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최상진 기자] 3년 전 그녀와의 첫 만남도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인터뷰 도중 질문지를 덮어버릴 만큼 수다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오갔던 기억이 난다. 분장시간을 훌쩍 넘기면서까지 꼬리를 물던 이야기는 다음을, 또 다음을 기약했고,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오랜시간 바라본 이혜경은 캐릭터의 감정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배우였다. ‘맨오브라만차’의 알돈자, ‘두 도시 이야기’의 마담 드파르지, ‘요셉 어메이징’의 나레이터, 그리고 ‘아가사’의 아가사 크리스티까지 그녀의 연기는 머리보다 가슴으로 캐릭터에 먼저 빠져들게 만들었다.

   
▲ 사진=아시아브릿지컨텐츠

‘오페라의 유령’ 초대 크리스틴으로, 혹은 스테디셀러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초연 롯데로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그녀는 과거를 “앞만보며 내가 누군지 모르고 달려가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반면 최근 두드러진 연기변신은 ‘즐기는 마음과 여유’에 기인한다. 풋풋했던 뮤지컬계 신데렐라는 이제 온 배우들과 스태프의 이름을 줄줄 외며 티타임을 즐기는 ‘마당발 마담’이 됐다.

덜컥 ‘아가사’의 출연제의를 수락한 계기도 지나온 삶의 궤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가사의 캐릭터를 두고 ‘도전’이라고 설명했다. 실존인물의 밝혀지지 않은 시간을 추적하는데 상상력을 총동원하며 아주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초연에 배해선, 양소민 배우가 너무 잘해서 출연을 신중하게 고민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창작극이고, 음악도 매력적인 만큼 도전해볼만한 작품이라고 판단했죠. 배우가 도전을 피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연습실에 왔는데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오히려 행복해졌어요. 지금은 배우, 스태프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기는 분위기에요”

   
▲ 사진=아시아브릿지컨텐츠

아가사 크리스티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병원 약국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독을 이용한 트릭을 주로 창작해냈다. 연구에 따르면 그녀가 집필한 66개 장편 중 독살이 등장하는 작품은 34편, 독살 피해자는 62명에 달한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과 달리 잔혹한 살인장면을 서술하는건 기피했다.

“아가사는 정의로운 여자에요. 세상은 완벽하지 않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악(惡)인 살인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 그녀도 평생 건맨이라는 남자가 등장하는 꿈에 시달려요. 자신이 그런 상황인데 추리소설을 쓰면서 정작 잔인한 죽음의 순간을 내손으로 쓰기란 힘들었겠죠”

이혜경은 작품의 배경이 된 1926년 10일간의 아가사 실종사건도 ‘정의’와 관련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모친의 사망, 남편의 불륜 등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자신을 조여오는 사람들을 정말 죽여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그녀의 분석에 상당부분 공감했다.

“저는 잠들기 직전 수만가지를 상상하고는 해요. 천재 작가인 아가사는 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 그녀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위배되는 상황이 겹겹이 쌓였다면 1926년 10일간의 실종과 같은 사건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료를 찾아보니 실종된 열흘간의 행적을 두고 ‘정말 죽으려 했다, 깜짝 놀라봐라, 사고를 당했다’는 온갖 설이 많아요. 그녀가 끝내 답을 내놓지 않았기에 우리도 이런 작품을 만들고 있는 거잖아요. 개인적으로는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반 미친 상태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 사진=아시아브릿지컨텐츠

초연은 아가사와 로이를 사랑의 틀로 묶었던데 반해 재연은 아가사의 내면에 집중한다. 뮤지컬 마니아들은 이같은 설정변화에 대한 호불호를 보이기도 한다.

초연당시 건맨을 확장시킨 가상의 인물인 ‘로이’를 연기한 박인배는 이를 ‘개인적 욕망’에 가깝다고 표현한 바 있다. 엔터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로이는 마약같은 존재다. 해방감을 주기도 하면서 중독되면 위험한 존재”라며 “누구나 마음속에 로이가 있다. 그걸 정직하게 대면하고 인정하는 부분이 어려운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번 공연에서 아가사와 로이의 관계는 ‘내 안의 나’로 설명할 수 있어요. 여자 지킬앤하이드처럼 해보자며 상상의 나래를 폈죠. 로이는 마지막에 ‘네 안에 있을 것’이라며 사라져요. 사라져도 내 안에 살아있는 셈이죠. 하지만 그와 열흘을 보낸 후 아가사는 확연히 달라져요. 사랑도 진하게 하고, 인생을 즐기며 조금은 다른 나로 살아가죠. ‘또다른 나’와의 만남이 그녀를 정의의 틀에서 해방시킨 거라고 생각해요.”

‘아가사’는 액자식 구성의 작품이다. 표절논란으로 벼랑 끝에 놓인 작가 레이먼드의 눈과 귀, 그리고 기억을 통해 ‘아가사 크리스티 실종사건’의 진실에 근접해간다. 과거의 흔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레이먼드를 통해 작품은 ‘당신의 삶을 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아가사의 실종은 이를 위한 소재로 쓰인 셈이다.

“순수했던 레이먼드는 어른들에게 이용당해 결국 아가사를 궁지에 몰아넣어요. 이를 알게되자 고통스러워하며 기억을 잃었던 그에게 아가사는 극 후반부에 ‘네 잘못이 아니야’라며 위로하죠. 이 대사는 제가 넣은 거에요. ‘이제는 너의 이야기를 써, 내가 너의 그릇이 되어줄게’라는 의미죠.”

   
▲ 사진=아시아브릿지컨텐츠

공연이 거듭될수록 아가사와의 동질감은 깊어졌다. 지독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꼭 안성맞춤인 작품이기에 본인도 휴가(?)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김혜자 선생님이 1년동안 휴가를 받잖아요. 저도 더 나이들기 전에 경험해보고 싶어요. 아가사도 10일간의 실종 뒤 삶이 완번히 변했잖아요. 뜨겁게 사랑하고, 여행하고, 글쓰고….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뜨겁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들어 부쩍 늘었어요.”

“아가사 크리스티는 참 멋진 여자 같아요. 그런 여자를 연기하고 있다는게 참 좋아요. 특히 사실(10일간의 실종)에 기인하지만 그에 대한 답이 없는 만큼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도 되잖아요. 상상에 또 상상력을 더하고, 이를 무대에서 보여드릴 수 있어서 요즘은 정말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