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최상진 기자] 글쓰는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벌써 15년도 더 흐른 이야기다. 공부보다 글쓰는게 좋았지만 결코 꿈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글이 삶이 되고, 그 삶을 직업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학교에서는 직업을 꿈이라 가르쳤다. 모든 학생들이 꿈과 장래희망을 동일시했고, 이들 용어는 언제나 직업을 지칭했다. 대통령부터 과학자, 의사, 선생님, 소방관…. 친구들의 장래희망은 무조건 직업이어야 했다.

포로수용소에서 탭댄스에 빠져 비오듯 땀을 흘리는 소년은 문득 그 시절 내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야간자율학습시간에 공부 안한다며 맞아가면서도 글을 쓰고 수필집을 읽던 시절, 그냥 내가 좋은걸 하고 싶던 시절 생각에 울컥했다. 무언가에 푹 빠져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옛 모습이 눈앞에 스친건 다른 관객도 마찬가지였으리라….

   
▲ 뮤지컬 '로기수' 공연장면 / 사진= ㈜아이엠컬처

‘로기수’는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배경이다. 공산진영 포로의 지도부인 형을 둔 소년이 탭댄스를 통해 처름으로 자신의 삶을 꿈꾸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소년의 순수한 열정에 비극적인 시대배경을 덧붙였으나 유쾌한 주변인물을 통해 어둡게만 비쳐질 수 있는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초연인 만큼 이야기전개가 다소 산만하고, 넘버들이 단조롭다는건 상당한 흠이다. 과도하게 밝은 포로수용소의 분위기도 갈등을 고조시키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전체적으로 완급조절이 덜 된 느낌이다.

그러나 탭댄스만큼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초반부터 커튼콜까지 전체적인 분위기를 주도하는 탭댄스는 찌든 스트레스를 단숨에 날려버린다. 아니 로기수가 탭댄스를 꿈으로 여기기 전까지 그랬다. 탭댄스가 삶이 되고 꿈이 되면 그와 동화된 관객들은 추억에, 그리고 발끝에서 터져나오는 열정에 젖기 시작한다.

하이라이트인 1막 마지막 부분에서 감동은 최대화된다. 동료들과 함께 춤추던 로기수가 공중으로 치솟는 순간, 춤으로 전달되는 환희와 희망의 판타지는 극대화된다. 뮤지컬을 ‘순간의 기억’의 예술이라 칭한다면 이 장면은 두고두고 관객들에게 회자될 가능성이 높다.

   
▲ 뮤지컬 '로기수' 공연장면 / 사진= ㈜아이엠컬처

극장을 나온 뒤 작품을 어떻게 평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구조에 대한 비판과 장면에 대한 찬사만으로 이 작품을 이야기하는건 알맹이를 빼놓은 느낌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15년 전 처음으로 글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을 만나고서야 로기수의 꿈이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신설학교 신문반 아이들에게 짧은 강의를 하고 돌아오는 길, 꿈과 직업 그리고 공부를 연결지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한 것이 떠올라 무릎을 쳤다. 춤추는 로기수의 환희에 찬 얼굴이 문득 스치자 아이들에게 괜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나온 ‘그저 그런 아저씨’가 된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로기수’가 말하는 꿈과 우리 사회가 말하는 꿈은 극과 극이다. 초등학교부터 성적에 취업에 결혼에 돈에 얽매여 살아가는 청년들의 꿈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이 만들어놓은 기준’이라는 사실을 로기수는 춤을 통해 강조한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잘 안다. 9급 공무원 경쟁률이 50대1이 넘어서는 시대, 자신의 꿈이라고 믿었던 직업을 얻는다 해도 목표가 사라져 허탈해지는 시대다. 진짜 꿈은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는 어른들에게 로기수는 자신의 열정과 희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내면의 힘을 북돋는다. 딱 따닥 따다닥 하는 발끝에서 흘러나와 귓가를 때리는 탭댄스와 함께….

   
▲ 뮤지컬 '로기수' 공연장면 / 사진= ㈜아이엠컬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