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체질에 맞게 시장 고려해 접근…정치권 휘둘리지 않아
자유경제원은 시장경제의 본질을 형성하는 주요 개념인 '경쟁(競爭)’, '사익(私益)’ '격차(隔差)’, ‘독점(獨占)’, ‘기업(企業)·기업가(企業家)’, ‘자본(資本)’ 등의 주제에 대해 우리 사회에 만연된 그릇된 통념을 깨뜨리기 위한 자유주의연구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삼성의 자본축적 과정”이라는 주제로 연구회가 열렸다.

발표를 맡은 김인영 교수(한림대 정치행정학과)는 “삼성은 정부의 산업정책에 적극 조응하기보다는 이과 달리 스스로의 논리에 입각한 투자로 자본축적에 성공했다. 정부의 주도에 의한 자본축적 또는 대기업성장의 논리는 과장되었고 비약”이라고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아래는 김인영 교수의 발표문 전문이다.

 

   
 

한국 경제성장에 관한 국가(정부)주도학파(approach of government-led economic growth)의 논지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이루어진 한국의 경제성장은 수입대체(import substitution)에서 수출주도(export-led)로의 정책전환 등 산업정책(industrial policy)을 통한 정부의 경제주도에 기인한다.

이렇듯 산업화의 수행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주장은 1950년대~60년대 일본을 포함한 1960년대~70년대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설명하려는 필요의 산물이었다. 또한 대만과 한국, 그리고 최근의 중국의 경제기적에 관한 정치경제적 논의 뒤에 숨어 있는 주제로서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발전의 연계’(nexus of authoritarianism- capitalism)였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국가들에 지속되어온 권위주의 정치의 지속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일당독재를 간접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정부가 경제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성장의 실질적 주체는 기업과 기업가임을 간과한 주장이다. 또한 정부의 공적(功績)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관(官)이 설립한 한국발전연구원(KDI) 등이 의도적으로 기업과 기업가의 역할을 배제한 일방적인 주장이다.

KDI 등 정부가 설립한 정부연구소의 일이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성과만을 포장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연구들을 국내 언론이 보도하고 한국의 사정을 모르는 외국 학계가 인용하여 만들어진 거의 신화(near myth)에 가까운 주장이다.

신중상주의(neo-mercantilism)국가론의 주창자인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산업화의 수행과 정부의 역할, 또는 국가의 성격을 연계시켜 설명하고 있다. 존슨에게 대만과 한국이 ‘강성 국가’(strong state)에 의한 경제기적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한다면, 일본은 '연성권위주의'(soft-authoritarian) 정부 하에서의 경제발전을 이룬 모델이었다. 일본의 경제발전은 리카르도(David Richardo)의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나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주장하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in the market)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산업정책(industrial policy)에 의한 경제발전의 성공적인 예라는 주장이다.

존슨은 이를 ‘시장합리성’(market rationality)에 반대되는 ‘계획합리성’(plan rationality)의 성공이라고 주장하였다. ‘계획합리성’이라는 논리에 기반을 둔 정부가 자신의 경제개발계획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정부의 산업화 계획과 추진, 그리고 국가에 의한 자본의 동원은 경제발전 달성을 위한 필수적 요인으로 간주된다. 존슨은 이어서 『통산성과 일본의 기적』(MITI and the Japanese Miracle )에서, ‘자본주의 발전국가’(CDS, capitalist developmental state) 개념을 도입하고, 그 국가는 경제에는 개입하나 시장의 원칙(market principle)은 포기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고 설명하였다.

이 자본주의 발전국가는 사회의 다른 부분에 대하여 ‘상대적 자율성’(relative autonomy)을 유지하고, 자원의 배분에 깊숙이 개입하고, 기업의 투자결정에 관여하지만 자유시장(free market)의 원칙은 견지한다. 요약하면, 시장이 국가에 의해 대체되지는 않으나, 시장합리성은 정부가 계획한 산업화의 우선순위에 제약을 받고, 유도된다. 존슨에 따르면 일본은 이 메커니즘에 의해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문제는 정부의 계획합리성을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계획은 계획으로 끝나며 시장은 결국 시장의 자율과 합리성에 의하여 작동함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일본이 그 모델이 되는 자본주의 발전국가는 한국과 대만에서는 그 전개가 약간 변화한다. 한국의 경우 발전지향적 엘리트(developmental elite)들이 경제성장을 위해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논리 하에 국내정치에서 정치적 안정(political stability)을 확보하려고 장기적인 독재(dictatorship)를 허용하게 된다.

그리고 자유로운 시장체제의 창출, 기업가의 창의적인 투자, 민주주의 발전과 노동자의 권리, 환경, 인권 등은 통치에의 필요성과 경제효율성 논리에 묻혀 무시되어 버리게 된다. 이는 찰머스 존슨이나, 앨리스 암스덴(Alice H. Amsden), 로버트 스칼라피노(Robert A. Scalapino) 등의 학자들 및 발전지향적 엘리트들은 "고도성장의 발전과 평등한 소득분배에 기초한 경제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불가피한 부작용으로 성장을 위한 상쇄(trade-off)가 되었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국가에서는 경제발전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정부와 기업 간에 노동 분업(division of labour)이 적용 된다: 즉, 정부는 계획하고 주도하며, 기업은 이를 추종하여 따라간다는 구도이다. 정부와 기업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그 관계는 위계적이며, 하향적(top-down)이었다. 따라서 경제성장은 권위주의적 리더쉽의 결과이고, 일본주식회사(Japan Inc.)라든라 한국주식회사(Korea Inc.)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기껏해야 우위에선 정부와 하위의 기업의 협조에 의한 상승작용의 결과(synergy effect)라는 주장이다.

아시아의 신흥개발국(NICs)들과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을 비교하면서, 스테판 해거드(Stephan Haggard)는 『주변부로 부터의 오솔길}(Pathways from Periphery)에서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의 성공을 설명하는 모델로 ‘동아시아 틀’(East Asian mold)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동아시아 틀’이란 "비교적 자율성을 가진 국가, 고도로 중앙화 되고 개입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수행하는 관료집단, 약화된 좌익, 그리고 길들여진 노동운동"이 그 특징이다.

경제정책 결정에서 국내의 정치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경제성장 과정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동아시아 신흥개발국들의 빠른 성장이 "공업생산품 수출을 통한 성장이라는 적극적인 정부정책"에 기인하는 패턴을 이룬다고 설명한다. 한국과 대만의 국내산업계는 이 수출지향정책으로부터 광대한 이득을 얻었을 뿐이지, 이 정책에 ‘추진력’(driving force)으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해거드는 동아시아 발전을 설명하면서 권위주의적 자본주의(authoritarian capitalism), 즉 개발독재 가설을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단기간에 한국과 대만의 기적적인 경제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권위주의적 독재자가 노동계급으로 부터의 분배에 대한 압력을 권위주의통치자의 명령으로 해결했다고 주장한다.

이 개발독재론이 기초하는 가설은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보장하는 자유경제 보다 자본주의 발전에 더욱 적합한 체제라는 것이다. 즉, 민주체제 하의 정치지도자와는 달리, 권위주의적 독재자들은 ‘분배연합’(distributional coalitions)의 압력으로부터 자율성을 갖고 장기적인 발전목표를 추구하는 경제정책을 펼 수 있다는 국가의 경제개입 합리화의 논리이다.

한국에서 권위주의 독재성장론은 민주화 이행(transition to democracy)을 위한 배경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의 경제성장이 있었기에, 중산층을 양산할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민주화 논의가 가능했고, 문민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기승전결의 신근대화 이론으로 전개된다.

한국의 경제성장에서 국가와 정부 이외의 변수를 고려한 학자는 앰스덴(Alice H.Amsden)을 들 수 있다. 경제학자 앰스덴이 『아시아의 다음 거인』(Asia's Next Giant )에서 서술한 한국 경제성장의 원인 설명은 국제적으로 주목받아온 해석이다. 앰스덴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후발 산업화의 성공 스토리'(a successful story of late industrialization)로 규정한다. ‘학습’(learning)을 통한 공업화의 성공 사례로서 제조업 발달을 통해 부와 일자리를 동시에 해결하였다고 설명한다.

Amsden은 한국의 후발 산업화의 성공 요인을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열거 한다.

(a) an interventionist state,
(b) large diversified business group,
(c) an abundant supply of competent salaried managers,
(d) an abundant supply of low-cost, well-educated labor

국가 다음으로 두 번째로 기업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한 점이 다른 정부주도의 관변학자들 또는 진보(좌파)경제학자들의 주장과 대비된다. 이러한 국내적 요인들에 추가적으로 국제적 요인으로 미국의 시장 개방과 호의적인 국제 금융시장이 추가된다.

하지만 삼성의 성장과 기여에서 보듯이 한국 경제성장의 핵심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한 것이 성공한 것이 아니라 함께 도입했던 시장의 자유와 경쟁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즉 국가의 개입에 의해 추동된 것은 사실이지만 성장은 자유시장이 만들어낸 것임이 제대로 주목 받지 못하거나 강조되지 않은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부주도의 경제발전을 주장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은 근원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보이는 손’(visible hand), 즉 정부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된다. 따라서 정부만이 독립변수로 간주되고, 기타 기업이나, 국제경제 분업구조, 국제경제의 영향, 그리고 국내 경제상황은 최소화되거나 종속변수로만 취급되었다.

이와 함께, ‘한강의 기적’이라는 한국의 경제성장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주장은 대부분 정치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었고, 경제발전에 관한 정부의 업적 선전은 한국 경제관료에 대한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고, 나아가 다소 무리한 중화학 공업의 추진으로 경제가 만신창이가 된 것이 1980년대 경제 자율화로 회복된 것은 잊혀 졌고, 국민이 ‘거의 20년 동안 권위주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참아내게’ 하는데 효과적으로 이용되어 왔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둘째, 정부주도론의 주장들은 성공적인 정책이나 산업정책의 긍정적인 측면들만을 강조하고 관심을 기울인다. 사실 과도한 정부의 산업계획이나, 투자지도, 투자조정, 자원배분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실패의 경우들은 외면되고 간과되어 왔다.

정부주도 경제성장론의 시각에서 빠진 것은 국가가 만들어낸 경제 위기들(economic crises)이다.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맞은 수많은 경제위기들은 실은 정부실패에 의한 것인데 대부분의 경우 이 부분은 사상되게 된다. 즉 정부실패가 정부주도 학설에서는 철저히 감춰지고 존재하지 않게 된다.

또한 정부주도론의 주장들은 지나치게 ‘정적’(static)이다. 강한 정부는 사회로부터 자율성이 있고, 이 자율성은 영원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사회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배제한 가정이다. 강한 정부 개입주의 정부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산업화 초기의 정부의 역할이 효과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역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바뀌거나 줄어들게 마련이다.

산업정책이나 금융 신용분배를 통해 행해졌던 정부의 "강한 지도"는 정확히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주로 적용된다고 하겠다. 1970년대 말 정부의 중화학공업정책 추진이라는 강한 정부개입의 폐해를 경험한 기업들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에 경제개혁을 요구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전두환 행정부는 스스로 시장 자율화를 추진해 나가게 된다. 기업 역시 스스로 정부의 개입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본축적 방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980년대 이후 진행된 경제자유화와 민영화는 정부와 재계의 관계에서 정부주도력을 약화시켜 왔다. 반면에, 대기업은 경제와 사회를 주도하는 헤게모니 세력(hegemonic power)으로 등장한다. 점차 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이 감소함에 따라, 경제전반에 대한 정부의 ‘지도’(direction)는 대기업과 정부 사이의 ‘협의(consultation)와 합의(consensus)’로 점차 변화되어 왔다. 그리고 정부와 대기업 사이의 협조관계가 매우 깊게 확립되어 ‘지도 자본주의’(guided capitalism)를 주도했던 국가는 이제 대기업의 ‘추종자’(follow-along)가 되어가는 상황으로 변하였다.

정부주도학설은 이러한 경제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결함이 있다. 마지막으로 정부주도론이 강조하고 있는 산업정책이나 ‘하향식’(top-down) 접근은 정부정책의 목표를 주로 설명할 뿐이지 정책의 실제 결과나 자본축적 과정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더구나 현실적으로 정부의 정책이 경제적 결과(economic performance)의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요약하면, 경제발전에서 정부주도를 과도하게 강조하다보니 ‘기업의 자체적 노력에 의한 자본축적’이라는 변수는 배제 되던가 ‘종속변수’(a dependant variable)로 과소평가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 볼 때 정부주도 경제성장 모델은 분석이 ‘불완전’(incomplete)하다. 그러므로 한국 경제성장을 보다 완전히 설명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무시되어왔던 ‘자본가’와 ‘기업가’라는 요인을 다시 분석에 불러오고, 또 자본축적을 위한 기업전략을 탐구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마치 국가가 계획하면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고는 ‘치명적 자만’의 핵심이다. 한국 경제성장의 경우 국가의 성장계획의 많은 사례가 시장의 필요를 직시한 기업가가 최고 통치자를 설득하고 움직여서 시작된 것이고 또한 실제 성장을 주도한 것은 기업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를 ‘기업주도 경제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러한 현상을 일부학자들은 기업들이 자본동원의 능력과 세계시장 개척의 능력을 가지게 된 최근의 현상으로 이해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승만 정부 시절과 1961년 이후 박정희 정부 시절에도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정부가 기업의 활동을 도와주고 자신의 역할을 주변부에 둘 때 경제는 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성 - 기업주도 성장과 경제발전

본 글이 기초하고 있는 가설은 슘페터(Joseph A. Schumpeter)가 주장하는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또는 기업주도(business initiative)가 한국경제성장의 주요한 요인이며 한국경제가 지속적인 역동성을 갖게 하는 결정적인 동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본 가설은 두 가지 조건을 전제한다. 첫째, 기업가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국가(정부)의 긍정적인 역할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부의 산업정책에 의한 기업투자에의 개입이 기업의 창의력, 또는 기업가정신의 발현을 저해했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성장은 외형성장 위주로 파행적일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일부 학자들이 한국자본가의 특징을 ‘정치성’(political capitalist)에 두고 있지만 이는 기업 성장사의 긴 흐름을 고려하지 않은 단기적인 특징일 뿐이다. 정치적 요인이나 정치권 로비에 치중하는 산업화 초기에의 기업 성공은 잠깐이고 이러한 기업의 성장은 지속될 수 없다.

한국경제 성장에서 10대 대기업(집단)이 항상 바뀌어 왔음은 이를 중명한다. 다시 말해, 정치성에 치중한 기업은 대부분 시장의 힘에 의해 자연히 도태되어 사라졌다. 김우중의 대우가 그러하고, 정주영 회장에 의한 현대의 대북투자, 정상회담 자금조달 등에 의한 현대그룹의 위기가 그러하며, 최근에는 정치활동에만 치중했던 성완종 회장의 경남기업이 그러하다.

정부의 재정지원과 특혜, 그리고 기업전략이 결합되어 산업발전이 이루어진 경우가 많은데, 이때에도 우리는 정부의 지원과 특혜를 주로 논의해왔지, 기업의 생존의 노력과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자했던 기업의 전략은 절대적으로 소홀이 취급되었으므로 이 부분을 면밀히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정부주도학설은 이러한 경제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결함이 있다. 마지막으로 정부주도론이 강조하고 있는 산업정책이나 ‘하향식’(top-down) 접근은 정부정책의 목표를 주로 설명할 뿐이지 정책의 실제 결과나 자본축적 과정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슘페터는 일찍이 기업가의 혁신이 경제성장(변동)의 한 원인이 됨을 주목하였다. 자본주의 성장에의 성공은 이러한 창조적인 기업가적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업가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물론 기업가의 혁신적 역할은 기업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다. 슘페터가 열거한 다섯 가지 혁신은 다음과 같다. 즉, (1) 신상품의 개발, (2) 신시장의 개척, (3) 신자원의 발견과 개발, (4) 신기술의 발명과 산업화, (5) 신제도의 창출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업가는 제1차 산업혁명을 이루어낸 신상품의 ‘발명가’(inventor)라던가 제2차 산업혁명을 이룩해낸 ‘혁신가’(innovator)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기업가적 역할은 ‘학습’(learning)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학습이란 외국의 신상품 그리고 그 신상품의 생산과 공정기술을 모방하고(copying), 빌려오고(borrowing), 차용하고(adapting), 개선시키는(improving)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기업가가 슘페터가 열거한 혁신에 정확히 맞지는 않지만 앰스덴이 주장하듯이 혁신의 학습에 뛰어났고 현장의 경험을 비용절감이나 신제품 개발에 적용하는데 혁신적이었다.

한국의 기업가는 특히 경영과 관리에 현장(shop floor)을 강조하고 현장의 엔지니어를 경영과 관리에 차용하여 현장 임파워먼트를 실현하고 수동적인 학습에서 창조적인 학습으로 나아갔다. 대기업 집단은 초기에는 정부의 자본에 의지하였지만 점차 대기업집단 구조를 통하여 자본 및 인력 조달을 이루어낸다. 이러한 전체적인 기획에 한국의 기업가는 탁월했다.

정부주도 성장론자들은 집요하게 기업이 정부가 장악한 은행들의 자금에 의존했음을 강조한다. 물론 정부는 관치 금융을 통해 대기업의 자본 조달을 통제한 것은 맞지만 이는 일정한 시기, 즉 일부 기업의 초기의 투자에 한정된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성장하면서 보험업이나 백화점 사업 등 현금 사업을 자회사로 확보하며 스스로 금융 독립을 도모하고 점차 국제 금융으로부터 직접적인 차입에 나서기도 함을 간과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급속한 한국의 산업화를 이룩해낸 중요한 요인들의 하나는 기업가들이 이룩한 사기업, 특히 대기업과 대기업 집단의 성장이다. 한국의 대기업 집단은 성공적으로 상품 생산량을 증가시켰으며, 상품의 수출을 확대하였고, 경제성장에 대한 이니셔티브도 가속적으로 증가시켜 왔다.

삼성은 한국 기업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업의 하나이며 가장 큰 기업집단의 하나이고, 한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경제단위이다. 오늘날 삼성은 한국사회와 국제적으로도 강한 경제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삼성은 한국경제에서 자본 축적의 원형적인 특징을 보인다.

수입대체 산업에의 투자에서 국내시장과 수출시장을 동시에 개척하였으며, 종합무역상사를 최초로 도입하였고, 중화학 공업에 투자하였으며, 반도체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대표적인 한국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비서실과 전략기획실의 도입, 공채 제도, 종업원 사주 제도 등 수많은 제도를 도입하여 다른 기업의 벤치 마킹의 대상이었다. 한국의 독자적인 기업제도를 형성한 기업이라고 하겠다.

나아가 삼성그룹의 성장은 한국의 산업성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경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삼성의 성장을 이해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크게 한국경제 성장의 원동력으로 대기업 집단의 역할을 드는 데는 이론이 거의 없다. 이는 한국경제의 성장과 대기업집단의 팽창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 진다는 뜻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삼성의 성장으로 한국의 경제성장의 일면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어느 한 산업부문의 성장을 통한 한국경제 성장 분석만큼이나 하나의 대기업집단의 분석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삼성이 이승만 행정부 시절 3백 산업을 주요 업종으로 선택한다. 이는 당시의 생활물자 부족이라는 현실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기업이 자신의 능력과 경제 상황을 보고 가장 적절히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일부 논자들은 삼성이 정부가 주도했던 수출이 아니라 내수 산업을 기반으로 자본을 축적했다고 비난하지만 내수 시장에 근거하지 않은 수출 주도는 기업가에게 위험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수입대체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의 정책이라고 해서 수출주도만으로 갈 수만은 없었다. 수입대체냐 수출주도내의 문제는 시장에서 기업이 결정하는 것이지 국가가 정책으로 민다고 기업이 무조건 따라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1953년이 되어 삼성이 수입대체산업에 투자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의 휴전조약이 체결되고 난 뒤, 수입업자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더 이상 수입으로부터 높은 이윤을 창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상업적 기업 활동이란 수입무역이었다. 이는 1952년 3월 1일자 한국무역협회 회원명부에 기재된 거의 대부분의 재계 지도자들이 수입업에 관여하고 있음으로 알 수 있다. 과다한 수입 업자들 간의 경쟁으로 무역업은 점차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삼성은 이미 정부가 외화를 절약하고 경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수입대체산업화로 경제정책을 전환할 것을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삼성은 무역업으로부터의 이득에 따른 자본축적이 있었고, 새로운 투자대상을 물색 중이었다. 나아가 국내기업 간 경쟁으로 인해 수입에 필요한 달러의 확보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공식적인 원-달러환율은 6,000:1이었음에 비하여 수입업자들이 수입제품을 판매할 때 환율은 50,000:1까지도 올라갔다. 그러므로 수입업자에게 달러의 확보는 이윤의 확보와 같은 의미였다.

달러를 확보하기 위하여 삼성은 1957년 2월 효성무역을, 1958년 2월에는 근영무역이라는 무역회사를 추가로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수입달러의 확보는 점차 어려워졌다. 이로 볼 때, 삼성이 이승만정부와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거의 자유롭게 외화를 대부받거나 사용할 수 있었다고 비판하거나 기술하는 것은 과장이며 왜곡이다.

삼성은 6·25전쟁으로부터 국내경기가 호전될 것으로 예측하고, 수입대체산업의 설립이 필수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1953년에 제일제당을, 1954년에는 제일모직을 설립하여 다각화한다. 왜 제당업에의 투자인가? 삼성물산은 무역업에 진출해있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수요가 가장 많은 품목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 삼성은 수입대체산업으로 제지업, 의약품, 제당업의 세 가지 업종에의 투자를 고려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삼성물산의 주요 수입품목으로 이들 품목에 대한 국내생산업자들의 상황과 수요, 판매망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면 1950년대 산업자본의 형성과 삼성의 자본축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1950년대의 경제 상황은 해방 이후 일본으로 부터의 단절, 한국전쟁으로 인한 파괴, 높은 인플레-1951년부터 1952년 150% 그리고 1952년부터 1953년 217%의 도매물가 상승-와 물자의 부족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러한 경제상황은 국내 수입대체산업의 건설을 촉진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모두 설탕과 모직의 수입을 대체하면서 이익을 축적해 나아갔다. 1950년대의 이러한 수입대체산업의 기반 없이, 1960년대의 수출주도 경제로의 전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정희 행정부 기간의 경제계획과 산업정책을 강조하면서, 반대로 1950년대의 경제를 단지 전쟁의 파괴, 높은 인플레, 정경유착으로 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1950년대의 무역업의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삼성물산은 수출주도 산업화의 중요한 첨병이 될 수 있었다.

두 분야의 수입대체산업을 포함한 무역업, 제당업, 섬유업의 세 가지는 1950년대 삼성 자본축적의 방식을 대표한다. 수입대체 산업인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설립으로 삼성의 자본축적이 무역에 기초한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삼성의 수입대체산업은 원당, 소맥, 울탑 등 수입 원료에 기초하였다.

그리고 밀가루, 설탕, 소모사 생산에 필요로 되는 원료의 비용은 지대했다. 소맥가격이 소맥분 생산비의 91-95%를 차지하고, 원당은 설탕생산비의 90-97%, 그리고 울탑이 67-74%를 점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여, 원자재를 확보하는 노력이 생산을 합리화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노력만큼이나 중요하였다. 이는 삼성이 1950년대 중반에 수입대체산업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관여했던 산업의 성격상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의 측면을 모두 가졌다고 하겠다.

1961년 5월 군사 쿠데타(초기는 쿠데타였지만 훗날 혁명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후 혁명군사평의회는 혁명군사정부의 존재이유(raison d' tre)로서 조속한 경제재건을 설정했다. 경제개발은 군사정권의 체제 정당성 위기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군부는 재벌(대기업)을 처벌하기보다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주요 산업자본가들은 ‘외자 유치를 통한 경제성장’ 전략을 정부가 선택하도록 정부의 정책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으로써 이병철은 1960년이래로 외국 상업차관을 가지고 산업시설을 건설하는데 깊은 관심을 보였다. 상업차관을 통한 산업화라는 한국경제인협회의 제안은 일부 이병철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 뒤로 한국경제인협회는 ‘민간외자도입교섭단’ 2팀을 구성하여 1961년 11월-5.16군사쿠데타 6개월 후-미국과 유럽에 이들을 파견했다. 대표단들이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 돌아온다.

이에 기초하여 1962년 1월 ‘울산공업단지 조성안’을 제출했고, 박정희 군사정부는 이 안(案)을 받아들였다. 이후로 울산산업단지는 공업단지들의 모델이 되었다. 공업단지의 조성은 5.16군사정부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한국경제인협회의 구상에 그 시초를 찾아야 한다.

1960년대 후반 삼성은 제당업과 모직업 분야로의 사업 확대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때문에 새로운 사업영역의 투자대상을 모색하게 된다. 당시 산요회장 토시오 이우에는 전자산업이 갖는 잠재성을 이병철에게 일깨웠고, 이병철은 전자산업에 진입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수입대체와 수출이 가능하다는 견지에서 전자제품 생산은 유망한 산업이었다.

삼성은 일본 산요전자와 공장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은 국내 전자 제조업자들의 조직인 한국전자공업협회와 경제기획원, 상공부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았다. 한국전자공업협회는 삼성이 재정적 능력뿐 아니라 규모의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원들의 국내시장 점유율이 줄어드는 것을 우려했다. 이병철은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하여 전자산업을 개방하도록 유도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자산업의 진입개방을 지시하였고 이후 삼성은 진입장벽의 어려움을 해결했다고 고백했다. 삼성의 전자산업 진입의 조건은 이후 삼성-산요전자와 삼성-NEC가 생산하는 제품 전량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삼성전자는 1969년 1월 설립되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수출 필요조건을 성공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했다. 삼성은 국내시장에서 제품 판매가 가능하도록 허락된 이후에야 적자에서 회
복하게 된다.

1960년대 삼성은 백화점(신세계, 1963년), 부동산개발회사(중앙개발, 1963년), 생명보험사(동방생명, 1963년), 그리고 펄프 제지산업(전주제지, 1965년)을 연속적으로 설립하면서 투자액 회수기간이 빠른 내수시장 지향적 사업에 진출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시장(international market) 개척의 성공으로 삼성물산은 1969년에 한국 최고 수출업체로 지명된다. 그럼에도 삼성의 초기 본원적 축적기반은 수출보다는 내수시장이라고 하겠다. 정부의 수출주도에 따라 기업이 성장했다는 공식은 기업 사정에 따라 다름에도 일반화를 시도한 주장이다.

삼성은 정부의 종합무역상사(General Trading Companies)제도 도입 결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다. 일본 무역회사들의 성공에 고무된 삼성은 박정희 행정부가 1975년 4월 30일 ‘종합무역상사 지정 지침’을 발표하기 이전에 종합무역상사체제 도입을 모색했다. 삼성은 1970년 7월 정부측에 ‘종합무역상사로의 육성을 위한 대책 및 건의’를 제출했고, 이 건의안은 일본의 대표적인 종합상사인 미쓰이 물산(三井物産)의 구조와 활동을 소개하면서 한국에서도 무역업의 재편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후에 상공부는 이 건의안의 상당 부분을 받아들였다. 때문에 1975년 5월 19일 종합무역상사로 맨 처음 등록한 회사는 삼성이었다. 1977년 삼성 그룹은 6억2천만 달러를 수출했고 이는 한국의 총수출 의 6%에 달하는 양이었다.

1972년 후반, 삼성은 자신의 사업구조에서 중공업의 비중을 높이기로 결정하면서 『삼성경영 제2차5개년계획 (1973-1977)』에 조선과 중화학을 포함하는 중화학공업으로의 진출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삼성은 박정희 유신정부가 중화학공업 부문의 투자를 한편으로는 유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압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문에의 투자를 꺼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삼성은 단지 정부의 인센티브만을 따르면서 중화학공업 부문에 투자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대신 수입대체산업으로부터 안정적인 이윤을 확보하는 것을 이윤추구를 통한 자본축적 방식으로 정립했다.

   
▲ 삼성은 이미 정부가 외화를 절약하고 경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수입대체산업화로 경제정책을 전환할 것을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그리고 주목해야할 점은 삼성과 박정희 정부와의 관계가 한국비료 사건 등으로 소원했다는 것이다. 이는 삼성이 정부의 산업정책이나 금융기관의 대출에 무리하게 의존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고 그 때문에 기업 성장이 견실해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의 강력한 중화학공업 투자 요청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다른 기업들보다는 훨씬 늦게 건설업에 진출했고 초기에는 정부발주 프로젝트 대신 해외 아파트건설에 초점을 두었다.

또한 이윤이 보장되는 방위산업에도 상대적으로 늦게 진입하였다. 사실 1970년대 삼성이 투자한 중화학 공업은 거의 모두 실패했다. 이로 인해 1980년대에 들어서자 삼성은 자신의 산업구조를 변화시켜야하는 입장에 있었다. 1983년, 전자제품의 수출의 한계와 중공업 부문의 투자한계 때문에 삼성의 이병철은 반도체 산업에 집중 투자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반도체 산업에서 삼성이 성공한 사례는 한국 경제발전에 있어 대담한 기업가 정신과 기업 이니셔티브의 좋은 예이다. 일본과 미국의 첨단기술회사들이 이미 반도체산업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성이 반도체를 생산할 것이라고 발표했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적이었다.

회의적 평가는 당연했다. 우선, 반도체산업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고 짧은 제품 주기로 인해 위험부담이 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창기 투자로부터 10년 후 삼성반도체통신은 메모리용량 부분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가 되었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삼성의 대규모 투자는 하이테크 산업이 가지는 잠재성을 확신한 사업가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1984년 삼성은 국내에서 자금을 동원하기가 용이하지 않자 직접 256K 반도체 칩 생산시설을 마련하기 위한 자금으로 국제금융시장에서 1억 4천만 달러의 차관을 이용했다. 1억불은 홍콩에 있는 10개 은행들로부터 4천만 달러는 도쿄 은행이 이끄는 일본은행단으로부터 빌렸다. 즉 정부의 산업정책 수행에 따른 금융기관을 통한 자금 조달이 아니었고 기업의 자체적인 노력에 의해 반도체 산업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반도체 산업의 위험부담을 의식한 삼성은 DRAMs의 대량생산이라는 일본 성공의 진로를 따르도록 결정했다. 삼성은 1981년 64K DRAM과 1985년 256K DRAM의 대량생산에 성공했다. 1984년, 일본 반도체 제조업자가 주도한 기억회로(memory circuits) 특히 256K DRAM의 가격이 하락하였기 때문에 삼성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시장에서의 손실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제품 디자인을 따라잡고자 애썼으며 제조과정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했다. 호브데이(Hobday)에 의하면 1988년 반도체 산업에 총 8억 달러를 투자한 것은 도박에 가까운 투자였다. 삼성은 국가나 정부의 지원 없이 독자적인 판단에 의하여 대규모 투자를 진행한 것이다. 이후 삼성전자의 반도체 투자는 기업가의 독자적인 사업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삼성을 포함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성공한 요인을 변병문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첫째, "초창기의 상당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대량생산을 위한 연구와 개발, 설비에의 대담한 투자"; 둘째, "제조업자들의 메모리 장치와 같은 몇몇 전략적 품목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셋째, "동일 재벌 그룹 내에서 금융을 포함하는 다른 그룹계열사들의 지원"; 넷째, "한국기업이 가지고 있는 양질의 인적자원"; 마지막으로, "연구기술인력 훈련을 위한 정부의 보조". 연구기술인력 훈련을 위한 정부의 보조를 제외하고는 정부의 지원이 반도체 산업 발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다. 이렇게 삼성그룹 내 다른 회사를 통해 초창기 손실을 완화시키면서 내린 대담한 투자결정은 삼성의 반도체산업의 성공에 있어 결정적이었다.

삼성의 반도체산업 성공은 기업전략(corporate strategy)에 기인한 것이었다. 기업전략이란 과거 일본이 행했던 것처럼 "미국회사로부터 기술을 사들이고 해외의 확실한 수요자 없이도 수출을 위한 생산"전략이었다. 비록 삼성 반도체산업이 후발주자에서 DRAMs의 ‘기술 혁신 선두주자’가 되었지만 중요 제조설비 시설은 일본에 완벽하게 의존해 왔다는 것도 함께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삼성의 해외투자가 주로 무역이었던 1970년대와 달리 1980년대는 제조업 즉 전자와 섬유, 제조업에 대한 해외직접투자 시작되었다. 1982년 삼성은 포루투칼에 50만 달러를 들여 칼라 TV 조립공장을 건설하였다.

이 공장 설비의 목적은 유럽공동시장(EEC)에 발을 들이기 위함이었다. 삼성전자는 1984년 미국 뉴저지에 2천5백만 달러를 들여 연간 칼라 TV 100만대와 40만대의 전자레인지를 생산할 수 있는 두 번째 공장을 열면서 미국과 북미 시장 공락에 나섰다. 대부분 삼성의 해외 투자는 기술적 이점을 가지고 있던 섬유류, 컴퓨터 모니터 그리고 전자레인지에 집중되었다.

한편으로 삼성은 서유럽과 미국에서 진행되는 무역 블럭을 벗어나기 위해 1982년 포루투갈, 그리고 1984년 뉴저지에, 1986년 영국 등 유럽국가에 투자했다. 또 한편으로는 제한적이고 공급과잉 된 국내시장을 벗어나 새로운 시장에 접근하며, 또 한편으로는 저임금 노동력을 찾아 이동하는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요약하면, 삼성그룹은 국내적 자본(domestic capital) 축적 전략에서 국제적 자본(world capital) 축적으로 스스로 전환하였다.

삼성은 정부주도 경제성장론이 주장하는 정부의 산업정책에 부응하는 전략으로 성공했다고 보기 힘들다. 자본 나름의 축적의 전략으로 정부의 산업정책이 옳다는 판단이면 산업정책에 부응하였고, 도리어 많은 경우 삼성이 주도적으로 정부를 설득하여 만들어낸 산업정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또는 정부의 제약을 극복하고 신사업의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성공한 것이다.

삼성이 업계의 반대와 정부의 반대에 굴복하여 1970년대 전자산업에 진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삼성전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초 정부를 설득하여 반도체에 집중 투자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메모리 반도체와 스마트 폰 세계1위 판매량의 삼성전자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시장원리에 어긋나는 진입 장벽은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명징한 사례이다. 나아가 정부는 기업들에 중화학에 전력투구할 것을 주문하고 자금을 대주었다.

그러나 삼성은 자신의 체질에 맞고 시장을 고려해서 신중해서 들어갔고 그것이 기업의 안정적 자본축적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는 대북사업에 삼성이 끝까지 발을 들여 놓지 않았기에 정치에 휘둘리지 않은 계기로 작동하였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삼성의 대북투자를 적극 권유하였고, 북한도 삼성의 신기술을 원하였지만 삼성은 투자를 위한 사전 조사와 계획 짜기에 시간을 보내며 정치권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일찍부터 북한에 투자했던 대우는 투자에 어려움만 겪고 그것을 극복하느라 제대로 경영에 신경 쓰지 못하였고 결국은 기업이 공중 분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반면에 현대는 북한의 김정일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통 크게 대북 투자’하였다. 금강산 관광도 시작하고 남포에 투자도 하겠다고 하고 개성공단에도 공을 들였다.

그러나 대북사업은 정권과의 연계로 후계자로 지명된 정몽헌 회장의 자살로 세계적인 대기업이었던 현대건설을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반면에 삼성은 이미 한국비료 사건으로 정치권과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하는 교훈과 지혜를 가졌었다.

삼성은 정부가 계획한 틀을 벗어나 기업의 독자적인 상황 판단에 근거한 투자를 지속하였다. 그랬기에 삼성은 자본축적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었다. 결국 삼성의 성공적인 자본축적은 정부주도 성장론과는 달리 정부의 산업정책에 의한 투자 지도와는 약한 연결고리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김인영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