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고 1주기 추모 특집…다시 되돌아 보는 그날의 기록과 증언들
세월호가 사고로 침몰한 지 1년이 되어간다. 세월호는 아직도 우리 곁에 크나큰 화두이자 마음 속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최근 1주기를 앞두고 세월호 인양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디어펜은 <세월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기획특집으로 금일부터 15일까지 8편에 걸친 연속기사를 게재한다. ①세월호 사고 당일, ②세월호에 대한 정부 대처, ③세월호 재판 경과, ④세월호의 침몰 원인, ⑤유병언과 청해진해운, ⑥세월호에 대한 루머 및 선동꾼들, ⑦인양 및 보상, ⑧세월호 유가족 등을 기록과 증언 등 사실에 기초하여 밝힌다. 오늘은 첫번째 기획으로 세월호 사고 당일을 재구성해서 밝힌다. 세월호 침몰 당일 있었던 기록과 행적이다.

[미디어펜=김규태기자] 세월호는 사고 전날, 인천항을 출항한다. 원래는 오후 6시 30분에 출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짙은 안개로 인해 출항이 2시간 30분 가량 지연된다. 이후 세월호는 출항을 결정, 배는 인천항을 떠난다. 가시거리가 800m로 규정에 따르면 출항하면 안되는 경우였다. 하지만 세월호는 규정을 어기고 출항했다. 안개 속을 헤치며 나아간 것이다.

■ 2014년 4월 15일 세월호 사고 전일 Time Line

▶ 18시 30분 : 원래 세월호는 18시 30분에 출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짙은 안개로 인해 출항이 지연되었다.

▶ 21시 : 세월호는 2시간 30분의 출발 지연 이후 인천항에서 출항했다. 출항 당시 가시거리는 800m였다고 한다. 세월호는 “1km 이하의 가시거리라면 항해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기고 출항했다. 세월호 항해는 기존 선장인 신모씨의 휴가로 인해 대리 선장인 이준석씨가 맡았다.

 

세월호 침몰, ‘과속 중의 급선회’로 중심을 잃고 기울다

이윽고 날이 밝은 뒤, 16일 아침 사고가 터졌다. 일단 사전 상황을 전하자면, 어선이나 암초 등의 장애물은 없는 상황에서 오전 8시 47분에 이르기까지 세월호는 아무 사고 없이 운항하고 있었다.

문제는 속도였다. 세월호는 예정된 출항시각 보다 2시간 30분 지연되어 출항했다. 항해 시간이 150분 지체된 것이다. 이 때문에 세월호는 적정 항해속도를 초과해서 세월호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력을 유지하면서 과속 운행을 했다. 이는 관계당국의 항적분석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 세월호가 침몰한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 35분의 모습이다. 세월호가 60도 이상으로 기울어진 채로 침수하고 있으며, 점차 전복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라 해경 구조대의 선내 진입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사진=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영상 캡처

사고해역, 조류가 빠르기로 유명한 맹골수도로 진입하는 순간에도 세월호는 최대 속도를 유지했다는 점이 항적 분석 결과 드러나기도 했다. 조류가 국내 인근 해역에서 가장 빠르기로 알려진 구간으로 진입하면서 세월호는 최대 속도를 냈다. 그리고 배의 조타를 담당한 조타사는 경험이 부족한 3등 항해사였다.

그리고 세월호는 속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맹골수도 진입 시 세월호의 항적은 평소와 다르게 어긋나 있었다. 세월호는 규정된 좌표로 항해를 하지 못한 것이다.

과속을 거듭했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맹골수도에 진입한 세월호는 8시 48분 급선회를 시도한다. 여기서 침몰 과정이 시작되었다. 세월호의 침몰 과정은 다음과 같다.

   
▲ 해경이 2014년 4월 16일 근접 촬영한 세월호 침몰 당시 모습을 28일 공개했다. 9시 41분에 촬영된 영상에는 해경의 구조모습이 담겨있다. 세월호는 75도 가량의 경사로 기울어져 있다. 이 순간은 해경 구조대 보트가 간신히 배와 접할만한 공간이 주어진 마지막 순간이다. /사진=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영상 캡처

(1) 세월호는 우측으로 회전하기 위해 항로를 바꿔 잡는 구간(변침)에 진입했다.

(2) 하지만 이 구간에서 세월호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급선회를 했다. 8시 48분에 벌어진 일이다.

(3) 급선회로 인한 관성 작용과 더불어 과적했던 화물들이 쏟아져 내리면서 세월호는 중심을 잃었다.

(4) 중심을 잃은 세월호는 기울기 시작했다. 8시 49분에 벌어진 일이다.

(5) 3분 뒤인 8시 52분, 세월호는 표류하기 시작한다.

(6) 26분 뒤인 9시 18분, 세월호는 좌현으로 50도 기울게 된다. 50도는 사람이 도구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기울기다.

(7) 2시간 뒤인 11시 18분, 세월호는 선수 일부를 남기고 완전히 침몰하게 된다.

■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 당일 Time Line (1)

▶ 7시경 : 현지 어민이 사고해역에 정박해 있는 세월호를 목격했다. 아무 이상 없어 보여 어민은 마을로 돌아갔다.

▶ 7시 50분 : 이 시간부터 배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는 생존자의 증언이 있다.

▶ 8시 49분 : 세월호는 49분 37초부터 49분 56초까지 19초간 오른쪽으로 45도 변침했다.

 

기울어진 이후 30분간의 골든타임, 때를 놓치다

세월호 사고가 참사가 된 것은 침몰 전 30분간의 골든타임을 놓쳤기 때문이다. 학생으로부터 최초 신고가 들어간 8시 50분부터 좌현 50도까지 더 기울어졌던 9시 20분까지 30분간의 골든타임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이준석 이하 승무원들의 안이한 대처로 피해는 수습불가인 상황으로 커졌다. 가장 먼저 발견되었던 사망자 중 하나인 선실 승무원 박모씨가 아니었다면 더욱 큰 피해규모가 연출되었을 것이다.

   
▲ 해경이 2014년 4월 16일 근접 촬영한 세월호 침몰 당시 모습을 28일 공개했다. 9시 41분에 촬영된 영상에는 해경의 구조모습이 담겨있다. 세월호는 75도 가량의 경사로 기울어져 있다. 이 순간은 해경 구조대 보트가 간신히 배와 접할만한 공간이 주어진 마지막 순간이다. /사진=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영상 캡처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실 승무원 박모씨는 무전기로 9시부터 9시 30분 사이에 10여 차례에 걸쳐 승객들의 퇴선여부에 대하여 조타실에 물었다. 승객들이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대에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조타실에서는 답이 없었다. 승무원 박모씨는 구조 헬기 도착을 확인한 후, 자신의 판단으로 승객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박모씨의 판단이 없었다면 세월호의 피해규모는 훨씬 커졌을 것이다.

■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 당일 Time Line (2)

▶ 8시 52분 : 탑승객인 학생의 신고가 전남소방본부에 접수되었다. 세월호는 북쪽으로 표류하기 시작한다.

▶ 8시 55분 : 세월호에서 공식적으로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에 구조요청을 했다.

▶ 8시 58분 : 해경에서 탑승객 학생의 신고를 접수했다.

▶ 9시 7분 :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는 세월호와의 교신 이후 세월호 근처를 항해하던 중국 상선 1척과 한국 상선 2척에게 세월호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상교통관제센터는 세월호 상태과 관련 주변 선박에 물어보는 등 세월호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 9시 10분 : 해양경찰청의 구조본부가 가동되었다. 해경은 목포항공대 소속 헬기와 인근 전 경비함정 16척을 현장에 출동시켰다. 구조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 9시 18분 : 세월호가 좌현으로 50도 정도 기울어졌다.

▶ 9시 23분 :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는 세월호가 선내 방송 불가로 승객들에게 퇴함 명령을 내릴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는 세월호에게 어떻게 해서든 승객 탈출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 9시 30분 : 헬기가 도착하여 6명의 승객을 구조했다. 이후 구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색구조에는 SSU, 해군 UDT/SEAL, 육군 특전사의 잠수요원들과 미 해군 와스프급 상륙모함 6번함 본홈리처드(LHD-6)이 참여했다. 민간어선 40여척 또한 구조하러 왔다. 인근 자치단체 행정선, 낚싯배, 식수공급선, 어업지도선 등 구조활동이 가능한 모든 배 또한 사고해역으로 진입했다.

▶ 10시경 : 구조 헬기를 본 선사 여직원 박모(23세) 씨가 승객들에게 탈출하라고 외쳤고, 이 때부터 대부분의 승객들이 대피하기 시작했다.

 

구조 불가능한 사고해역, 맹골수도

오전 11시 18분,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 이후에도 구조시도는 계속 되었다. 하지만 세월호가 침몰한 사고해역은 소위 맹골수도로 불리는 조류가 매우 센 곳이었다. 조류의 속도는 8kn(단위는 노트. 약 15km/h)에 이른다. 수중 시야는 20cm이다. 사고해역의 수심은 45~50m로 깊은 편이다.

깊은 수심으로 인해 잠수분들의 진입에 필수적인 것은 감압장치였다. 하지만 감압장치를 갖춘 구조선 청해진함과 평택함은 해당 시각에 각각 남해와 서해에서 작전 중이었다. 감압장치를 갖춘 구조선 2척은 17일 새벽에야 도착 가능했다. 해군은 이미 2008년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 한주호 준위 등 구조과정에서의 희생자가 발생한 경험을 지닌 상태였다. 결국 만조가 되기 전까지 세월호로 잠수부들의 진입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 세월호는 선박 증개축으로 인한 배의 안전성 부재, 당시의 무리했던 과속 항행, 화물 과적 및 관리 부실, 조타수의 급격한 방향전환 등을 원인으로 침몰했다. 세월호는 4월 16일 오전 8시 49분부터 침몰하기 시작해 2시간 29분이 지난 오전 11시 18분 완전히 침몰했다. 좌현으로 기운채 전복되어 선수 일부만 남겨둔 채 침몰했다. 사진은 2015년 3월 진도 팽목항의 모습. /사진=미디어펜

세월호는 ‘구조 불가능한’ 사고해역에, 해상교통사고나 다름없는 조타수의 실수로 전복 후 침몰한 것이다. 안개는 짙었고 화물은 과적된 상태였다. 과속하던 세월호는 변침 과정에서 스스로의 관성을 이기지 못해 중심을 잃어 기울고 결국 침몰했다. 모두 2~3시간 만에 일어난 사고였다.

■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 당일 Time Line (3)

▶ 11시 18분 : 세월호는 좌현으로 기운 채 2시간 20분 만에 완전히 전복되어 선수 일부만 남겨둔 채 침몰했다.

▶ 11시 30분 :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161명의 구조 소식을 알렸다.

▶ 12시 30분 : ‘구조자 171명’으로 발표되었다. 구조 후 병원으로 호송되었던 남성 1명은 사망했다. 단원고 2학년 정모군이었다.

▶ 13시 30분 :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는 368명이 구조되었다고 발표했다.

▶ 14시 : 1차 구조자 명단이 공개되었다. 침몰하기 직전 바다로 뛰어내리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선내방송이 계속 “위험하므로 선내에서 그대로 대기하라”라고 말했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졌다.

▶ 15시 : 해경은 기존 구조자수 집계가 중복집계로 인해 오류가 발생했음을 중대본에 통보했다.

▶ 16시 30분 : 중대본은 탑승자를 458명으로, 구조자를 164명으로 확인했다. 중대본의 집계 오류에 대해 언론과 국민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 17시 : 해경 및 해군이 수심이 낮은 선실부터 수색에 들어갔다. 수색대는 선실 3곳에 진입했다. 인적은 없었고 선실에는 물만 차있었다. 수색은 시계가 불량하고 해역의 조류가 다시 빨라짐으로 인해 곧바로 중단되었다.

▶ 18시 30분 : 사망자 1명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단원고 2학년 학생 권모군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환경공단 소속의 인양능력 2000t급 해상크레인이 진해에서 출발했다. 이틀 뒤인 18일 도착 예정.

▶ 18시 40분 : 서해지방해양경찰청장이 구조 수색 계획을 브리핑했다. 향후 수색활동 상황을 해경에서 지휘, 브리핑하기로 결정했다.

▶ 19시 20분 : 사망자 1명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 19시 40분 : 대우조선해양 소속의 인양능력 3200t급 해상크레인이 거제도에서 출발했다. 이틀 뒤인 18일 도착
예정.

▶ 20시 30분 : 삼성중공업 소속의 인양능력 3350t급 해상크레인이 거제도에서 출발했다. 이틀 뒤인 18일 도착 예정.

 

   
▲ 세월호는 선박 증개축으로 인한 배의 안전성 부재, 당시의 무리했던 과속 항행, 화물 과적 및 관리 부실, 조타수의 급격한 방향전환 등을 원인으로 침몰했다. 세월호는 4월 16일 오전 8시 49분부터 침몰하기 시작해 2시간 29분이 지난 오전 11시 18분 완전히 침몰했다. 좌현으로 기운채 전복되어 선수 일부만 남겨둔 채 침몰했다. 사진은 2015년 3월 진도 팽목항의 모습. /사진=미디어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