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위대한 사람의 곁에 서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 복거일 소설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운명은 그보다 더 큰 재능을 가진 사람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는 일이다. 이 세상은 버금가는 재능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요즈음엔 대중매체와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그런 현상이 심화되고 일반화되었다. 그래서 어떤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한두 사람이 큰 영예와 수입을 얻고 그들보다 조금 못한 사람들은 훨씬 작은 명성과 소득을 얻는다.

전형적 예는 마이클 조던이 엄청난 인기와 수입을 누리는데 그보다 재능이 아주 조금 못한 다른 농구선수들은 그 보다 훨씬 작은 인기와 소득을 얻었던 일이다. 그렇게 '이긴 사람이 모두 갖는(winner-take-all)’현상이 점점 두드러지면서 그것은 '슈퍼스타의 경제학(the economics of superstars)’ 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역사상 그렇게 불운한 사람들은 물론 많았지만, 특히 불운했던 경우로는 영화 「아마데우스」로 유명해진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모차르트(Wo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동시대인이 되는 불운을 안았던 것이다.

그래서 오페라와 교회음악에서 좋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그는 모차르트에 눌려 빛을 잃었다. 그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그는 후세에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박해한 사람으로 주로 기억되어 왔다.

과학 분야에는 그렇게 불운한 이들이 유난히 많다. 업적을 비교하기가 쉽고 발견의 선후가 절대적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뛰어난 과학자와 같은 시대에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큰 불운인가 가장 잘 보여주는 과학자는 아마도 영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35~1703)일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였다고 여기는 뉴턴(Isaac Newton, 1642~1727)과 같은 시대에 비슷한 주제들에 대해 연구했던 것이다.

후크는 실험에 아주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거의 2백년 뒤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가 나오기 전까지는 영국에선 그를 따를 만한 실험과학자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그래서 그는 '왕립학회the Royal Society' 의 실험 관리인을 지내면서 당시 영국에서 행해진 주요 과학실험들에 관여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론에 약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훌륭한 이론가였고 그 이론들은 거의 모두 옳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자연히, 그의 업적은 다양했다. 그는 빛과 빛깔을 연구하여 빛의 파동설을 발전시켰다. 윤형 기압계를 발명했고, 기압계의 수치를 기상 예보에 이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진자(振子)를 중력 측정에 이용하는 것을 처음으로 생각해냈고 시계를 개량했다. 그는 천체의 운동이 역학적 문제임을 처음으로 또렷이 밝혔고 만유인력의 이론을 처음으로 주창했다. 세포 구조를 발견한 일과 연소설이 가리키는 것처럼 그는 생물학과 화학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한사람이 그렇게 큰 업적을 남겼다는 것은 놀랍다. 다른 시대라면 그런 업적은 후크를 과학사의 거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활약했던 17세기 후반은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 완결되어가는 때였고, 자연히, 어떤 발견이나 이론의 주창만으로는 착실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평가받기 어렵게 된 시대였다.

현상들을 수학공식으로 깔끔하게 설명하는 것이 이미 필수적이 됐던 것이다. .“자연의 책은 수학적 문자들로 씌어진다.”는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sms 한 세기 전에 이런 사정을 지적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뉴턴은 그렇게 수학공식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이론을 내놓는 데서 후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그래서 후크는 “많은 것들을 창시했지만 아무것도 완결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로 고전물리학 체계를 완성한 뉴턴에게 거의 모든 공이 돌아갔다.

과학혁명은 16세기 중엽에 시작되었다. 16세기 초엽까지 유럽의 과학은 그리스의 과학에 바탕을 두었다. 그래서 유클레이데스(Eukleides, 기원전 330~260)의 기하학과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ios, 2세기에 활약)의 천문학, 갈레노스(Galenos, 129~199)의 생리학이 당시 과학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유고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가 출간되면서 과학의 주요 분야들에서 갑자기 위기가 나타났다.

그래서 정설들이 안은 문제들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고 그런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이론들이 나타났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와 뉴턴이 발전시킨 수학, 갈릴레이와 뉴턴이 발전시킨 천문학, 갈릴레이와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 1629~1695)와 뉴턴이 발전시킨 역학, 베살리우스(Andres Vesalius, 1514~1564)에서 시작해서 월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에 이르는 일군의 의사들과 생리학자들이 발전시킨 생리학은 그런 새로운 이론들을 대표했다.

당시 유럽 사람들 가운데 그런 과학적 발전을 알았던 사람들은 드물었고 그것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던 사람들은 더욱 드물었을 것이다. 당시 유럽사회를 뒤흔든 종교개혁과 문예부흥 Renaissance과 해외발전에 비기면, 그것은 눈에 띄기 어려웠을 터이다. 실은 요즈음도 과학혁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친 과학의 혁명적 발전은 근본적 중요성을 지녔음이 이제는 분명해졌다. 과학혁명의 연구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긴 허버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의 말대로, “과학혁명은 유럽 역사에서 기독교의 출현 이래의 어떤 사건보다도 훨씬 중대한 일이었으며, 과학혁명에 비기면 종교개혁이나 문예부흥은 중세 기독교 사회 안의 단순한 일화에 지나지 못하는 작은 변화였다.”

논리적 진술 대신 수학적 설명을 요구하는 시대에서 후크는 자신의 업적이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지닌 후배의 그늘에 묻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후크에겐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재주가 없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과학자의 수입이 아주 적었던 시대에 과학자로 생계를 꾸려가야 했으므로 그는 사회적 신분이 낮았다. 얼굴이 못생겼고 늘 건강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했고 자주 다투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가지 발견들에서 자신이 뉴턴보다 앞섰다는 후크의 주장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뉴턴의 재능과 업적을 시기한 사람으로 여겨지게 됐다. 자연히,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무시되고 잊혀졌다. 그의 여러가지 많은 업적 가운데 아주 사소한 것인 '고체의 변형은 힘에 비례한다.’는 이론이 '후크의 법칙 Hooke's Law'으로 불리면서 그의 이름을 지켜왔다.

다행스럽게도 근년에 후크의 업적은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역제 곱의 법칙 inverse-square law', 곧 중력이나 밝기처럼 어떤 물리적 양이 원천에서의 거리에 제곱으로 역 비례한다는 법칙과 만유인력의 개념을 그가 뉴턴에 앞서 생각해냈다는 그의 주장에 관해서, 이제 기본적 개념은 그가 맨 먼저 생각해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런 수정주의적 견해는 물론 뉴턴의 업적이나 성품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뉴턴의 업적은 워낙 위대해서 그의 시대에 완성된 물리학 체계를 ’뉴튼체계 (Newtonian system)' 라고 부르는 것은 충분히 정당화된다.

안타깝게도 그런 명성의 회복은 살리에리에겐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이나 베토벤(Ludwing van Beethoven, 1770~1827)과 내내 사이가 좋았다. 그는 베토벤에게 대위법을 가르쳤고 베토벤은 그에게 바이올린 소나타 세곡을 헌정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그가 모차르트의 재능을 특별히 시기하거나 박해했을 것 같지는 않다. 살리에리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모차르트의 주장도 근거가 없다.

그러나 큰 재능을 지닌 사람이 더 큰 재능을 지닌 사람을 시기하는 일은 흔해서 살리에리에 관한 전설은 아주 그럴 듯하게 들린다. 모차르트가 가난 속에 일찍 죽어 쓸쓸하게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사실과 살리에리가 평생 안정된 일자리를 누렸다는 사실도 살리에리에게 불리하다.

게다가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Andreevich Rimski-Korsakov, 1844~1908)의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계속 그 전설을 사실로 선전하고 있다. 살리에리의 명성이 그런 높은 장애를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위대한 사람의 곁에 서는 것은 위험하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