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오랜 ‘정부 있는 무정부 상태’ 벗어나려면

   
▲ 조우석 논설위원
“2공화국의 장면 정부 때 데모로 날을 새우고 어수선했다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더 심한 것 같지 않아요? 걱정입니다.”

사회중진 한 분이 착잡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던 게 불과 1주일 전이다. 지지부진한 공무원연금 등 각종 개혁, 세월호 침몰 1주기를 앞둔 뒤숭숭한 분위기, 북핵(北核)과 사드 논란, 여기에 지난 주 우리 귀를 의심케 했던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이 안겨준 충격파 때문에 그런 자탄이 나왔다.

평등주의 이념에 매몰된 여의도 정치권이 특권경제 청산이란 낡은 깃발 아래 공멸(共滅)의 눈먼 행진을 작정한다면, 앞날이 어찌 될까하는 걱정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으로 전전긍긍하던 차에 주말을 기점으로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메가톤급의 성완종 리스트 충격파다.

정치권의 패닉과 뒤이은 난타전은 상시적 정쟁(政爭)의 나라인 한국사회가 급기야 총체적 지리멸렬의 국면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조급하게 추진했던 기획 사정(司正) 하나가 엉뚱한 부메랑으로 돌아와 정치와 경제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로 발전한 양상이다.

대선 불법자금 수사 등 대형 게이트로 번질 가능성도

상황은 급박하다. 14일 여당은 이완구 총리의 직무정지 여부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게 결정될 경우 재임 중인 현직 총리가 검찰에 출두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국정운영에 차질이 불가피해진다.

여야 대권주자들의 명운도 갈린다. 포퓰리즘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던 유력정치인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당장 기업자금 1억 수수설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더 떨고 있는 건 야당인데, 문재인 대표야말로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꽤 높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노무현 정부 시절 특별사면 두 차례를 받았고, 당시 문재인은 청와대 비서실장과 민정수석이 아니었던가 중요한 건 몇몇 정치인의 진퇴 문제가 아니다. 성완종 게이트가 중장기적으로 어떻게 될까?

단기적으론 이렇다. 리스트에 올라 있는 정치인들은 자금수수를 부인하고 있어 결정적 증거 없이는 소모적 공방으로 질질 끌 공산이 없지 않다. 대선 불법자금 수사 등 대형 게이트로 번질 가능성도 전혀 배제 못한다. 당사자들이 돈을 당과 선거에 썼다고 할 경우 대선자금 수사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성완종 전 회장이 지난 11년 간 여야 정치인 면담 날짜와 시간, 장소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비망록(‘성완종 다이어리’)을 남겼다는데, 그 뚜껑이 완전히 열릴 경우 상황은 예단 못할 방향으로 줄달음질 칠 가능성도 높다.

어떻게 발전하건 가뜩이나 집권 후반부에 접어든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을 가속화시킬 가능성은 불문가지다. 외교·국방의 난제(難題)를 안고 경제의 침체에서 벗어나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이 무슨 난맥상인가?

   
▲ 성완종 게이트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우리 정치가 표류를 넘어 ‘정부 있는 무정부 상태’를 반복하는 위기를 돌파하는 묘수는 박근혜 대통령의 과감한 특검 수용 결단이다./연합뉴스 TV 캡처
그렇다면 이게 국가적 위기로 커지기 전에 잘라주는 선제적 결단이 필요하다. 첫 수순은 대통령의 과감한 특검 수용이다. 지금의 검찰 수사가 비리의 전모를 밝혀낸다 해도 국민적 의혹이 가셔질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남은 방법은 정면돌파밖에 길이 없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13일 원내대표 연설에서 밝힌대로 상설특검법에 따라 야당이 추천하는 특별검사를 박 대통령이 조건 없이 수용하는 게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순이다. 특검을 통해 진실을 가려달라고 스스로 나서는 게 돈 문제에 대해서는 호랑이처럼 엄격하다는 박 대통령다운 스타일이 아닐까?

대통령이 특검을 통해 진실 가려달라고 나서야

실은 여론도 그쪽인데, 측근의 불법자금 수수가 사실로 확인될 경우 적지 않은 정치적 상처를 입겠지만, 덮으려 한다는 인상을 줄 경우 불어 닥칠 정치불신의 후폭풍을 생각해야 한다. ‘특검 수용 그 이후’도 중요한데, 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남은 임기 3년을 허송세월하지 않고, 취임 때 내걸었던 국정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작금의 총체적 지리멸렬을 바로 잡으려면 무엇이 요구될까? 구체적으로 한국정치 특유의 상시적 정쟁(政爭)과 내출혈의 구조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누가 이 사안에 대해 똑 떨어진 모범답안의 해법을 내놓을까? 한국사회의 총체적 지혜가 총동원이 된다해도 그걸 마련하기 쉽지 않은 상황인데, 내 경우 양동안(70)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에게 전화를 드려 고견을 구했다.

그에게 의견을 구한 건 당연하다. 섣부른 좌파와 기회주의적 우파 지식인들이 예전에 그를 극우라고 지적했지만, 요즘 그렇게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1980년대 중후반, 즉 87년 체제 이후 한국사회가 벌써 ‘정부 있는 무정부 상태’로 진입했고, 그 흐름이 지금 사회혼란의 뿌리라고 내다본 그의 통찰이 요즘 새삼 주목받고 있지 않은가?

그는 두 가지 안을 내놨다. 첫째 한국정치의 오랜 유습(遺習)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87년 체제 이후 이른바 좌파 민주화세력에 아부를 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견지한 이후부터 현저하게 뚝 떨어져왔던 정부여당의 통제능력을 확실하게 끌어올릴 것, 그리고 당리당략에 몰두하는 야당이 좌파와 선을 그으며 거듭 태어날 것 등이 오랜 유습 정치의 골자다.

그렇다고 상황이 바꿀 수 있을까? 된다. 20~30년 전과 또 달리 우리사회에 건전 애국역량이 크게 보강된 상황에서 기회주의적 여당과, 모리배 같은 야당만 중심을 잡아줘도 사회혼란은 꽤 막을 수 있다는 게 양 교수의 의견이다. 둘째로 그는 무엇보다 인사정책을 포함한 대통령의 국정운영방식 변화를 요구했다.

“지금으로선 탕평책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예요. 대통령의 주변에 소신있고 뚝심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잖습니까? 지금까지 살펴보면 대부분 대통령 앞에 고분고분한 사람들뿐인데, 그걸론 안됩니다. 필요에 따라 사납게 돌파할 수 있는 전사형으로 보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말도 이른바 묘수풀이는 아니다. 그건 대한민국 살리기의 큰 원칙이다. 동시에 양 교수가 예전 저술 <한국의 정치현실>, <민주화와 위기> 등에서 반복했던 말이기도 하다. 우리 정치가 표류를 넘어 ‘정부 있는 무정부 상태’를 반복하는 위기 상황 속에서 새삼 경청해본 지혜일 뿐이다. 대통령의 결단과 변화를 기대한다. /조우석 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