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과 북한만 보지 말고 세계정세 틀 안에서 분단의 원인 살펴야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에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이라는 주제로 총 7회에 걸친 연속토론회를 개최한다.

제1차 토론회는 5월 13일 수요일 오전 10시 자유경제원 5층 회의실에서 “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나?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라는 주제로 남정욱 숭실대학교 교수의 발제로 진행됐다. 토론자로는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조우석 문화평론가 등이 참석했다.

김용삼 편집장은 토론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계적인 안목을 가지고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분단의 진짜 원흉은 스탈린'이라는 논지를 개진했다.

아래는 김용삼 편집장의 토론문 전문이다. 자유경제원의 제2차 토론회는 오는 28일 이어진다. [편집자주]

 

   
 

지하에 있는 이승만은 억울할 것이다. 왜냐.

도대체 자신이 건국한 나라의 사람들이,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을 다 뒤집어서 매국노, 역적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의 손가락질이 정당한 근거에 의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가지고 하는 것이라면 그도 자신의 과오를 탓하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을 향한 비판과 비난은 전혀 근거도 없고, 역사적 사실과도 어긋나며, 왜곡과 거짓으로 도배질 되어 있다.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비난 매도하는 것은 불과 65~70년 전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집어 엎어버리려는 특정 세력들의 역사 날조다.

우리가 특정 세력들의 현대사에 대한 날조된 공격을 분쇄하는 길은 ‘역사적 사실’들을 발굴하여 그런 주장들이 완전 허구이자 날조된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작업이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남한과 북한만을 들여다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전 세계적 질서가 냉전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세계적인 안목을 가지고 남북문제를 들여다봐야 정답이 도출되는데,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남북 관계라는 울타리 안에서 분단의 원인을 찾아내려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8선에 대하여

만약 1945년 8월 14일에 미국이 38선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반도 전역을 소련이 점령했을 것이고, 곧바로 공산화가 되었을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38선을 제안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정식 교수는 폴란드를 점령한 소련의 행태를 보면서 미국이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독일과 소련의 공격으로 항복한 폴란드는 요인들이 런던에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독일이 점령했던 폴란드 영토를 다시 빼앗은 소련은 폴란드 정부 수립 과정에서 연립정부를 출범시킨 후 우익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한 다음 폴란드를 공산화했다.

미국은 폴란드 사태를 지켜보면서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소련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공산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막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8월 9일 소련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한반도 북쪽 지역을 점령해 가자 미국은 한반도 전체를 소련군이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8월 14일 38선 설정을 제안한 것이다.

소련은 마음만 먹었다면 한반도 전역을 단독 점령하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불과 6일 동안의 전쟁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쪽에 지배권을 행사하게 됐으니 38선을 받아들이는 것도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38선은 남북을 분단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38선 이남의 지역만이라도 소련 점령을 막기 위해 내놓은 것이란 점을 분명히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38선으로 인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저지한 결과 남한의 공산화를 막았기 때문이다.

   
▲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독정부론을 제창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사진=연합뉴스
분단의 원흉은 스탈린

일본이 항복한 지 정확하게 한 달 후인 1945년 9월 15일부터 10월 2일까지 런던에서 미, 영, 소, 중, 프랑스 등 5개 전승국 외상들이 모여 전후 처리 문제를 위한 회의를 열었다. 말하자면 전쟁이 끝났으니 전리품을 나누는 자리였다.

소련은 전후(戰後) 일보 통치에 소련이 참여하고 홋카이도 북부의 할양을 요구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자 지중해 진출을 위해 이탈리아 식민지였던 리비아의 트리폴리타니아(트리폴리) 지역의 양도를 요구했다. 이 안건도 영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스탈린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를 패배시킨 대가로 동유럽과 지중해 등 여러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권을 확장하기 위해 노렸던 지역을 차지하는 데 실패하자 소련군 점령지인 만주와 한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런던에서 외상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극동전선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와 연해주 군관구 군사회의 및 제25군 군사평의회 앞으로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블록(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하라”는 암호지령을 발송한다. 북한에 공산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37일 만에 내려진 이날 지령은 해방 후 한반도에서 미소관계의 진전과 아울러 한국 현대사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의 비밀지령이 내려진 이후 북한에서는 공산 단독정권 수립을 위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소련의 점령군 사령부는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한 지역의 행정을 담당할 한국인 중앙행정기구를 창설하기 위해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했고, 10월 28일에는 북조선 5도 행정국을 설립했다.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약칭 5도대회)를 열고 마지막 날 조선공산당의 북조선 분국을 만들었다.

이날 김일성은 “오늘의 조선에는 미국이나 영국식 민주주의가 맞지 않는다. 서구라파 민주주의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조선 실정에 부합하는 새로운 진보적 민주주의 제도를 세워야 한다”고 연설했다. 김일성이 말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란 ‘인민민주주의’,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10월 14일에는 소련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선출된 김일성이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를 통해 군중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부터 소련군 사령부는 김일성을 “항일유격대의 장군”이자 “민족의 영웅”, “영명한 지도자”로 떠받드는 선전선동에 돌입했다.

1945년 12월 25일에는 소련군 총정치국장 슈킨 보고서가 등장한다. 슈킨은 “1945년 9월 21일자 최고사령부의 훈령에 언급된 북조선에서의 민주정당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개혁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소련의 국가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굳건한 정치 경제적 교두보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러니까 공산 단독정권 수립을 위한 제반 조치가 너무 느리다는 질책이었다.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됐다. 다음날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은 김두봉, 서기장은 강양욱 등 총 23명으로 구성된 임시인민위원회 명단이 발표됐다. 이들은 행정과 입법 권한을 가지는 독재적 기관으로서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라고 선언했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단독정부를 설립하고 이를 공표한 것이다.

이로부터 1년 후인 1947년 2월 21일, 저들은 ‘임시’라는 간판을 떼어버리고 명실상부한 북조선 단독정부인 ‘인민위원회’가 등장했다. 임시인민위원회 발족과 동시에 북한에서는 정부 수립 절차가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우선 10개 부처로 된 정부조직과 공산주의 공안기관 설치(2월 10일), 토지개혁(3월 5일), 중앙은행 설립과 화폐 발행(7월 1일), 주요산업 국유화(8월 10일) 등이 단행됐다. 1946년 말 북한 공업시설의 90% 이상이 국유화되어 북한은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서 토지나 사업체를 빼앗긴 지주나 자본가, 친일파로 낙인찍힌 지도자급 인사들, 기독교인이나 공산화에 걸림돌이 되는 지식인들은 탄압을 피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탈출했다. 월남한 사람들의 수는 1948년까지 약 100만 명, 이는 북한 전체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구였다. 북한은 이 때 우수한 인적 자원을 너무 많이 잃어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

2차 세계대전 후 소련군이 점령한 동유럽 국가들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는 좌우합작 방식을 통해 3~4년 내에 모두 공산화됐다. 그 과정도 거의 비슷하다. 먼저 착취자들의 재산을 무산대중에게 돌려준다는 선전과 함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그리고 기존의 공산당과 여타 정당 사이의 합당으로 노동당을 출범시켜 연립정권을 수립한다.

이후 연립정권에 참여한 인물들을 암살, 사고사, 의문사 등으로 숙청하여 친소 성향의 공산주의자들만 남는다. 이들이 최종적으로 친소 단일정당을 수립하고 예전의 노동당은 다시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북한에서도 이런 일들이 거의 유사하게 나타났다.

국제정치학 박사로서 국제정세의 흐름에 정통했던 이승만은 미국 저널과 언론을 통해 동유럽이 공산화되는 과정을 냉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정치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미군정은 사사건건 자신들과 충돌하는 이승만을 퇴출시키고 김규식과 여운형을 동원하여 좌우합작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공작을 시도했다.

이승만은 이북의 소련 점령지역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공산 단독정부가 수립된 마당에 남한에서 좌우합작이 추진되면 북한의 공산세력과 남한의 공산세력이 힘을 합쳐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했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승만은 난국타개를 위한 승부수를 던진 것이 6월 3일, 정읍 발언이다.

남한에서 단선정부 수립을 촉구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한 마디로 해석한다면 “언제까지 우리가 미국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가? 언제까지 우리의 현재와 앞날을 미국과 소련의 화해에 걸고 기다릴 것인가? 우리는 남한에서만이라도 주권을 되찾아서 우리의 장래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분단의 진짜 원인제공자는 1946년 6월 3일의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아니라 그보다 8개월 전에 내려진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의 비밀 지령이다.

이승만과 김구

오늘날 우리 사회는 건국 지도자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라고 매도하며 역사의 감옥에 가두고, 건국에 반대한 김구를 민족의 영웅처럼 받들고 있다. 불행하게도 김구는 국제정세의 흐름에 어두웠다. 그는 미국이 중대한 국제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한국문제도 미국의 세계전략에 맞춰 풀어갈 것이라는 이승만의 주장을 납득하지 못했다.

김구는 거시적 안목이 부족했고,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한국문제가 영향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김구는 임정의 권위를 업고 쿠데타를 통해 미군정을 무너뜨리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김구는 남북 협상을 통해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할 것이라는 비현실적 몽상에 사로잡혀 북에 남북 협상을 제안했고,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회담도 했다. 그러나 이미 북한은 실질적인 공산 단독정권을 수립해 놓은 상황에서 김구와 김규식 일행을 실컷 이용하다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노선과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은 정치에 있어서 이상과 현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 이승만과 김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내놓았다.

‘요즘도 간혹 백범(김구)의 노선에 따랐더라면, 남북 분단의 장기화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어떠한 형태로든 통일정부가 수립되었을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의 입장을 말한다면 당시의 정세로 보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최선의 길이었다. 그때 만일 남한에 민주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의 공산화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굳게 믿는다.…백범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상에만 충실하려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하기는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만일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이 무조건 백기를 들고 공산주의자들 앞에 항서(降書)를 썼더라면,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적화 통일의 길이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요구하고 있던 것은 민주 진영의 무조건 항복이었다.…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남북 분단의 비극을 막기 위해 우선 어떤 형태로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민주주의냐 또는 공산주의냐 하는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그 다음으로 미루어 민의(民意)에 맡기거나, 또는 민주 진영과 공산당의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최선의 길처럼 생각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시기의 늦고 빠름은 있더라도 공산화라는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2차 대전 후의 동구 제국(諸國)이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백범이 추구하던 노선이었다. 당시의 현실을 괄호 속에 묶어두고 이상만을 앞세운다면 분명히 이것은 최선의 길이었을 것이다.

백범은 현실을 외면한 채 이상만을 추구하려고 했으나 우남(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남한 단독정부안 지지자들은 현실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소망은 다만 통일정부 수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주적 통일정부의 수립'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범은 이상을 위해 현실을 버릴 수 있는 스타일의 정치가였다면, 우남은 현실을 위해 이상을 유보할 수 있는 스타일의 정치가였을 뿐이다.’

김구와 김규식이 주장한 통일우선주의는 심금을 울리는 고귀한 감정의 표현이었지만 그 소망은 실현될 수 없는 꿈이었다. 스탈린의 9‧20 지령이 민족통일의 길을 모두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꿈을 실현해보기 위해 주권의 회복을 지연시킬 경우 부지하세월로 외국의 통치를 연장시켜야 했다.

역사를 돌아볼 때 과연 누구의 판단이 옳았을까.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