작은 요트도 한 척 정박해 있다.

강변과 강 위에, 함선(艦船) 두 척이 보인다. 바로 ‘서울함상공원’이다.

안내센터에서 티켓을 사면, 두 배를 모두 돌아볼 수 있다. 안내센터 2층에 잠수함(潛水艦)도 한 척 전시돼 있다. 어뢰 등 각종 무기와 전자 장비들, 그리고 병사들의 생활공간이 있다. 그런데 너무 비좁아, 처음에는 답답함을 넘어 ‘폐쇄공포증’을 느낄 것 같다.

참수리 285 고속정(高速艇)에 올랐다.

해군 함정 중 가장 작은 군함이지만, 연안방어에 큰 역할을 한다. 연평해전(延坪海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갑판 양쪽으로 31mm 주포와 기관포, 발칸포 등이 제법 위용을 뽐낸다. 가운데는 함장이 지휘하는 함교(艦橋)다.

영화 ‘연평해전’의 장면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참수리 옆에는 거대한 철제 스크류가 전시돼 있는데, 둘 중 어느 함정 것인지 알 수 없다.

서울함은 참수리보다 훨씬 큰 전함(戰艦)이다. 크기와 레이더, 주탑 및 함교의 높이, 함포의 구경 등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레이더는 아직도 빙글빙글 돌아간다.

서울함은 1985년 취역한 ‘울산급 호위함’이라고도 불리는, 한국형 호위함(護衛艦)이다. 현역시절, 대한민국 해군의 주력 전투함 중 하나였다. 76mm 주포, 40mm 쌍열포 3문, 어뢰 6발, 폭뢰(爆雷) 12발, ‘미스트랄’ 대공미사일 등을 갖추고 있으며, 승조원은 총 150명이었다고.

다시 한강변을 걷는다.

강물에 비치는 햇살은 강렬하지만, 바람은 아직 차다. 체육공원과 자전거도로 사이 흙길을 따라간다. 강변에는 드넓은 억새밭과 갈대밭이 펼쳐져 있고, 앙상한 나무들이 일렬로 섰다.

바로 ‘난지생명길’ 2코스다.

‘The 나인(9) 잠두봉선착장’ 앞을 지나면, 어느 새 양화대교(楊花大橋)가 보인다. 대표 밑을 지나면, 바로 왼쪽 위가 절두산 순교성지(殉敎聖地)다.

밑에서 올려다본 절두산은 과연, 누에가 머리를 쳐든 모양새다.

계단을 오르면 순교현양탑(殉敎顯揚塔)이 우뚝 솟아있고, 양화대교 반대편에 ‘천주교 꾸르실로 교육관’이 있다. 순교현양탑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오른쪽에 절두산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절두산 이름처럼, 목을 쳤던 작두와 큰 망나니 칼 모형이 으스스하다.

오른쪽 계단 위에 성당이 있다.

그 입구엔 ‘순교자(殉敎者)를 위한 기념상’이 있고, 반대쪽에는 ‘성녀 마더 데레사’ 흉상이 보인다. 왼쪽 안에는 우리나라를 찾았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敎皇) 흉상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깊 옆에는 예수를 형상화한 듯한 철사로 만든 조형물이 사람들을 안아주는 모습이다.

왼쪽 광장 끝에,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1846년 순교한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대형 입상이 보이고, 강변에는 그의 좌상도 있다.

그 옆에 선 것이 바로 척화비다.

김대건 신부 동상 앞을 지나, 공원처럼 꾸며진 산책로를 따라 순교 성지를 빠져나왔다.

양화대교 다리 밑으로 도로를 건너는 길 한 구석에는,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李承勳) 동상이 있다. 세례명이 ‘베드로’인 이승훈은 1784년 베이징에서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천주교의 첫 발판을 마련했다.

그 역시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의 순교자가 됐다.

강물은 꽃잎처럼 무수히 스러져 간 그 때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아픈 역사를 생생하게 지켜봤으련만, 그저 무심하게 흐를 뿐이다.

계단을 오르면, 넓은 건물터 기단이 몇 개 있다. 바로 조선시대 양화진(楊花鎭) 터다.

이 ‘양화진역사공원’을 지나면,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 건물이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한다. 100주년기념교회는 ‘100주년기념재단’ 소유의 외국인선교사묘원과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용인)의 사유화를 막고, 기독교(基督敎) 100년의 정신을 기리고자, 2005년 창립됐다.

여러 교단과 기관의 연합체인 100주년기념재단에 의해 창립돼, 특정 교단에 가입할 수 없는 연합교회(聯合敎會)의 모습이지만,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독립교회이기도 하다.

그 왼쪽 언덕이 바로 외국인선교사 묘원이다.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사진=미디어펜

여기엔 언더우드, 베델, 베어드 가족, 스크랜턴, 아펜젤러, 에케르트, 켐벨, 테일러, 헐버트 등 총 417명 벽안(碧眼)의 서양인들이 묻혀 있다. 이 중 일부는 한국의 독립유공자이기도 하다.

건국훈장을 받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의 묘비에는 원두우(元杜尤) 목사라고 적혀 있다. 언더우드를 빠르게 발음한 것으로, 고종황제가 지은 이름이다.

한 쪽에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주치의로 한국독립에 헌신, 역시 건국훈장 수여자인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의 묘가 보인다.

마찬가지로 건국훈장을 수상한 영국 언론인 어네스트 베델의 묘도 있는데, 베델은 배설(裵說)이라고 표기됐다. 그는 양기탁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했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등,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묘원을 나와 좌회전,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하철 2·6호선이 만나는 합정역(合井驛)이다.

대로를 건너 합정역 8번 출구에서, 한강 쪽 방향으로 간다. 양화대교 북단 교차로 근처까지 가면, 도로 변에 정몽주(鄭夢周) 선생 동상이 있다.

선생은 다 알다시피, 고려 말의 대유학자이자, 고려를 뒤엎고 ‘역성혁명’을 추진하는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맞서 마지막까지 고려조를 지키려다, 이방원(李芳遠. 나중의 태종)의 부하들에게 ‘선죽교’에서 비참하게 살해된 분이다.

그 바로 뒤 골목길은 정몽주의 호를 딴 포은로(圃隱路)다.

포은로는 예쁜 길이다. 입구 건물부터 인상적인 벽화로 덮여 있고, 멋진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양화공원(楊花公園)과 ‘합정한강아파트’ 앞을 지나 사거리를 건너면, ‘망리단길’이다.

망리단길은 이 동네 이름인 망원동(望遠洞) 길의 별칭이다.

용산(龍山) ‘경리단길’이 뜨면서, 00단길로 명명된 길들이 우후죽순처럼 전국 곳곳에 생겼다. 수원 행궁동 ‘행리단길’, 부산 해운대 ‘해리단길’, 경주 황금동 ‘황리단길’ 등등...

망리단길 답게, 골목길은 예쁜 카페와 이색적인 레스토랑들이 즐비하다. 젊음의 거리다. 망원시장(望遠市場) 근처엔 서민적인 먹거리와 ‘가성비’ 좋은 식당 노포(老鋪)들도 많다.

시장을 지나 대로(월드컵로)로 나오면, 오른쪽에 지하철 6호선 ‘망원역’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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