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민주정체 위협 치명적인 요인은 민중선동가들의 무절제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62)-개인의 창의와 탁월성을 진작하라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정치학>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조건은 어떤 것일까? 국가의 본질적 의미와 기능, 국민 행복을 위한 이상적 정체(政體)에 대해 고민했던 이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이다. 그의 <정치학(Politika)>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만의 창조적 사유를 통해 국가의 형성과 바람직한 국가형태, 통치의 기술과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고대 세계의 학문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학문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공동체의 본질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한다. 국가는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의 결합으로서 본성상 존재하기 마련이며, 가정과 개인에 우선한다. 전체는 필연적으로 부분에 우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급자족이 국가의 본질이며, 국가형성은 정의 실현의 전제라고 말한다. 인간은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과 정의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 될 수 있기에 국가가 정의로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 줄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국가를 형성하는 가족관계, 가사 관리, 노예제도 등에 대해서도 그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보았다. 나아가 각자의 본성에 맞는 역할과 그에 수반되는 정도의 탁월함을 갖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정의의 대리자로서의 국가를 상정하고 각자의 자질과 특성이 잘 발휘되는 국가가 번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국가의 역할이 개인의 창의성과 탁월성이 진작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재산 획득의 방법에 있어 그는 물물교환과 상업을 통한 화폐의 증식은 바람직하지만, 고리대금은 화폐 자체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기에 자연에 배치된다고 보았다. 이는 생산물과 교역 그 자체를 중시하던 고대 경제의 특성을 반영한다. 금융경제가 만개한 현대적 기준으로 보아서는 안 될 부분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흉상
통치자들은 가족과 재산을 버려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의견을 달리했던 ‘처자 공유제’ 논란은 흥미롭다. 플라톤은 통치자 그룹의 처자와 재산을 공유함으로써 하나의 통일체가 되는 것이 최선이라는 과격한 주장을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는 본성적으로 복합체이므로 가정과 개인이 통일체의 주체가 되어갈수록 결국 국가는 파괴되고 만다고 반박한다. 통치자들의 겸애를 극대화하기 위해 지나치게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사실 플라톤의 처자공유 주장의 핵심 취지는 통치자들의 사유의 탐욕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치지도자는 자신의 가족과 재산에 연연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성과 배치되는 그러한 주장의 허점을 지적한 것이다.

처자와 재산의 공유를 통해 ‘모두’의 것이 되면, ‘누구의 것’도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상 공유재산보다 사유재산에 더 애착을 갖게 되므로 공유재산이 되면, 개인적 보살핌을 덜 받게 되고, 부자, 부부, 형제 간에 진정한 우애와 유대감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유 목초지의 비극’을 정확히 인식한 셈이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유제도가 인간 본성이 사유재산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앗아가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성에 맞는 제도와 사유재산의 보장이 가져오는 사회적 편익을 간파했던 것이다.

   
▲ 소아시아 고대 도시 아소스(현재 터키의 에게 해 연안 베흐람칼레) 유적지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동상,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때 아테네를 떠나 아소스에 머물려 그의 철학을 전파했다. ⓒ박경귀
민주정체를 위협하는 선동가를 경계하라

국가의 정체에 대해서도 두 거두는 견해를 달리했다. 플라톤은 <법률>에서 민주정과 참주정의 혼합정체를 최선의 정체(政體)로 주장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산이 많은 계급이 주도하는 과두정체로 변질될 여지가 많다며 비판한다. 플라톤이 이상적 국가에 대해 관념적으로 접근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의 여러 정체의 생성과 변화에 대한 관찰, 제기된 다양한 정체의 현실적 적합성 검토를 통한 여러 정체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최선의 정체(政體)는 무엇일까? 그는 정체의 올바른 형태를 왕정, 귀족정체, 혼합정체의 세 가지로 보았다. 나아가 왕정이 왜곡된 참주정체, 귀족정체가 왜곡된 과두정체, 혼합정체가 왜곡된 민주정체로 구분했다.

플라톤은 참주정체가 최악이고, 다음으로 과두정체가 나쁘고 민주정체가 가장 견딜만하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체의 위험성도 크게 경계한다. 민주정체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플라톤과 의견이 일치한다.

법이 최고의 권력을 갖지 못하는 민주국가에서는 민중선동가가 나타나고, 다수가 ‘개인’으로서가 아니고 ‘집단’으로서 최고 권력을 갖게 된다. 민중이 ‘다수로 구성된 독재자(모나초스, monarchos)’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민중의 결의에 좌지우지되는 체제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체가 아니라는 그의 견해는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상황과도 일치하는 탁월한 통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직자를 추첨으로 임명하면 민주정체로, 선거로 임명하면 과두정체로 간주했다. 이러한 과두정체와 민주정체를 전체적으로 혼합한 중간형태의 정체인 ‘혼합정체’를 이상적으로 보았다. 대의민주주의 원리가 적용되는 현대민주주의의 정체도 그의 분류기준으로 보면 ‘혼합정체’에 가깝다.

그는 개인에게 중용(메소테스, mesotes)의 삶이 최선의 삶이듯, 국가에도 중간계급(중산층)으로 구성된 정체가 최선의 국가공동체라고 보았다. 즉 중도(메트리온 metrion)의 상태가 최선이라는 것이다. “중간계급이 많아 가능하다면 다른 두 계층을 합한 것보다, 아니면 적어도 어느 한쪽보다 더 강한 국가는 훌륭한 정체를 가질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중산층이 두터운 상태가 되어야 건강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건강한 민주정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정체 변혁의 위기는 불평등에서 온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체제 안정을 위해 산술적 평등의 추구를 경계하면서, 비례적 평등을 달성하려는 노력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한다. 이는 현대 민주국가에 주는 시사가 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정체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요인으로 민중선동가, 데마고그(demagogos)들의 무절제(aselgeia)를 꼽은 것도 유의할 대목이다. 이들은 자주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민중이 심지어 법 위에 군림하게끔 사태를 몰아간다”는 것이다. 대중의 불법을 방조하거나 포퓰리즘(populism)에 몰두하는 요즘 정치인들에 대한 경고로도 들린다.

최선의 정체는 국민을 행복하게 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정체다. 하지만 행복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의 본성과 습관, 이성의 혁신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청소년 교육 등 공교육의 중요성과 시민교육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추천도서: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09), 4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