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세 잘 읽은 전략가…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 복거일 소설가

고려 성종(成宗) 12년(993)에 거란족 왕조 요(遼)가 고려에 쳐들어왔다. 자기들이 이미 고구려에 옛 땅을 차지했는데, 고려가 그 땅을 침탈했으므로, 징벌한다는 것이었다. 소손녕(蕭遜寧)이 거느린 요군은 압록강을 건너더니 곧 고려군을 쉽게 깨뜨렸다.

당시 서경(西京)에서 군대를 독려하던 성종은 신하들과 난국을 헤칠 길에 관해 논의했다. 그 자리에선 서경 이북의 땅을 요에게 넘겨주고 황주(黃州)에서 자비령(慈悲嶺)까지를 국경으로 삼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성종은 그 주장을 따르기로 하고 서경의 창고를 열어 쌀을 백성들이 가져가도록 했다. 그렇게 했어도 쌀은 남았는데, 성종은 적군의 양식이 되는 것을 꺼려 그 쌀을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중군사(中軍使)로 요군을 막던 서희(徐熙, 940~998)가 임금께 아뢰었다. “먹을 것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에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군사의 강약에만 달린 것이 아니고 좋은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데도 있습니다. 사정이 그러한데, 어찌 갑자기 쌀을 버리게 하십니까? 게다가, 먹을 것은 백성의 목숨이니, 차라리 적군에게 이용되었으면 되었지, 헛되이 강 속에 버리는 것은 하늘의 뜻에 맞지 아니합니다.”

성종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쌀을 대동강에 버리라는 명령을 거두었다. 서희는 다시 아뢰었다.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部)에 이르는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차지했는데, 광종(光宗)께서 빼앗아 가주(嘉州)와 송성(松城) 등의 성들을 쌓으셨습니다. 이번에 거란군이 온 의도는 그 두 성을 빼앗으려는 것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고구려의 옛 땅을 빼앗는다고 큰 소리 치지만, 실은 우리에게 공갈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들의 군세가 강성함을 보고 선뜻 서경 이북의 땅을 넘겨주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더구나 삼각산(三角山) 이북의 땅도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땅 욕심을 내서 계속 요구하면, 다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사정이 그러한데도 지금 땅을 떼어준다면, 참으로 만세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임금께선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저희들이 한번 싸우게 하소서. 그 뒤에 다시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서희의 얘기가 조리가 있으므로, 성종이 그 얘기를 따랐다. 요군은 다시 고려군을 공격했지만, 대도수(大道秀)와 유방(庾方)이 이끈 고려군에게 패했다. 그래서 소손녕은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서 항복하기를 재촉했다. 고려에선 서희를 대표로 삼아 요군 진영에 보냈다.

소손녕이 말했다. “당신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것이오. 그런데 당신 나라가 그 땅을 침식했소. 그리고 우리와 이웃하면서도, 바다 건너 송을 섬겨왔소. 그래서 우리가 와서 치는 것이오. 이제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한다면, 무사할 것이오.”

서희가 대꾸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옛 땅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고려라 했고 도읍을 평양에 두었습니다. 만약 국경을 따지기로 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은 모두 우리 경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압록강 안팎은 역시 우리 경계 안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훔쳐서 자리 잡았습니다. 그들은 더럽고 교활하여, 길을 통하기가 바다를 건너기보다 어렵습니다. 조빙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여진을 내쫓고 옛 땅을 다시 차지해서 성채와 보루를 쌓고 도로를 열면, 감히 조빙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희의 말엔 조리가 있어서, 소손녕은 더 윽박지르지 못했다. 마침내 소손녕은 자기 황제에게 고려와 화친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희가 거란 진영에서 이레를 머무르다가 좋은 소식을 갖고 돌아오니. 성종은 강나루까지 나와 맞았다. 그리고 요 황제에게 감사하는 사신을 보내도록 했다.

서희가 아뢰었다.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평정하고 옛 땅을 회복한 뒤에 조빙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을 회복했으니, 강 밖의 땅도 얻는 것을 기다려 조빙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종은 그 말을 물리쳤다. “너무 오래 조빙하지 않으면, 후환이 두렵소.” 그리고 사신을 요에 보냈다.

서희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외교가였다. 그는 크게 불리한 처지에서 벌인 담판에서 오히려 영토를 넓힐 기회를 찾아냈다. 그와 비길 만한 이로는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서 뛰어난 외교 활동을 벌인 김춘추(金春秋, 604~661)를 꼽을 수 있을 따름이다.

동양사의 주요 무대인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데다가 국제 무역이나 해상 활동의 전통이 미미했으므로,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이웃 나라들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아주 적었다. 그래서 국수주의 성향이 무척 강했고 다른 나라들에 대한 태도와 정책이 비합리적인 경우들이 많았다. 그런 전통은,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이어져, 우리의 외국에 대한 태도와 정책엔 비례(非禮)와 과공(過恭)이 교차한다.

요가 고려에 침입한 사정에서도 이 점이 잘 드러난다. 926년 발해를 병탄하자, 요는 접경하게 된 고려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태조(太祖)는 요가 화친할 나라가 못 된다고 여겼다. 발해(渤海)와 맹약을 맺었다가 갑자기 쳐서 멸망시킨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신 30명을 섬으로 귀양 보내고 그들이 선물로 가져온 낙타 50마리는 모두 굶겨 죽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왕조를 세운 정치가가 이런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나라들 사이의 관계를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 비긴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사절을 귀향 보낸 것은 동서고금을 따질 것 없이 존중된 국제관행을 어긴 것이고, 낙타들을 굶겨 죽인 것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다른 나라의 외교적 움직임에 그렇게 대응한 왕조에서 높은 외교적 식견을 가진 지도자들이 나올 리 없다. 그래서 요와의 충돌을 예견한 사람이 없었고, 요가 고려를 치려고 준비한다는 여진의 제보가 있었어도, 그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큰 군대가 쳐들어오자, 이내 땅을 떼어주고 화친하려 했고 서둘러 칭신(稱臣)했다. 고려 초기에 나온 이런 비례와 과공의 교차는 우리 역사에서 너무 자주 되풀이되었다.

서희가 어려운 처지에서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국제 정세를 잘 읽었기 때문이다. 979년 송이 중국을 통일한 뒤, 요와 송은 줄곧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서희는 그래서 요가 고려의 정복에 큰 힘을 쏟기 어려우며 고려를 견제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라고 판단했다. 안타깝게도, 서희를 이을 외교가는 나오지 않았고, 고려는 요와의 관계를 매끄럽게 유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두 차례나 요의 침입을 받았다. 요가 송과 치열하게 싸우던 때라, 고려는 상당히 유리한 처지였는데도, 그렇게 외교에서 실패한 것은 안타깝다.

거란은 4세기부터 동 몽골에서 활약한 유목민족이다. 10세기 초엽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926)가 부족들을 통일하여 요를 세웠다. 그 뒤로 몽골과 만주와 화북을 지배하다가 12세기 초엽에 여진족의 금(金)에게 멸망했다.

왕족 야율대석(耶律大石, ?~1143)은 요의 남은 세력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서요(西遼)를 세웠다. 80년 동안 이어진 서요의 활약이 중앙아시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거란을 뜻하는 'Kitai’에서 나온 Cathay가 서양에선 중국을 뜻하게 되었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