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파탄 '세금식'으로 가면 후손들에 짐…세대전쟁 비극 막아야

   
▲ 박종운 연구위원
휴지가 된 공무원연금개혁 합의

지난 5월 2일에 공무원연금 개혁에 관하여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합의가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그 내용이 적절한가에 관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그에 따라 국회에서의 법 통과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합의 내용에 따르면, 공무원들이 연금 준비금으로 내는 돈을 5년에 걸쳐 현행 7%에서 9%로 올리고, 받는 돈을 20년에 걸쳐 현행 1.9%에서 1.7%로 0.2%p 깎는다는 것이다. 향후 70년간 재정절감효과가 333조원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더 내고 덜 받음’으로써 연금재정의 건전성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분석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합의 내용에 ‘월권’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합의하는데, 갑자기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던 국민연금에 관한 내용을 끼워넣었다. 국민연금 재정파탄을 막기 위해 과거 노무현 정부 때 연금 지급 시 소득대체율을 60%에서 40%로 내리기로 했던 것을 이번에 50%로 인상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친노세력’이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이 놀랍다. 물론 (한미FTA반대, 제주 해군기지 반대 등) ‘반노’적 노선을 걸었던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그 친노세력이 장악한 새민련이 이제는 국민연금 재정건전성에 역행하는 제안까지 함으로써,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반노’적 노선을 걸었다. 그것도 국민적 논의를 거치는 과정도 없이 밀실에서의 합의만으로….

그러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인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민연금 납입액을 높이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 때문에, 합의문은 휴지로 되었다. 그리고 공무원 연금개혁에 혼선을 야기한 책임을 지고, 이 합의안을 추인했던 것으로 오해받았던, 조윤선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사퇴했다.

   
▲ 공무원연금이나 국민연금의 해결책은 강제저축의 취지답게(!) 저축 본연의 모습을 갖추도록 하는데 있다. 저축 본연의 모습은 바로 연금의 개인계정화에 있다. 자기가 저축한 것을 자신이 노후에 찾아 쓰도록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노후에 자신이 받는 돈을 알뜰하게 쓰는 문제만 있지, 자신이 낸 연금이 파탄나서 자신이 낸 돈을 찾을 수 없게 될 가능성은 없다. /사진=연합뉴스
연금파탄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책은 연금의 개인계정화에 있다

5월 2일의 여야 합의에서 공무원 연금 개혁으로 ‘절감된 돈’을 국민연금에 지원하자는 생각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정부재정 상의 압박으로 인하여 연금 재정 지원 용으로 들어가는 돈을 줄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금개혁의 문제는 단순히 재정을 절감하자는 것이 아니고, 연금제도의 파탄을 방지하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연금의 파탄 방지에 대한 문제는 공무원 연금이나 국민연금 모두에게 해당된다.

사실 공무원 연금이나 국민연금 모두 따지고 보면 그 성격은 ‘강제저축’이다. 그냥 내버려두면 ‘어린 백성이(?)’ 스스로 알아서 노후를 준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국가가 저축을 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다만, 그 저축에 사용자가 (공무원의 경우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50%를 얹어주는 선물을 주게 하고 있다. 이처럼 납부 단계에서부터 이미 선물을 주는 식으로 설계되어 있지만, 더 큰 선물은 연금 수령 시에 받게 되어 있다. 사망할 때까지 기간 제한 없이 연금을 지금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설계했던 이유는 공무원 연금이 시작된 1960년이나 국민연금이 시작된 1988년 당시에는 국민들의 퇴직 후 기대 수명이 짧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영양이 충실해지고 의료적인 도움이 좋아져서 건강하게 90세 100세까지 가는 것이 흔하게 되었다. 따라서 약 9%(4.5%분담), 14%(7%분담)의 연금을 약 30년 내고 퇴직 전후의 소득을 기준으로 40%의 소득을 연금으로 약 40년간 준다는 연금설계는 구태여 계산해보지 않고 척 보기만 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국가가 개인에게 저축을 강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냐에는 의문이 있지만, 일단은 그 문제는 제쳐두고 현재의 연금개혁의 방향이 어떤 쪽이 바람직한가에만 집중하면, 바로 이러한 ‘선물 주기’ 식의 잘못된 연금 사고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연금개혁은 여태까지처럼 ‘더 내고 덜 받는’ 식의 개혁이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런 개혁은 연금파탄시기를 뒤로 미룰 뿐인데다, 각 정부마다 재정지원금을 줄이기 위한 개혁안을 끊임없이 시도하게 만들고, 그때마다 사회적 갈등을 계속해서 유발시키는 안이기 때문이다. 미봉책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해결책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해결책은 강제저축의 취지답게(!) 저축 본연의 모습을 갖추도록 하는데 있다. 저축 본연의 모습은 바로 연금의 개인계정화에 있다. 자기가 저축한 것을 자신이 노후에 찾아 쓰도록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노후에 자신이 받는 돈을 알뜰하게 쓰는 문제만 있지, 자신이 낸 연금이 파탄나서 자신이 낸 돈을 찾을 수 없게 될 가능성은 없다.

이러한 연금 개인계정화의 우수 사례는 칠레와 싱가포르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 칠레의 경우에도 강제적인 연금제도가 있지만 연금의 계정은 철저하게 개인화되어 있다. 강제 저축임에도 연금 운용 기관을 개인들이 선택하게 되어 있다. 개인들은 연금운용 회사들의 실적에 따라 여기저기로 옮길 수 있게 되어 있다. 여기서는 수익률의 다과는 있을지 몰라도, 연금의 파탄가능성은 없다.

싱가포르에서는 국민들이 약 25%에 달하는 세금 외에 약 25%에 달하는 연금적립금(CPF, Central Provident Fund)을 부담하고 있다. 그런데 비율이 상당히 큰 이 적립금은 인생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 교육, 주택구입, 그리고 의료 및 노후생활에 쓰도록 항목별로 나뉘어 있고, 각각의 경우에 찾아서 쓸 수 있게 되어있다. 세금을 재원으로 한 국가 재정으로 이 적립금에 1%의 우대 금리를 얹어주는 ‘선물’을 해주지만, 계정은 각 개인별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낸 적립금이 파탄 날 염려는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서 적용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우수 사례들이다. 이러한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에서처럼 연금을 주느라 재정이 파탄나고, 국가위기 상황에서도 연금을 받으려는 시위가 일어나는 상황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낸 연금은 남이 쓰고, 자신이 막상 연금을 받을 때면 연금 재정이 없다면, 누구라도 저항을 하지 않겠는가?

   
▲ 자신의 노후는 자신이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생계가 곤란한 지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노령연금도 있고, 사회복지제도도 있다. 여유있게 놀러 다니는 일에 후손들의 납입금을 빼먹어서는 안된다. 연금제도가 지켜야 할 도덕은 후손의 돈을 도둑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연합뉴스
연금제도의 도덕 – ‘세대 간 연대’라는 미명으로 후손의 돈을 빼먹으려 해선 안된다

대한민국 부모들의 대부분은 자녀교육에 헌신적이다. 심지어 노후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보다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동원하여 자녀들의 교육에 돈을 쏟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대학교육은 자녀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부모의 돈으로 한다.

미국에서는 <국가업무 종사자의 재적응 지원법. 속칭 제대군인 원호법(GI Bill of Rights)>에 의해서 군대 복무를 한 사람은 각 구성국들의 국립대 학비를 면제받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그러한 제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 최근 자녀들의 효심(孝心)에 기대기에는 세상이 달라졌다고 하고, 스스로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심심치 않게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렇다.

대한민국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상환 계약서, 혹은 효도 서약서를 받고서 지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양육에 대해 상응하는 효도를 기대하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자녀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을 때는 움직이면서 일을 해서 먹고 살려고 한다. 이들에게는, 조선시대 대기근 때에는 간혹 있었지만, 자녀들을 팔아서라도 자신이 먹고 살겠다고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최근 청년층 실업에도 불구하고, 또 청년층의 3D 업종 기피에도 불구하고, 장년층 취업이 늘어나고 장년층의 3D업종 도전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부모세대의 적극적인 마음의 결과다.

가족의 경우에도 자녀에게 효도를 강제하기보다는 자신이 더 일하려고 하는 마당인데, 사회의 경우에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효도를 하라고 강제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지금 청년층은 자신들의 부모를 모시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부모를 모시는 것까지 해야 할까? ‘세대 간 연대’라는 이름은, 비록 말하고 듣기에는 아름답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녀가 아닌 타인의 자녀에게서 봉양을 받으려는 것으로서 온당하지 않다. 자신이 양육하지도 않았으면서 그 대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도덕 원리상으로도 맞지 않다.

일찍이 플라톤이 스파르타의 공동양육 사례에서 감명을 받고, 자녀들을 모든 사람들의 자녀로 키워야 한다고 했을 때,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자녀들은 아무도 자신의 부모들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자신들을 키운 사람이 아닌 사람을 봉양해야 한다고 강제한다면 그것은 현실에서는 제도로서 지속성을 갖기 힘들 것이다. 플라톤이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에 가서 자신의 정치학 이론을 실험하였지만,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는 점도 기억하자.

일부에서는 ‘세대 간 연대’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연금 재정이 파탄나게 되어 지금 연금을 붓거나 앞으로 부을 사람들이 자기가 낸 돈을 찾아가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자기가 낸 돈을 도둑질 당하는 것에 분노하지 않는 이유는 ‘세금연금’을 대안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연금을 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연금 재정이 파탄났을 때 현행 ‘적립식’이 아닌 ‘세금식’으로 가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자녀세대가 봉양을 하라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다음 세대들이 결의한 바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결의도 하지 않은 부담을 할 수는 없다. 더 더군다나 자신을 양육한 사람도 아닌 사람들을 봉양하는 부담을 안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세대 간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연금재정을 불입했지만 파탄이 난 세대와 연금을 지급하기 위해서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세대들 간의 전쟁. 이런 비극의 씨앗을 후손들에게 심어주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노후는 자신이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생계가 곤란한 지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노령연금도 있고, 사회복지제도도 있다. 여유있게 놀러 다니는 일에 후손들의 납입금을 빼먹어서는 안된다. 연금제도가 지켜야 할 도덕은 후손의 돈을 도둑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종운 시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