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원칙으로 노조천국 영국병 치유…박근혜 정부 본받아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의 서거 2주기를 기념하여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4월 8일 오전 노동정책 토론회를 개최했다. 1970년대 사회주의가 만연해 쇠락의 길을 걷던 당시 영국을 공공부문 개혁, 복지 개혁을 통해 구해낸 마거릿 대처의 개혁 정책을 되짚어봄으로써 한국의 노동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다.

발표자로 나선 박동운 교수는 대처를 "비전을 가진 정치가이자 레이건과 함께 신자유주의를 탄생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하며 "대처 전 수상이 1979년 총선에서 '사회주의를 몰아내고 노조파워를 무력화시키겠다'는 공약에 따라 구조개혁을 추진한 결과 1985년 이후 영국의 시장경제 활성화 수준은 세계적으로 상위 5개국 안팎에 들 정도로 향상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박 교수는 대처의 과단성과 끈기,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확신 등이 그녀의 정책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이었으며, 이는 2015년의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래는 박동운 교수의 발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박동운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마거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1925.10.13.∼2013.4.8.) 전 영국 총리는 구조개혁에 성공하여 사회주의에 만연(蔓延)된 1970년대의 영국을 시장경제국가로 살려낸 정치가다. 이 공로로, 대처는 초대 총리 로버트 월폴 경 이후 290여 년 동안에 배출된 57명의 총리 가운데 이름 다음에 ‘이즘’(ism·대처리즘)이 붙는 유일한 총리로 칭송받는다.

대처리즘 영향으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제2의 대처’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전 대통령은 ‘바지 입은 대처’로 불렸다. 대처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함께 ‘신자유주의’를 탄생시켜 1980년대 이후 약 30년 동안 세계인들이 풍요로운 삶을 사는 데도 기여했다. 대처는 세계를 개조한 정치가다. 4월 8일은 대처가 타계한 지 2년이 되는 날이다.

이 글의 목적은 마거릿 대처의 노동개혁을 논의하려는 데 있다. 이를 계기로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업적, 대처가 손수 밝힌 대처리즘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마거릿 대처의 생애 - 어떤 삶을 살았는가?

마거릿은 1925년 랭커셔주의 그랜덤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프렛 로버츠(Alfred Roberts)는 교사를 꿈꿨지만 가난하여 초등학교를 마치고 식료품점 점원으로 취직했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많아 후에 시장까지 역임했다.

그는 딸에게 ‘첫째는 일, 둘째는 교회, 셋째는 정치’라는 생활철학을 심어주었다. 그의 집은 사업가, 교인, 정치가들로 늘 북적거렸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마거릿은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 정치를 배웠고, 항상 정치에 매료되었다. 마거릿 대처가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의 새 주인이 되어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뒤돌아다보며 한 말은 유명하다.

"제가 승리한 것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제게 모두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시장인 아버지는 딸이 16살이 되어 재판 방청이 가능해지자 순회재판에 초청했다. 그날 마거릿은 판사 직업에 매료되었다. 마거릿이 옥스퍼드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기로(어느 자선단체가 화학을 전공하면 학비의 일부를 돕겠다고 제안했음) 입학이 결정된 직후 어느 날 아버지는 딸을 또 순회 재판에 초청했다.

재판 과정에서 감동받은 마거릿은 아버지로부터 판사를 소개받자마자 대뜸 물었다. "저는 장차 법률가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화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법률을 공부하면 늦지 않을까요?”

판사가 대답했다. “늦지 않다. 나도 케임브리지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다음에 법률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된 거야.” 마거릿은 졸업 후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 7년 만에 변호사 자격을 땄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정치에 전념했다.

마거릿은 학생회 회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통제경제를 버리고 자유경제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한 옥스퍼드 출신 하원의원들의 연설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대학생 때 하이에크가 1944년에 쓴 『노예가 되는 길』(Road to Serfdom)을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읽고 일찌감치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마거릿은 1950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보수당 최연소 후보로 하원의원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1951년 선거에서도 떨어졌다.

   
▲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의 서거 2주기를 기념하여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4월 8일 오전 노동정책 토론회를 개최했다. /사진=자유경제원 홈페이지

선거를 계기로 이혼 경력이 있는 데니스 대처를 만나 1952년에 결혼했다. 마거릿 대처는 34세 때인 1959년에 드디어 정치가 꿈을 이루었다. 선거에 참가한 지 10년 만에 하원의원에 당선된 것이다. 대처는 당선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당시 보수당 맥밀런 총리로부터 연금관련 정무차관 자리를 제의받았고, 이후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장관직을 무려 일곱 차례나 역임했다.

대처는 1975년 2월 11일 보수당 하원의원 투표에서 영국 최초의 보수당 여성 당수로 선출되었다. 그것은 우연이었고, 그 우연은 대처의 ‘절친한 정치적 친구’ 키스 조지프로부터 주어졌다. 보수당 당수가 확정적이었던 조지프는 미혼모에 관한 기자 질문에 대한 답변이 문제가 되어 도중하차했는데 대처가 그 대신 당수로 선출된 것이다.

1979년 3월 28일 하원의 급식업체가 파업에 들어갔다. 그 날 노동당 정부는 불신임투표에서 졌다. 그것도 딱 한 표 차이로! 노동당 캘러헌 총리는 총선거 실시를 선언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노동당을 누르고 정권을 잡았다. 대처는 임기 4년의 총리직을 세 번째 역임하다가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인기가 떨어져 당수로 선출될 가망이 없게 되자 스스로 정계를 떠났다. 대처는 2013년 4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회주의 몰아내고, 노조 파워 무력화”를 공약으로 내세우다

마거릿 대처는 비전을 가진 정치가다. 보수당 당수가 된 대처는 1975년 2월 런던의 한 호텔에서 보수당 상・하원의원들과 당대표들을 대상으로 당수취임 수락 연설회를 가졌다. 연설 제목은 ‘비전을 잃은 사회는 망한다’는 것이었다.

“비전이 없는 사회에서 인간은 틀림없이 망하는 법입니다. …. 과거의 영국인들이 그토록 무기력했다면 저 위대한 대영제국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모험심에 찬 항해로 인한 신대륙 발견 같은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음해 1월 대처는 자유진영과 소련과의 관계가 화해 분위기였는데도 한 연설에서 소련을 강렬하게 비난했다. 다음날 소련 신문은 대처를 ‘철의 여인(iron lady)’이라 이름 짓고 강렬하게 공격했다.

대처는 보수당 당수로서 두 가지 비전을 제시했다. 첫째, 영국을 옛 대영제국처럼 영화로운 나라로 만들고, 둘째, 영국에서 사회주의를 몰아낸다는 것이었다. 대처는 1979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면 ‘영국에서 사회주의를 몰아내고, 노조파워를 무력화시키겠다’고 공약을 제시했다. 당시 영국은 사회주의로 물들어 있었고,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이 말해주듯 노조천국이었다. 보수당 대처가 승리했다.

구조개혁을 추진하여 영국을 시장경제 국가로 바꾸다

마거릿 대처는 영국경제가 각종 규제, 법과 제도, 노조파워 등으로 경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깨달았다. 대처는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영국을 시장경제 국가로 바꾸고자 구조개혁을 단행했다. 구조개혁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작은 정부를 만들기 위해 예산을 삭감하고 정부조직을 개편하다
- 대처는 새로운 정부운용 방식, 개방적인 공무원제도를 도입하고 관료제도를 개선했다.

∙‘법과 원칙’을 적용하여 노사안정을 이룩하다
- 대처는 집권 11년 반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노동관계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고, ‘법과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하여 노조천국 영국에 노사안정을 가져왔다.

∙영국을 세계 최초의 ‘민영화 수출국가’로 만들다
- 대처는 세금 보조로 운영되던 적자투성이 공기업을 과감하게 민영화하여 성공한 결과 ‘영국을 세계 최초의 민영화 수출 국가’로 만든 정치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빅뱅(Big Bang)’으로 불린 금융개혁에 성공하다
- 대처는 개혁을 추진하면 ‘빅뱅’이 되고 말리라던 금융개혁에도 성공했다.

∙규제를 과감하게 철폐하여 기업과 경제를 살리다
- 대처가 규제개혁을 추진하여 성공한 결과 영국은 OECD 국가 가운데 규제가 가장 약한 나라가 되었다.

∙시장친화적(市場親和的) 분배정책을 실시하다
- 대처는 ‘영국병’을 치유하고 시장경제에 어울리는 분배정책을 실시했다.

∙교육 평등주의를 깨뜨리다
- 대처는 노동당 정부가 도입했던 ‘교육 평등주의’를 깨뜨리고, 교육을 전문가와 관료의 독점에서 해방시켜 부모와 학생들의 수요에 맞춰 질을 높였다.

대처는 구조개혁을 추진하여 성공했다. 대처는 뉴질랜드의 롱이 총리가 1984년에, 아일랜드의 호이 총리가 1987년에 영국처럼 구조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OECD는 1990년에 『구조개혁의 진전』이라는 보고서를 출간하여 회원국들이 영국, 뉴질랜드, 아일랜드처럼 구조개혁을 추진할 것을 권고했다. OECD가 권고한 구조개혁 내용과 방향은 경제 전반에 걸쳐 경쟁원리를 도입하여 경제를 시장경제로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대처가 구조개혁에 성공하자 이를 가까이서 지켜본 밀튼 프리드먼은 ‘구조개혁은 취임 후 최초 6개월에서 9개월간에 추진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보고, 대처, 루즈벨트, 레이건이 추진한 구조개혁을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았다.

구조개혁 성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프레이저 인스티튜트가 해마다 발표하는 ‘경제자유지수’가 이를 보여준다. ‘경제자유지수’란 시장경제 활성화 수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다. 다음은 몇몇 연도의 영국의 경제자유지수 순위다.

수치가 작을수록 경제자유도가 높다는 것을 뜻하고, 괄호 안의 수치는 조사대상 국가수를 나타낸다: 1975: 22위(109국), 1980: 34위(112개국), 1985: 12위(112개국), 1990: 19위(114개국), 1995: 7위(115개국), 2000: 4위(123개국), 2005: 5위(141개국), 2011: 12위(152개국).

이처럼 영국은 대처가 1979년부터 구조개혁을 추진한 결과 1985년 이후 영국의 시장경제 활성화 수준은 세계적으로 상위 5개국 안팎에 들 정도로 향상되었다.

대처, 레이건과 함께 신자유주의를 탄생시키다

신자유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정책이다. 신자유주의란 1930년대 대공황이 초래한 정부 개입의 타당성과 1940년대 이후에 몰아친 사회주의 열풍에 짓눌렸던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대처가 추진한 구조개혁 성공을 계기로 ‘새롭게 얻게 된’ 이름이다.

신자유주의 탄생의 주역은 구조개혁에 성공한 마거릿 대처, 작은 정부를 실현한 로널드 레이건이다. 신자유주의 기간은 마거릿 대처가 구조개혁을 추진한 1980년경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까지다. UN 자료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기간 동안 성장률, 소득 등으로 볼 때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산 것으로 나타난다.

   
▲ 신자유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정책이다. 신자유주의 탄생의 주역은 구조개혁에 성공한 마거릿 대처, 작은 정부를 실현한 로널드 레이건이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그런데 좌파들은 신자유주의가 소득불평등을 악화시켰다고 보고 대처와 레이건을 혹평한다. 그들은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신자유주의는 죽었다’고 외치면서, 금융위기는 ‘탐욕에 빠진 자본주의’ 때문에 발생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정부 역할이 더욱 강화되는 새로운 경제체제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놓고 『4.0 자본주의』를 쓴 칼레츠키는 “좌파들은 시계추를 무려 50년 뒤로 돌려 정부만능, 노조만능의 시대로 돌아가려 한다”고 지적하고, “정부만능의 2.0 자본주의(주: 1930년대부터 대처·레이건 등장까지의 기간)는 현재의 시스템(주: 대처·레이건부터 2008년 금융위기까지의 기간으로 3.0 자본주의)만큼이나 현란하게 부서졌다”며 좌파들의 주장을 일축(一蹴)했다.

대처는 2002년에 출간된 저서 『국가경영』(Statecraft)의 첫 쪽에다 이렇게 썼다.

“이 책을 로널드 레이건에게 바친다. 세계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이는 레이건이 사회주의를 붕괴시키고 냉전을 종식시켜 세계를 핵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낸 것에 대한 감사를 나타낸 말이다. 대처도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마거릿 대처는 세계를 개조한 정치가다.

대처리즘이란 무엇인가?

마거릿 대처는 1992년 9월 3∼4일 고려대가 수여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가진 ‘인촌기념강의’에서 「대처리즘에 관하여: 이념과 실제(On Thatcherism: Its Ideology and Practices)」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여기서는 이를 요약한다.

첫째, ‘내 믿음의 뿌리에는 자유(liberty)가 도덕의 본질(moral quality)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라고 대처는 말했다.

대처는 모든 개인은 각자 타고난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국가는 이들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대처리즘의 첫 번째 원칙이라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대처는 자유주의자다. 이와 관련하여 대처는 “애덤 스미스가 인식한 바와 같이, ‘국부(國富)’는 개인들의 기업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라고도 말했다.

둘째, ‘정부만이 통화안정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통화안정 조치를 취해야 하며, 정부지출과 정부차입금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습니다’라고 대처는 말했다.

인용 내용은 통화안정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치유하고, 재정지출 삭감을 통해 ‘작은 정부’를 실현하고, 그 결과 자유시장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대처의 의지를 잘 나타내 준다. ‘작은 정부’를 바탕으로 “부를 창조하는 기업에게 보다 많은 투자기회가 부여되도록 하는 중기 재정정책을 수립했습니다”라고도 대처는 말했다.

셋째, ‘우리는 기업활동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습니다’라고 대처는 말했다.

이를 위해 대처는 법인세를 줄이고, 어떤 조세는 폐지하고, 규제를 완화 또는 폐지하고, 소규모기업을 지원하고, 법 위에 노조지도자들이 군림하게 만든 노동조합의 특권을 폐지했다.

넷째, ‘나는 사람들의 자유와 독립의 보루(堡壘)로서, 또 미래 세대들의 책임감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사적소유제도가 가능한 한 폭넓게 확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라고 대처는 말했다.

그래서 대처는 국가소유제도를 사유재산제도로 되돌려 놓았다. 민영화계획은 영국의 개인주주 수를 세 배로 증가시켰고, 동시에 투자재원 부족으로 경영이 부실한 기업을 살려냄으로써 영국경제 핵심부문의 전망을 바꿔놓았다. 이와 관련하여 대처는 이렇게 말했다. “실로, 민영화정책은 영국의 가장 성공적인 수출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나는 자유로 인해서 무정부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자유는 법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freedom is the creature of law).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야수(野獸)가 될 것입니다”라고 대처는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대처는 경찰력을 증강시켰고, 사법행정을 개선했고, 폭력범죄의 형량을 높였으며, 형사법제도를 개선했다.

여섯째, ‘나는 평화는 결코 완전하게 보장되지 않으며, 새로운 독재자가 등장할 수 있고, 새로운 독재자는 유화정책을 쓰지 말고 패배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대처는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대처는 군사력을 최신화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확고하게 지지했고, 미국의 전력방위계획(SDI)을 지지했다. 대처는 또 “미국의 지도력이 자유세계에서 얼마나 핵심적인가를 항상 인식하고 있었습니다”라고도 말했다.

일곱째, ‘나는 우리나라의 헌법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영국의 주권은 영국과 유럽의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봉사해 왔습니다. 영국의 주권에 대한 침해는 저지되어야 합니다. 영국의 정치적 원칙들은 다른 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라고 대처는 말했다.

대처는 영국의 주권을 굳건하게 지켰다. 대처는 영국 헌법을 ‘자유의 권리증서’이며 ‘진리’라고 표현할 정도로 존중했다.

대처가 손수 밝힌 대처리즘의 원리, 실제, 정책 가운데서 첫째부터 다섯째까지는 자유주의 실현과 자유시장경제 활성화와 관련된다.

   
▲ 대처는 과거의 영국을 말할 때 ‘영국병’과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을 자주 인용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그런데 자유시장경제 회생을 목표로 ‘영국병’을 치유한 대처는 2002년에 출간된『국가경영(Statecraft)』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자유시장경제 철학을 밝혔다. 그 내용은 위에서 살펴본 대처리즘의 원리, 실제, 정책과 같은 것으로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자유로운 기업활동이 보장되는 자본주의가 거의 모든 곳에서 성공하고 있는데도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이상한 얘기지만 사실이다. 나는 자유로운 기업활동이 보장되는 자본주의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첫째, 사유재산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고 둘째, 사회가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셋째, 기업친화적인 문화가 있어야 하고 넷째, 경쟁관계에 있는 다양한 국가들이 있어야 하고 다섯째, 사람들의 의욕을 부추기는 조세제도와 최소한의 규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조건들이 갖춰질 때 개인들은 부를 창출한다.”

마거릿 대처의 노동개혁

1970년대의 영국은 노조가 정권을 맛대로 멋대로 바꿨을 정도로 그야말로 노조천국이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대처가 추진한 노동시장 개혁은 다른 어떤 개혁보다도 결단성 있는 개혁이었다고 생각된다. 노동시장 개혁의 핵심은 노조파워 무력화였다.

1) 노동시장 개혁: 추진배경

영국의 노사관계는 전통적으로 정부개입 없이 단체교섭을 통해 자율적으로 원만히 이루어져 왔었다. 그러다가 1970년을 전후로 영국이 노조천국이 되면서 노조의 만성적인 파업과 영국병 때문에 영국경제가 침체에 빠지게 되자 노동법 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968년 노동당 윌슨 정부(64~79)는 불시파업의 악습을 고치기 위해 노사관계 개혁입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노동조합본부인 노동조합회의(TUC)의 거센 압력을 받고 윌슨은 물러나고 말았다.

노동당 정부의 허약성을 공격하여 1970년에 정권을 잡은 보수당 히스 정부(70~74)는 윌슨 정부가 추진하려다가 실패한 노사관계개혁 입법에 성공했다. 이에 힘입어 히스 정부는 노조의 지나친 임금인상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사․정 협력관계를 추구하려고 노력하다가 노사관계개혁 입법 폐지를 요구하는 노조의 거센 저항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보수당이 무너지자 노조 편인 노동당 윌슨이 다시 집권(74~76)하게 되었다. 윌슨은 재집권을 목적으로 노조를 위한 선거공약 이행을 우선순위로 삼고 노동조합회의에 입법우선순위 결정을 요청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무렵 1차 유가파동이 일어나 실업이 증가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영국경제는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어 갔다. 윌슨은 결국 2년 만에 물러났다. 윌슨은 노동당 캘러헌에게 수상 자리를 물려주었다.

노조의 신뢰와 통제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캘러헌 정권은 인플레이션을 치유하기 위해 소득정책을 실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노조는 조합원의 임금을 소득정책에 묶어둘 수 없다고 버텼다.

노조는 높은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에 따른 노조와의 갈등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1978년 겨울 악명 높은 ‘불만의 겨울’로 불린 노조파업이 영국을 강타하게 되었다. 노동당 캘러헌 정권도 이 전국적인 파업 앞에 1979년 5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1970년대의 영국은 노조가 정권을 멋대로 맛대로 바꿀 수 있었을 정도로 그야말로 노조천국이었다.

보수당 대처는 1979년 총선거에서 ‘노조천국 극복’을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이에 힘입어 보수당 대처는 339표를 얻어 268표를 얻은 노동당을 누르고 정권을 잡았다.

대처는 이전에 노동당 윌슨 정권과 보수당 히스 정권이 노조파워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노조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더군다나 국민들도 ‘불만의 겨울’을 통해 지나친 노조파워에 식상해 있던 터라 대처는 이를 활용할 계획이었다.

대처는 집권하자마자 이전 정권에서 노조파워를 강화시키는 데 기여한 소득정책 관련 기구를 아예 없애버렸다. 이는 ‘혁명적 절차’라고까지 불린다. 이어 대처는 노조대표가 정부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마저 끊어버렸다. 그리고 대처는 노조의 위상을 낮추기 위해 노조파워 무력화 계획을 계속 발표해 갔다.

이렇게 하여 대처는 1988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고용법과 노동관계법 제정 및 개정을 추진했다. 곧 이어 알게 되겠지만 대처의 이와 같은 의지는 노조파워를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대처는 참으로 결단성 있는 정치지도자다. 1979년 당시 소련 정치가들이 대처를 ‘철의 여인’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를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2) 노동시장 개혁: 노조활동을 ‘법의 지배’로 묶다

하이에크는 시장경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제를 ‘법의 지배’ 안에 가둬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호사 경력을 가진 대처는 그 막강하던 노조파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조를 ‘법의 지배’ 안에 가둬두는 데 성공했다. 대처는 다섯 차례나 노동관계법을 제정하고 개정하면서 결국 노조파워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1) 1980년 고용법 제정

대처는 집권하자마자 노조 무력화 계획을 세워 다음 해에 고용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서는 세 가지 내용이 등장한다.

첫째, 클로즈드 샵(closed shop) 제도의 지나친 보호조항을 개정한 것이다. 클로즈드 샵 제도란 노조에 가입한 근로자만이 사원이 될 수 있고, 탈퇴하면 사원 자격을 잃게되는 최강성(最强性) 노조조직제도이다.

둘째, 2차 피켓팅(picketing)을 불법화한 것이다. 2차 피켓팅이란 노사분쟁의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참여하는 동정(同情)피켓팅 또는 동정파업을 말한다.

셋째, 2차 파업을 주도한 노조간부에 대한 면책특권을 삭제한 것이다. 2차 파업이란 직접적인 고용관계를 갖지 않은 다른 조합의 분규나 정치적 목적을 가진 분규를 말하는데 이를 주동한 노조간부는 그동안 면책특권이 적용되어 왔었다. 대처는 이 조항을 과감하게 삭제해 버렸다. 이는 노조파업을 ‘법의 지배’ 안에 가둬둔 대처의 첫 결단이었다.

(2) 1982년 고용법 개정

대처는 집권 다음 해인 1980년에 제정한 고용법을 개정했다. 1982년의 고용법 개정을 통해 대처는 노조의 특권을 더욱 무력화시켰다. 대처는 노조원들로 하여금 5년마다 비밀투표를 통해 클로즈드샵 유지 여부를 결정하게 하고, 노사분규 대상을 명문화하게 하고, 노조간부의 면책특권을 더욱 제한했다.

(3) 1984년 고용법 개정

대처는 1980년에 제정하고 1982년에 개정한 고용법을 2년 후에 다시 개정했다. 1984년의 고용법 개정을 통해 대처는 노동조합의 면책특권을 약화시키고, 고용주의 명령권을 강화시켰다.

(4) 1984년 노동조합법 개정

대처는 노동조합법을 개정하여 조합원들로 하여금 사전 비밀투표를 통해 파업 여부를 결정하게 하고, 조합원의 과반수 지지를 얻은 파업의 경우에만 노조의 면책특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또 노조간부는 5년마다 비밀투표를 통해 선출하도록 했다.

(5) 1988년 고용법 개정

1988년 개정을 통해 노조는 악명 높던 클로즈드샵에 대한 법적 보호규정을 삭제해 버리고 노조에 반대할 수 있는 개별근로자의 권리를 확대했다. 대단한 내용이다.

이들 내용 가운데 일부는 2003년 8월 노무현 정부에서 산자부가 제기한 소위 ‘사용자 대항권(對抗權)’으로 알려진 ‘노동관계법·제도 선진화 과제’에 포함되어 있다.

3) 노동시장 개혁: 노조와 1년간 싸워 이기다

대처가 구조개혁 과정에서 노조파워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무력하게 만들었는가는 참으로 흥미롭다.

1983년 6월 선거에서 대폭적인 지지를 얻은 대처는 1기에 마무리 짓지 못한 정책과제들을 손대기 시작했다. 이는 노조대책, 국영기업 민영화, 공영주택 불하, 조세체계 간소화와 세율 인하, 교육제도 개혁 등이다. 이 가운데서 대처가 석탄노조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겼고, 이를 계기로 영국의 노조를 얼마나 무력하게 만들었는가를 보자.

그런데 대처는 과거의 영국을 말할 때 ‘영국병’과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을 자주 인용했다. ‘불만의 겨울’이란 대처가 집권하기 직전 캘러헌 정권 시절인 1978년 말부터 1979년 초에 걸쳐 자동차·운수·병원·청소노조의 장기파업으로 런던 거리가 쓰레기와 악취로 가득 찼고, 노인들은 겨울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불안에 떨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처는 노조와 맞서 싸울 계획을 미리 세웠던 것 같다.

   
▲ 대처는 석탄노조 파업이 장기화하리라고 예상하여 석탄을 몰래 수입해 놓는 등 대비책을 철저하게 마련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대처가 집권한지 5년쯤 지난 1984년 3월 6일 석탄노조는 파업에 들어갔다. 같은 날 국영석탄공사 맥그리거 총재가 대처의 구조개혁의 일환으로 1985년 중에 채산이 맞지 않은 탄광 약 20개소를 폐쇄·통합하고 직원 2만 명을 감원한다는 계획을 노조측에 제시한 것이 파업의 발단이었다.

당시 영국의 국영석탄공사는 1946년에 국영화된 이후 노조의 발언권이 강화되었고, 무사안일의 무책임한 경영이 만연해 있었다. 석탄노조는 정부의 조치에 반대하여 곧바로 파업에 들어갔다. 대처는 석탄노조 파업이 장기화하리라고 예상하여 석탄을 몰래 수입해 놓는 등 대비책을 철저하게 마련했다.

그런데 이 파업은 구조개혁에 대한 반대를 넘어 대처의 정치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라는 것을 대처나 노조위원장 스카길(Arthur Scargill)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었다.

스카길은 2회에 걸쳐 파업권 확립을 요구하는 노조원들의 투표를 실시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그는 각 지부가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는 전국적 파업 전술을 채택했다. 그런데 생산성이 높은 주(州)의 탄광 노조원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탄광노조 17만 명 가운데 약 5만 명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 결과 석탄노조가 363일 동안 끌어오던 파업은 1985년 3월 3일 스카길 위원장이 “여러분, 투쟁은 물론 계속합니다. 그러나 파업은 끝입니다”라는 선언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스카길은 1974년 전국탄광파업을 통해 당시 보수당 히스 정권을 무너뜨린 ‘제왕’ 같은 노조위원장이었다. 그러한 그가 ‘철의 여인’ 대처 수상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대처는 집권 초기부터 노조파워를 무력화시키고자 노력했다. 앞에서 보여준 대로, 대처는 법과 원칙으로 노조에 대항하기 위해 1980년에 고용법을 제정한 후 고용법과 노동조합법을 다섯 차례 이상 개정했다.

몇 가지 내용을 보자. 클로즈드샾 제도의 지나친 보호조항을 개정했고, 2차 파업을 주도한 노조간부에 대한 면책조항을 삭제했고, 클로즈드샾 제도와 노조의 면책특권을 더욱 약화시켰고, 노조파업 때 사전투표를 의무화시켰으며, 결국에는 노조의 면책특권마저 완전 박탈함으로써 노조파워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4) 노동시장 개혁: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다

대처의 노동시장 개혁의 성과는 노동시장 유연성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노동시장 유연성과 관련된 몇 가지 지표를 사용하여 노동시장 개혁의 성과를 다룬다.

(1) 노조조직률

노조조직률이 노조파워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어는 정도는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노동시장 유연성과 관련하여 노조조직률을 살펴보자.

대처의 노조개혁은 1979년에 1,330만 명에 달하던 노조조합원 수를 1983년에 15%나 감소시켰다. 1985년에 영국의 노조조직률은 50.5%로서 세계에서 가장 높지 않았나 생각된다.

같은 해 노조조직률은 미국 18.0%, 독일 39.8%, 일본 28.9%, 호주 약 45%, 대만 32.5%, 한국 12.4%였다. 그런데 영국의 노조조직률은 대처의 임기가 끝난 1990년에는 43.4%로 감소했고, 뒤이어 보수당 메이저와 노동당 블레어 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00년에는 15년 전보다 무려 31% 포인트 감소한 29.5%로 낮아졌다. 모든 나라에서 노조조직률은 빠르게 감소해 왔는데 영국의 감소폭은 가장 크다. 영국의 노조조직률은 2012년 26.0%다.

(2) 고용패턴

영국정부는 대처 이후 파견근로제, 탄력근로제, 파트타임근로제, 계약고용 등 근로형태의 다양화를 권장해 왔다. 이 결과 영국의 고용패턴은 미국처럼 다양하다.

(3) 고용보호가 가장 약한 나라

OECD가 발표하는 ‘고용보호’(employment protection)를 보자. 영국은 OECD 국가 가운데 고용보호가 약하기로 미국에 이어 2위다. 고용보호가 약한 순서대로 쓰면, 미국,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아일랜드다. 고용보호가 약하다는 것은 해고가 쉽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영국 노동시장은 유연하다. 영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서 고용보호가 가장 약한 나라다. OECD는 회원국들의 고용보호 순위를 매겼는데 영국은 정규직 보호에서는 27개국 가운데 미국 다음으로 약하지만 정규직, 임시직, 집단해고를 포함한 평균 수준에서는 미국을 제치고 가장 약한 나라다. 1970년대에 노조천국이었던 영국이 대처의 노동시장 개혁의 결과 1990년대 말에는 고용보호가 가장 약한 나라로 바뀌게 된 것이다.

(4) 높은 경제자유도

프레이저 인스티튜트가 발표하는 ‘노동시장 규제 관련 경제자유’(economic freedom related to labor market regulation)를 보자. 이는 ‘최저임금, 채용·해고 규제, 중앙집권적 단체협상, 채용비용, 해고비용, 징집(徵集) 유무(有無)’ 6개 항목을 바탕으로 평가된다.

‘노동시장 규제 관련 경제자유’로 평가할 때 노동시장 규제가 약하기로 홍콩, 피지, 우간다 같은 국가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몇몇 나라를 제외하면, 영국은 거의 해마다 미국, 뉴질랜드, 캐나다, 스위스, 일본, 아일랜드 순이다.

5) 노동시장 개혁: 어떻게 성공했는가?

대처가 추진한 구조개혁 가운데 노동시장 개혁이 가장 힘든 개혁이었다고 생각된다. 대처는 정권도 갈아치울 만큼 막강한 파워를 가진 공룡 같은 노조조직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대처는 이전에 세 명의 수상이 직접, 간접으로 노조와의 갈등 때문에 권좌에서 물러난 것을 보았다. 대처가 1975년에 보수당 당수로 있을 때 데땅뜨 분위기를 어지럽힌다고 소련을 비난하자 소련은 대처를 ‘철의 여인’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노조와의 싸움에서 성공한 대처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1) 과단성(果斷性)을 갖고 추진했다

대처의 생애 얘기에서 읽었듯이, 대처는 과단성 있는 사람이다. 옥스퍼드 진학 얘기, 화학도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얘기, 24세에 하원의원에 출마한 얘기, 히스에 도전한 얘기 등이 이를 잘 말해준다. 대처의 과단성은 노조파워 무력화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관련된 예를 든다.

대처는 1979년 5월에 정권이 출범하고 6월에 노조대표들과 상견례를 가졌다. 이는 대처 이전 수상들이 채택했던 ‘사회적 합의주의’에 의한 관례였다. 그런데 대처는 이 모임에서 소득정책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고, 모임 후에는 그 흔한 공동성명 하나 발표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다음 달 모임에 관해서는 언질도 주지 않았다.

노조대표만 멋쩍게 되고 말았다. 이어 대처는 노조의 위상을 낮추기 위해 노조를 비판하는 정책을 계속 발표해갔다. 이 결과 영국경제를 오래 동안 옥죄어 왔던 사회적 합의주의가 파기되었다. 대처의 과단성―참으로 대단하다.

(2) 끈기 있게 추진했다

대처는 효율성을 높이고자 1984년 초 탄광 20개소의 폐쇄·통합에 관한 구조개혁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석탄노조가 파업에 들어갔다. 대처는 석탄노조의 파업을 자신의 정치철학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전쟁을 벌일 계획으로 석탄을 몰래 수입해 놓는 등 만반의 대비책을 마련했다.

석탄노조파업은 1984년 3월 5일에 시작해서 다음해 3월 3일에 끝났다. 363일간의 싸움이었다. 대처는 노조와의 싸움을 끈기 있게 이끌어갔다. 보수당 히스를 권좌에서 몰아냈던 노조위원장 스카길도 대처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항복하고 말았다. 대처는 그야말로 ‘철의 여인’이다.

(3) 원칙을 지켰다

대처는 구조개혁에서 원칙을 세워 문제를 ‘법의 지배’ 아래 묶어놓고 풀어갔다. 하이에크는 시장경제가 살아나려면 경제를 ‘법의 지배’ 아래 묶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이에크를 신봉한 대처는 이를 지켰다. 변호사 경력을 가진 대처는 ‘법의 지배’를 철저하게 실천한 정치지도자다.

(4)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대처는 1992년 고려대 강연과 2002년에 출간된 『국가경영』에서 밝혔듯이, 자유시장경제로 바꿔져야만 영국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대처는 당시 사회주의로 물든 영국에서 기업이 일하도록 구조개혁을 추진했다. 그가 한국에 와서 한 연설 가운데 다음과 같은 표현은 그가 기업 활동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보여준다.

“성공의 비결은 기업이라는 한 단어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The secret of success is the one word, the firm.). 이를 위해 대처는 노조파워 무력화가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고, 결국 노동개혁에 성공했다.

6) 노동시장 개혁: 한국에 주는 교훈

대규모 정리해고가 발단이 된 ‘한진중공업 노조파업’이 2011년 6월 27일 타결되었다. 사측 정리해고 방침에 맞서 노조가 2010년 12월 20일 총파업에 들어간 지 189일 만의 타결이었다.

타결의 실마리는 ‘무노동·무임금’ 원칙 고수, 불법 점거에 대한 공권력 투입 가능성, 노조원에 대한 법원의 조선소 출입금지 결정 등 ‘파업에 대한 원칙적 대응’에 있었다. 타결 후 노사갈등 과정에서 빚어진 온갖 고소 및 고발 사건은 노사 간에 모두 취소되었다.

한진중 노조파업 타결은 ‘노조의 불법 파업’은 법과 원칙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준 사건이다. 한국은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에서 ‘파업공화국’이라는 악명을 떨쳤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16대 대선에서 ‘한국노조는 사용자에 비해 힘이 약하다’고 말함으로써 노조 편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를 계기로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한국은 삽시간에 파업공화국이 되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노사분규 발생건수, 참가자수, 근로손실일수는 김영삼 정부에 비해 각각 무려 3~4배 이상이나 증가했다. 왜 그랬을까? 노무현 정부가 노조파업이 불법인 경우에도 ‘법과 원칙으로 대응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에서 ‘법치’가 지켜지지 않으면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시장경제는 ‘법치’를 주요 원리로 내세운다. 이와 관련하여 마거릿 대처는 이렇게 썼다―“나는 자유로 인해 무정부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자유는 법에 의해 만들어진다(freedom is the creature of law).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야수(野獸)가 될 것이다.” 이처럼 자유는 법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노사갈등은 반드시 ‘법과 원칙의 대응’으로 풀어야 한다. 한진중 노조파업에서 타결의 실마리가 된 ‘무노동·무임금’ 원칙 고수 같은 ‘법과 원칙의 대응’, 마거릿 대처의 법과 원칙에 근거한 노동개혁은 앞으로 노사분규 타결에서 지침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경제 회생을 위한 처방으로 노동개혁을 제시했다. 노동개혁이 성공하지 않으면 한국경제는 미래가 없다. 나는 한국의 노동개혁의 핵심내용은 이중구조 개선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개선하려면 ‘노동계가 고수하려는 정규직과보호와 연공급 임금체계’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노동개혁에 성공하려면 마거릿 대처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박동운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