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소련 타협 불가능 사실 인식…북한이 단독정부 먼저 수립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에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이라는 주제로 연속토론회를 개최한다.

제1차 토론회는 5월 13일 수요일 오전 10시 자유경제원 5층 회의실에서 “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나?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라는 주제로 남정욱 교수(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의 발제로 진행됐다. 남 교수는 발제문에서 '정읍 발언'을 비롯한 이승만의 행보가 분단을 촉발시켰다는 주장에 대해 논박했다. 당시의 상황과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면 이승만에 대한 상당수의 오해가 불식될 수 있다는 요지다.

아래는남정욱 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 자유경제원의 제2차 토론회는 오는 28일 이어진다. [편집자주]

 

   
▲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박정희에 대해서는 나름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조차 이승만에 대해서는 결사적으로 완고하다. 그 사람, 이미 역사적으로 평가가 끝난 인물 아니에요? 되묻는다.

역사적인 평가가 끝났다니 이 무슨 겸허하지 못한 발언인가. 기원전 3~2세기의 100여 년 동안 로마와 카르타고 간에 벌어진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묶게 된 것은 그 한참 후의 일이고 17세기 초의 30년 전쟁은 20세기 중반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야 그 의미가 명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까지 들먹이며 평가가 끝났네 어쩌네 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 조급증이 아닐 수 없다. 당대의 사건이 지니는 의미는 대부분 훨씬 나중에 밝혀진다. 그 사건이 가져온 모든 파장이 완결된 후에야 그 사건은 온전한 역사가 되는 것이다(해서 역사의 반대말은 ‘기억’이다. 기억은 불분명하고 불완전하며 편파적인데다가 자기중심적이다. 어떤 사실이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세상을 뜨고 없어야 한다. 해서 현재는 대략 50~70년 전 정도까지를 의미하고 그 이후에 역사가 된다).

이들은 단지 이승만의 모든 것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조차도 오로지 사리사욕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무장 독립 운동에 대해 반대했다는 사실은 이런 분들에게 절호의 찬스다.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얼마 안 되는 무력을 써버려 장래에 원기를 다 탕비해 놓고 앉아 만 리 같이 창창한 독립운동의 길을 어찌 하고자 하느뇨.”

얼핏 들으면 김을 빼는 발언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말로, 기개로,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승만은 왜 무장 독립 운동에 반대했는가. ‘1818중립법’이라는 것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이승만 노선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다음은 김학은 교수의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

1818 중립법은 1818년 4월 20일 미국 의회를 통과한 법률이다. 이 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미국과 평화 관계에 있는 외국 군주의 영토나 지배자를 목표로 그곳에서 수행하려는 어떠한 군사적 원정이나 계획을 시작하거나 착수하거나 그 수단을 제공하거나 준비하는 자는 유죄이다.

(2) 미국 관할 내에서 외국 군주, 식민지, 지역, 또는 국민에 봉사하기 위한 임관을 수락하거나 이의 사령을 한 모든 미국 시민은 중한 범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한다.

(3) 모병하거나, 스스로 입대하거나, 입대할 의도로 관할권을 벗어나는 타인을 고용하거나 구하려는 자는 유죄이다.

(4) 어떤 선박의 장비를 갖춰 무장시키는 자, 이를 시도하는 자, 또는 설비하거나, 개조하거나 무장하는 데 고의적으로 관여하는 자는 유죄이다.

(5) 이러한 군함, 순양함, 기타 무장 선박의 화력을 증대, 증강시키는 자, 증대되거나 증강하도록 조달하는 자, 또는 증대시키거나 증강시키는 데 고의로 관여한 자는 유죄이다.

(6) 세관원은 명백히 군사목적으로 건조됐거나 장비를 갖춘 모든 선박은 압류한다.

정리해보자. 당시 일본 국왕은 미국과 평화관계에 있으므로 그를 목표로 한 군사적 행동은 안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군사를 모으는 것도 불가다. 훈련 시켜도 싣고 갈 수가 없다.

아무런 대안이 없는 것이다. 미국은 왜 이런 법을 통과시켰을까. 미국은 여러 민족이 모여 있는 나라다. 민족마다 자기 사정을 내세워 군대를 만들 수 있도록 허용하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단결이 깨진다. 그게 이유였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미국에는 나라가 없는 민족이 우리뿐이 아니었다. 아일랜드민족, 체코민족, 슬로바키아민족, 아르메니아민족, 폴란드민족, 헝가리민족 등이 나라 없는 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다. 모병금지법을 채택하지 않은 국가를 골라 무장 투쟁을 모색하는 것이다. 소련과 중국이 일차 후보였다. 그러나 국제 정치의 냉혹함과 국가 이기주의는 두 나라라고 다를 까닭이 없었다. 법으로 금지하지만 않았을 뿐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소련은 1차 세계대전 와중에 소련에 주둔하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무장해제를 명했다. 중국도 만주에 있는 조선인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가재는 결국 게 편인 것이 세상의 인심이었다.

이 상황에서 무장 독립 투쟁은 전망이 없는 단기적 이익을 노린 기회주의에 불과했다. 이승만이 외교독립론을 주창한 까닭이다.

이승만 폄하 주장은 분단 책임론으로 이어진다. 이 책임론의 앞부분에는 미국 책임론이 먼저 등장한다. 미국이 군사 분계선으로 38선을 확정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에 동의한 소련의 책임도 있지만 먼저 제의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한반도의 분할 논의는 오래전부터 주변 강대국들 사이의 협상 단골 메뉴였다.

힘의 균형이 팽팽해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면 어김없이 조선의 분할이 식탁 위로 올라왔다.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중 명나라에 국서를 보내 조선분할을 타진했다. “조선 8도 중 남쪽 4도를 우리에게 준다면 전쟁을 그치겠다.” 1894년에는 영국 외무장관 존 킴벌리가 청나라와 일본에게 서울을 경계로 조선을 나눠 가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1896년 일본 특사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러시아에게 39도선을 경계로 조선을 쪼개자고 제의했다. 1903년에는 주일 러시아 공사 로마노비치 로젠이 일본에 한반도 분할을 요청했다. 정말 짜증난다. 우리는 완전히 ‘밥’이었다. 홍어 생식기의 가치에도 미달하여 그것의 열 배는 만만한 게 조선이었고 그 불쌍한 땅은 당시 주변국들이 필요에 따라 나눠 갖는 깍두기 같은 존재였다. 하긴 피터지게 싸우느니 그 편이 외교적으로 아름답긴 했을 것이다. 그게 현실이 된 것이 48년 분단인 것이다.

분단과 관련된 48년 이전 상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43년 무렵 연합국측은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종전 이후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연합국 대표들이 모인 것이 43년 카이로 회담이다. 여기서 한반도 문제가 처음 논의된다. 결론은 ‘전쟁이 끝난 다음 조선을 바로 독립시키지 않는다. 대신 신탁통치를 실시한다.’였다.

다른 사안도 많은데 오래 다루지도 않았을 것이다. 뭐 영양가 있는 나라라고. 45년 얄타 회담에서도 조선 문제가 나왔지만 결론은 예전 의결안 그대로 통과. 아, 조금 논의가 발전된 내용도 있다. 신탁 통치 기간이다. 루스벨트는 한 20~30 년 어때? 라고 말했고 스탈린은 좀 길지 않아? 대꾸했다. 루스벨트 발언의 20~30년은 나름대로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무관심이 그 본질이다. 어쩌면 한 백 년 어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회담 말미에 루스벨트는 일본이 극성스럽게 버티니 독일이 항복해서 여유가 생기면 대일본전에 참전해 달라고 요청한다.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하면 두 달 후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한다. 45년 5월 독일이 항복한다. 그 사이 미국의 사정에 변화가 생겼다. 원자폭탄 실험에서 성공을 한 것이다.

굳이 대일전에 소련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지난번에 말한 거 없었던 일로 해도 돼, 하기는 좀 그랬겠지만.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떨어진다. 다음 투하 계획은 8월 9일이었다. 스탈린은 다급해졌다. 8월 9일에 2차 폭탄이 떨어지고 바로 일본이 항복을 해 버리면 자기들의 주장할 몫이 줄어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이미 항복을 준비 중인 일본에 서둘러 선전포고를 한다. 8월 8일의 일이다. 말은 이랬을 것이다. 약속대로 독일 항복 후 두 달 후 참전했음.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팻 맨’이 떨어지는 동안 소련군은 외몽고, 만주, 한반도 동북단, 남부 사할린, 쿠릴 열도 등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일본은 독일의 경우처럼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에 8월 10일 전격 항복한다. 초조해 진 것은 미국이다. 소련의 진격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던 것이다. 소련이 한반도를 단독으로 점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미국은 8월 11일 ‘일반명령 1호’를 공표하고 소련, 영국, 중국 등에 통보한다.

정확히는 미국이 아니라 연합국 사령관의 명령이 일본군 대본영을 통해 자국 군대에 하달됐다. ‘일반 명령 1호’의 내용은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그러니까 38선 이북의 항복은 소련이 받고 그 밑으로는 미군이 일본으로부터 받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공표를 통보해놓고 미국은 속을 태웠다.

스탈린이 웃기시네 싫어, 하면 그냥 끝나는 문제다. 뭘 그리 바쁘게 오나, 일단 내가 항복은 다 받아 놓을게, 하면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하지 않는 이상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스탈린이 미국의 제안을 전격 수용한 것이다. 대신 일본 홋카이도 북부 지역을 소련이 점령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조건을 단다. 미국은 거부한다. 겨우 며칠 전쟁을 해 놓고 점령군 행세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강공을 편다. 스탈린은 더 이상 우기지 않는다.

8월 6일부터 8월 11일까지 6일 동안, 일주일도 채 못 되는 사이에 절묘한 드라마가 펼쳐졌다.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일차적으로 미국이다. 그럼 미국은 악의에 넘쳐 한반도의 분단을 획책했는가. 바보가 아니라면 다 안다. 분단은 전쟁 말미에 벌어진 냉혹한 국제 정치의 피할 수 없는 산물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범이다.

다음은 분단을 제안했더라도 이를 협상으로 되돌리려 했으니까 이를 깬 나라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미국, 소련의 공동책임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몇 가지만 덧붙이자. 남쪽에 미군이 북쪽에 소련이 진주했다고 해서 바로 그게 분단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군사 분계선이 바로 국토 분단선은 아니라는 얘기다. 군사 분계선이 어떤 특정 국가의 국토에서 활동하는 외국 군대들 간의 군사 활동 분계선으로만 멈추고 해당 지역 거주민들의 생활이나 정치활동의 분리선으로 변질되지 않는 한 그것이 바로 국토 분단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2차 대전 종전 직후 서독 지역에서의 미ㆍ영ㆍ불 3개국 간의 군사 분계선은 분단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의 미ㆍ소ㆍ영ㆍ불 4개국의 군사 분계선도 말 그대로 군사 분계선으로 끝났다. 군사 분계선이 국토의 분단을 초래하는 것은 외국 군대가 이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자기들이 관할하는 지역 주민들의 삶을 나머지 지역과 확연하게 갈라놓을 때이다. 미국이 38선을 순수한 군사 분계선으로 유지한 반면 소련은 이 선을 통치 분계선으로 바꿔 놓았다. 통신과 교통이 끊겼다. 남쪽으로 내려올 수도 올라갈 수도 없었다.

소련은 김일성을 앞세워 토지 개혁을 시행했고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교육 정책을 새로 올렸고 주민 사상 개조 운동을 실시했다. 남쪽의 주민과 북쪽 주민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은 통신, 교통의 재개와 주민의 자유왕래를 요청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 땅에 대한 물리적인 지배를 원하는 점령국과 땅에 대한 물리적인 욕심이 없는 나라 사이의 차이였다. 군사 분계선은 어느 사이 통치 분계선으로 바뀌었다. 오로지, 변명의 여지없이 철저하게 소련의 성과(!)다.

미국이 남한을 군사기지화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복잡하게 사실 관계를 따질 필요도 없는 문제다. 일단 당시 제국주의 세력은 영토 접수가 공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장이었지 영토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자립한 나라에서 자신들의 상품을 구매해 주길 바랐지 그 나라에 공장을 세워 물건 만들 생각은 안 했다. 1차 대전 종전 후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안기는 문제에 대해 케인즈는 독일의 구매력이 떨어지면 이웃 나라들의 매출까지 동반 하락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 2차 대전 후의 마샬 플랜이다.

독일 시장을 살리는 것이 유럽 경제를 살리는 일이었다. 식민지를 독립시키고 그 식민지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주장은 휴머니즘의 발상이 아니라 철저한 국가 이익의 논리였던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독립시키면 대영 제국은 그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에서 헤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자유 통상으로 평화를 이룩할 것이다”라고 경제학적인 진단을 내렸고 벤담은 같은 이유로 영국을 필두로 하여 모든 식민 모국이 과감하게 식민지를 청산할 것을 철학적인 논지에서 설파했다.

총칼 들고 쳐들어가서 식민지를 세우는 것은 그리스ㆍ로마 시대에나 통용되는 낡은 발상이란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은 유감없이 떠났다. 1949년 6월 29일 미국은 홀가분하게, 오로지 시원하게 한반도에서 발을 뺐다. 여기에 무슨 식민지 건설이니 군사기지화니 같은 이야기가 끼어들 틈이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붙잡아야 할 사람은 남한이었다. 미국이 그대로 주둔하고 있었더라도 6ㆍ25가 터졌을까.

미국의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획책했다는 주장도 있다. 획책은커녕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은 단독 정권을 수립하려는 이승만과 김구를 정계에서 빼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승만과 김구를 대체할 수 있고 공산당과도 타협적으로 잘 지낼 수 있는 제 3의 중도 세력을 육성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좌우합작 종용, 조미위원회, 과 도입법의원 등이 그 노력의 산물이다. 1947년 4월에는 이승만을 연금까지 시켰다.

미국이 입장을 선회한 것은 제 2차 미소공위가 결렬에 빠진 1947년 9월 이후이다. 이런데도 미국의 남한 식민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계사의 흐름에 완벽하게 무지하거나 역사적 사실들을 입맛에 맞게 재단하려는 악질적인 선동일 뿐이다.

   
▲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독정부론을 제창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사진=연합뉴스
이승만 '정읍 발언'의 맥락과 진실

드디어 이승만의 정읍 발언 차례다. 단독 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했다는 문제의 발언이다. 그런데 실은 이전에도 같은 내용의 발언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아시다시피 6월 3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5월 8일, 이미 같은 요지의 발언을 던진 바 있다.

3만 여 명이 모인 목포 산수초등학교 연설에서 이승만은 남조선에 단독 정부를 세우는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청년해방일보>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이승만은 자신의 주장을 하지 중장에게 전하여 자기 소망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 정부를 세워 병력으로써 38선을 깨뜨리고 소련군을 내어쫒고 북조선을 차지하겠다는 주장을 펼쳤다.”

거의 한 달 앞서 야욕(!)을 드러낸 발언을 무려 3만 여 명 앞에서, 그것도 소련군 퇴치와 북진통일까지 섞어 공언한 것이다. 이 발언이 문제가 되지 않은 이유는 당시 미소공위가 한참 진행 중이라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좀 더 들여다보자.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발언은 이른바 남선순행(南鮮巡行)으로 알려진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의 지방 순회 여행에서 나왔다. 이 남선순행은 이승만의 정치적인 기반이 강화된 결정적인 사건으로 처음 이승만은 암살 위험을 이유로 여행을 꺼렸다.

실제로 그가 서울을 떠난 직후인 4월 19일 대전에서 이승만 암살 사건을 음모한 범인 7명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4월 15일 서울을 출발한 이승만은 충청남도ㆍ경상남북도ㆍ전라남북도의 순으로 반탁 강연을 이어나갔다. 이승만의 남선순행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단 그의 방문을 계기로 지방의 우익들이 결집했고 독촉국민회 지회가 연달아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결성된 지회들은 모두 이승만의 정치적인 기반이 되었다. 남선순행은 두 단계로 나뉜다. 4월 15일부터 5월 9일까지의 1차, 6월 3일부터 9일까지의 2차다.

중간의 공백은 미소공위 무기 휴회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급히 상경한 기간이다. 강경한 다음 날인 5월 10일, 이승만은 서울에서도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동아일보 46년 5월 12일자를 보면 “(이승만은 미소공위의 휴회가 유감천만이며 공위가 속개될 것을 기대한다고 했지만)자율적인 정부 수립에 대한 민성이 높은 모양이며 하루라도 빨리 정부가 수립되길 갈망 한다”고 되어있다.

남선순행을 재개한 후인 정읍 발언이후에도 전주(6월 4일), 이리(6월 5일), 군산(6월 6일)에서도 연달아 정읍 발언을 재확인했다. 그러니까 목포에서 최초로 단독정부 수립 의지를 밝힌 후 정읍 발언까지 포함하여 모두 4회나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승만의 남선순행은 마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대중 설득 집회로 보일 지경이다.

정읍 발언은 엄청난 정치적 후폭풍을 몰고 왔다. 한민당을 제외한 좌ㆍ우익 대부분이 이승만의 남한 단정안을 비판했다. 한발 물러선 듯 이승만은 6월 11일 독촉국민회 연설에서 정읍 발언을 철회하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했지만 실제로는 여론 무마용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승만이 단정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추진했다는 말이 된다.

그는 왜 이런 정치적인 모험을 했을까. 그 이유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에 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야야 할 것이다.”

죄송하지만 말씀을 좀 잘 못하셨다. 서두는 이렇게 꺼냈어야 했다. “늦었지만 이제 우리 남쪽도...” 무슨 얘기냐. 1946년 2월 소련군과 북조선공산당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한다. 해방 후 겨우 반년이 지난 시점인데 이미 국가 기구를 만든 것이다.

이 기구는 얼마 안 가 이름에서 ‘임시’를 떼고 정식으로 활동하는데 남한보다 훨씬 빨리 헌법 논의를 시작했고 군대도 창립했다. 이 위원회는 북조선의 인민, 시회단체, 국가기관이 실행할 임시 법령을 제정하고 발포할 권한을 갖는다고 밝혔다. 토지개혁까지 강행하여 무상몰수를 했으니 사실상의 정부라는 반증이다.

게다가 북쪽은 중국 국공 내전의 후방 병참기지 역할까지 맡고 있었다. 이승만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하는 동안 이미 북쪽에서는 차근차근 정권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이 아니면서 최초로 남한 단정을 언급한 사람은 하지의 특별 정치 고문이자 이승만의 친구였던 굿펠로우였다. 굿펠로우는 1946년 5월 24일 귀국을 앞두고 “소련이 조속히 무산된 제 1차 미소공위를 재개시키지 않는다면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의 구성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자유신보 5월 25일자).

마치 5월 6일에 나온 이승만의 발언을 지지하는 모양새다. 혹시 친구라서? 이승만과 굿펠로우는 정치 조폭이 아니다. 굿펠로우는 이승만의 친구인 동시에 미군정의 입장을 이승만에게 전달하는 통로였다. 실제로 1946년 초 이승만에게 미소공위의 실패와 대소 타협의 불가능을 넌지시 알려준 것은 미군정이었다. 그게 누구의 입을 통하여 전달되었는지는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상황 변화에 따른 미군정의 입장은 다소 불명료한 부분이 있다.

일단 하지는 단정을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전체 한반도 차원에서 미국식 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미국식 정부의 성격이 대소 봉쇄적이고 반공적이며 공격적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테면 북한의 민주기지론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반공ㆍ자유기지론인 셈이었고 미군정의 통제 하에 수립되는 ‘임시한국정부’를 북한 지역까지 확대하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지는 북한에 파견된 소련 군사고문단과는 달리 정치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전술적으로만 파악했지 정치공학적인 측면에서 녹여낼 역량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승만 같은 노회한 정객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미군정의 의지와 실천 사이의 간극을 좀 더 살펴보자.

앞서 말한 대로 미군정은 이승만을 정계에서 퇴출시키는 방안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대안은 없었다. 미소공위 제 5호 성명이 발표된 직후 미군정은 반탁 진영을 설득해 제 5호 성명에 대한 동의를 구하려고 했지만 창구는 결국 이승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선순행 기간인 4월 21일 굿펠로우가 대전을 방문했고 유성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에게 협조를 구했다. 5호 성명은 미소공위가 협의할 정당ㆍ사회단체의 범위를 규정하면서 공위에 협력하겠다고 서명만 하면 협의 대상이 된다고 규정했다. 하지는 찬탁, 반탁에 대한 입장과 무관하게 5호 성명에 서명만 하면 미소 공위의 협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나중에 반탁을 해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굿펠로우를 통해 하지의 입장을 전달받은 이승만은 4월 23일 대구에서 반탁 진영도 미소공위에 참가하자며 5호 성명을 지지했다. 미워도 같이 갈 수 밖에 없는 동반자 관계, 그것이 미군정과 이승만의 미묘한 관계였다. 단독 정부쪽으로 가닥이 잡힌 후에도 이승만과 하지의 입장은 뚜렷하게 갈렸다.

둘의 공통점은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 방안 대신 남한에 우익 중심의 미국식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둘의 차이는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좌파를 일체 배제하고 남한에만 국한되는 것이었던 것에 반해 하지의 그것은 과도정부로 타협적인 남한 좌파와 북한의 일부 세력까지 포함해 과도정부를 북한까지 확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는 이를 위해 이승만에게 이 과도 정부에 참여하지 않기를 종용했다. 과도정부에 대한 북한과 소련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이승만의 존재는 껄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는 이승만 대신 김규식을 내세우고 싶었다. 김규식을 앞세워 남한우익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 정부를 만들어 이를 북한 지역까지 확장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이는 누가 봐도 순진무구한 발상이었다.

북한과 소련이 이를 받아들일 만큼 어리숙하지도 않았지만 이승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동의하는 척 했던 이승만은 바로 반격에 들어간다. 46년 6월 12일 독촉국민회 전국대회에서 결성한 민족통일총본부를 통해 좌우합작을 폐기시키기 위한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던 정치가와 순진한 군인 행정가 사이의 좁힐 수 없는 차이였다.

이승만이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것은 이미 북한에서 소련에 의한 공산주의가 틀을 잡았으며 남한까지 공산화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가운데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를 면하게 하겠다는 발상이었다. 하지의 입장에서는 이승만이 자기 의지의 관철만이 유일한 관심사인 ‘늙은 악당’이었지만 세계사적 흐름과 공산주의의 본질을 파악한 이승만에게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이는 같은 기간 동안 북한에서 벌어진 일을 살펴보면 더욱 뚜렷하게 알 수 있다. 김일성은 46년 2월 2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1차 회의에서 “지난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우리나라 력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중앙정권기관을 가지게 되었다”는 연설을 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사실상의 단독정권이었던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이어 46년 11월에는 도ㆍ시ㆍ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했으며 47년 2월과 3월에는 리ㆍ면까지 인민위원회를 확장했다. 이를 기반으로 47년 2월 국회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회의가 만들어졌으며 이 북조선인민회의는 행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정리하자면 북한에서는 남한에서의 단독 선거인 5월 10일 선거가 실시되기 1년 전에 이미 단독 선거를 실시하고 단독 국회를 구성하고 단독 정부를 만든 것이다. 이처럼 이미 북한에서 모든 행정 절차가 마무리된 다음(이는 명백한 분단 확정이다. 전술한대로 군사 분계선이 국토의 분단을 초래하는 것은 외국 군대가 이 군사 분계선을 기준으로 자기들이 관할하는 지역 주민들의 삶을 나머지 지역과 확연하게 갈라놓을 때이다) 뒤늦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을 두고도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모는 것은 한 쪽의 기록을 완전히 배제한, 말 그대로 악의적인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실은 이 질문을 공론화시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동네 깡패들에게 얻어터지고 들어와서 누구에게는 어디를 맞았고 또 누구에게는 저기를 줘 터졌고 자랑하는 식이다. 이런 인간을 등신이라고 부른다.

책임은 오로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못나서 허리가 잘린 것이다. 이 못난 짓에는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한마음으로 노력하지 않은 분열까지 포함된다. 미국이 주범이니 소련이 주범이니 둘이 공범이니, 다 쓸데없는 말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국익에 충실했을 뿐이다.

개인은 대체로 이기적이고 가끔 이타적이다. 그런데 집단이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개인의 이타심에 견줄 수 있는 집단의 이타심은 찾기 어렵다. 더구나 문제가 국제 차원이 되면 집단은 오로지 순정 이기파가 된다.

찬탁이 옳았는가 반탁이 옳았는가

찬탁이 옳았는가 반탁이 옳았는가는 까다롭고 예민한 문제다. 여기에 이승만의 정치적 행보를 섞으면 더 복잡해진다. 무슨 말이냐. 이승만의 안목은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승만은 반탁을 했다. 이승만은 단순히 민심을 얻고 좌익에게 밀리던 정치 지형도를 바꾸기 위해 반탁 선택을 한 것일까. 사실 찬탁과 반탁이 예민한 문제가 된 것은 오로지 동아일보의 오보 때문이다.

이제 와서 책임을 물을 수는 없겠지만 사실 관계는 명확히 해야 하는 까닭으로 동아일보 오보 사태를 들여다보자.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내용을 보자.

“막사과(모스크바)에서 삼국 외상 회의를 계기로 조선 독립 문제가 표면화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관측이 농후하여가고 있다. 즉 번즈 미국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 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삼십팔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짙게 표시한 부분은 신문기사로서는 함량미달인 부분이다. ‘팩트’가 아니라 ‘추측’을 태연하게 기사에 넣고 있다. 하나같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들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사가 아니라 헤드라인이다.

동아일보는 “외상회의에서 논의된 조선독립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으로 헤드라인을 뽑았다. 마치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을 하는 것처럼 독자의 판독을 유도하고 있다. 이 기사에 전 국민이 분노로 일치 단결했다. 겨우 해방을 맞았는데 또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다고? 12월 30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실제 합의사항이 보도된다. 어떤 것이었을까.

① 독립국가로 재건설하기 위해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

② 그러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 공위)를 열 것

③ 최고 5년 기한으로 미ㆍ영ㆍ소ㆍ중 4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되 그 방안은 미소공위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할 것

④ 남북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2주내로 미소공위를 열 것

보시다시피 신탁통치 이야기도 나오기는 하지만 삼상회의의 핵심 결정 사항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뒤늦게 제대로 된 보도가 나왔지만 이미 화끈하게 돌아선 국민 정서는 그 결정사항의 경중을 따질 겨를 없이 반탁으로 몰려갔다.

만약 신문 기사가 이렇게 나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임시정부수립 결정, 그 기간 동안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신탁통치 5년 실시.”

1차적으로 임시정부수립이라는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으니 짐작컨대 ‘5년은 길다’ 혹은 ‘3년이면 받아주겠다’ 식으로 여론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좌익은 반탁에 일시 참여했다가 찬탁으로 돌아섰다. 조선공산당은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다음 해 1월 2일 찬탁지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찬탁을 주장하는 것은 민족 반역자!”라는 우익의 선동은 대중의 정서를 제대로 읽은 것이었고 조선공산당은 이를 계기로 해방 초기에 가졌던 유리한 입지를 일시에 상실한다. 신탁통치가 실시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좋은 결과를 낳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미 좌우갈등도 심하고 분열은 일상이었다. 그랬더라도 내전 정도를 치루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적어도 3년씩이나 전쟁을 치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남ㆍ북간에 극단적인 증오가 싹 틀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동독과 서독은 갈려 있었지만 사이가 원만했다. 서로 편지도 주고받았다. 우리는 항상 최악의 경우만 골라서 갔다.

결국 찬탁이 옳았던 것일까. 여기서부터는 사실 if~의 영역이자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 판단의 문제다. 신탁통치가 끝난 후 우리민족이 걷게 될 길은 거의 확실하게 공산주의였다. 당시 대중적인 선호도가 사회주의>공산주의>자본주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양동안 선생의 if~를 보면 이런 식이다. 신탁통치를 실시했다면 좌익 세력은 폭동 따위를 일으켜 지지율 하락을 자초하지 않았을 것이고 통일임시정부가 구성되었을 경우 좌익과 중도파 그리고 우익의 김구-임정계가 참여하는 연합세력이 집권하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야당이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어 그 집권 세력은 북한에서 46년 실시한 것과 동일한 형식으로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를 전 국토에서 시행했을 것이며 결국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되었을 것이라는 논리가 이어진다. 그랬다면 우리의 지금은 현재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공산주의는 개인을 말살하는 참혹한 전체주의다. 그 일당 독재 전체주의 정권 하에서 우리는 숨 막히는 고통을 받았을 것이고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무너져 내렸거나 아니면 끈질기게 버티면서 질곡의 삶이 십 수 년 더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래도 상관없다면 신탁 통치의 수용이 옳았다 쪽에 표를 던질 것이고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되지 않은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복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남한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은 것이 잘한 결정이라고 할 것이다. 이승만은 확대되는 냉전의 기류를 읽었던 사람이다. 그는 분단이 되더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 땅에 이식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 판단에 동의한다. 비록 분단이 되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확립한 대한민국이 통일을 주도하는 상황이 된 것은 결국 민족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빼놓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남북이 갈라져 각자 다른 길을 갔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전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10일 북한최고인민회의에서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화국 정부는 북조선에서 실시한 토지개혁, 산업 국유화, 노동 법령, 남녀평등권 법령과 같은 민주개혁들을 더욱 공고히 발전시킬 것이며 그것을 전 조선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투쟁할 것입니다.”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의지가 명확했다는 얘기다. 북한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남쪽보다 북쪽에 앞서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호도한다.

"38도선 이남에서의 분단국가가 이북 정치세력과의 협상을 거부하면서 성립되었다면 이북에서의 단독정부는 계속 이남 정치세력과의 협상을 표방하면서 성립되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 강만길, 한국 현대사(창작과 비평사) 174p -

북한 정권이 협상을 표방하면서 성립되었다고? 그렇다면 그 협상이란 게 잘 안 되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인가. 협상 다음의 수순은 상대를 죽이는 일인가. 정말이지 어이없는 인간들이다.

분단이 필연적으로 전쟁을 불러왔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북한의 남침이 김일성의 모험주의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희석시키고 민족에게 고통을 안겨준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는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간악한 발언이다.

이승만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가장 명료한 발언을 한 사람을 꼽으라면 김영호 선생이다. 일부 발췌하여 올리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국가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지도자의 역량을 ‘비르투(Virtu)’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흔히 미덕(virtue)이라고 하는 중세적 용어와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다. 이것은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 건설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지도자의 영웅적 행위를 의미한다.

상황에 수동적으로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세우고 능동적으로 선택의 범위를 넓혀가는 지도자의 역량은 국가 건설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3년은 국내 정치세력 사이의 권력투쟁이 국제적 차원에서 전개된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에 맞물려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도자들이 건국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비르투였다.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독정부론을 제창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새로운 국가 건설은 자연발생적 과정이 아니라 비르투에 입각한 지도자의 인위적 노력의 결과라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과 건국의 주역들의 역할을 설명하는데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남정욱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