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서 살면서 열악한 처지 감수...노동운동 촉발제 되기도
   
▲ 한국경제의 발전 뒤에는 1960년대와 70년대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나이 어린 여공들의 애환이 서려있다. /사진=자유경제원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대한민국이 이룬 기적 같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찾아 그 경제적 효과와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연중·연속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회 토론회에서 파독광부들의 활약을 다룬 자유경제원은 지난 12일 “구로공단: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날 토론회는 현진권 원장(자유경제원)의 사회, 최승노 부원장(자유경제원)의 발제, 김인규 교수(한림대 경제학과), 안재욱 교수(경희대 경제학과), 이상희 교수(한국산업기술대 지식융합학부)의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토론자인 안재욱 교수는 구로공단의 근로자 가운데 80%가 여성이었음을 지적하며 "한국의 경제발전은 구로공단 여공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그들의 손끝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아래는 안재욱 교수의 토론문 전문이다.

 

   
▲ 안재욱 교수

구로공단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구로공단은 1964년부터 1971년까지 10여년에 걸쳐 의류, 봉제 등의 수출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조성된 산업단지였다. 1980년대 후반까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제품을 생산·수출하였다.

1987년에는 근로자 수가 7만5000명에 달했고 전국 제조업 수출의 10%를 차지하기도 했다. 1997년 ‘구로단지 첨단화 계획’에 따라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기존의 조립금속, 섬유, 인쇄 등의 노동집약적 업종에서 고도 기술, 벤처, 패션디자인, 지식산업 등 첨단 업종들이 집적한 지역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구로공단은 한국 산업의 변천과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곳이다.

한국경제의 발전 뒤에는 1960년대와 70년대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나이 어린 여공들의 애환이 서려있다. 6.25전쟁 직후인 1953년 한국의 국내총생산은 13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다. 1960년대 한국경제는 후진적인 농업경제였다. 농촌인구가 60% 이상 차지했고, 농업생산 비중이 37%였으며, 식량부족으로 보릿고개를 겪었던 시기였다. 일자리가 없어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다.

가족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벌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로공단이 들어서면서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자 농촌의 많은 인구들이 취직하기 위해 구로공단에 몰려들었다. 구로공단의 근로자 가운데 80%가 여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어린 여공들이 많았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린 소녀들이 돈을 벌어 고향에 보냈다.

   
▲ 구로공단의 근로자 가운데 80%가 여성이었다. 그들을 한국 산업역군으로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그 돈은 고향집의 실림 밑천이 되었다. 어린 여공들이 보내준 돈으로 부모가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남동생과 오빠들이 공부할 수 있었다. 여공들은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가족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쪽잠을 자며 미싱을 돌렸다.

여공들의 생활은 정말 열악했다. 소위 ‘벌집’이라 불리는 조그만 방에서 생활했다. 2평도 안 되는 조그만 방에서 4-5명이 함께 모여 살았다. 그리고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퇴근 시에는 몸수색을 받아야만 했었다. 이런 열악한 노동환경과 조건은 노동운동을 촉발시켰다. 1985년 ‘구로공단 동맹파업’이 그것이다.

그 후 민주화 운동과 함께 많은 노동단체가 생겨났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한국 경제는 지금 국내총생산이 1조 40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이 2만8000 달러에 달하는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무엇보다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냈다. 그리고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전환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런 경이적인 한국의 경제발전은 국민들의 피와 땀, 노력의 결과다. 특히 한국의 경제발전은 구로공단 여공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그들의 손끝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로공단 여공들을 한국 산업역군으로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경희대 경제학과 안재욱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