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노력에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물음 던지는 능력'
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 복거일 소설가

우리 사회에서 시험을 겨냥한 교육이 학생들의 창조적 능력을 무디게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입학시험에서 나오는 문제들이 거의 모두 '다지 선택형’과 같은 '객관식’ 시험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는 얘기는 특히 자주 들렸다. 그래서 이른바 '주관식’시험이 나왔다.

주관식 시험은 주어진 답안들 가운데 맞는 것을 고르는 시험을 겨냥한 교육의 폐해들을 상당히 줄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시험을 겨냥한 교육이 품은 근본적 문제를 푸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선 거의 인식되지 않지만, 시험을 겨냥한 교육의 근본적 문제는 학생들이 주어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한 지적 활동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주관식 시험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함은 분명하다.

창조적 노력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어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물음을 던지는 능력이다. 풍요로운 결과를 약속하는 주제를 고르는 일에서부터 새로운 각도에서 문제를 살피는 일에 이르기까지, 창조적 노력의 모든 단계들을 떠받치는 것은 스스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힘이다.

새로운 정보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날수록 정보원에 관해 많은 것들을 알려주며, 큰 가치를 지닌 발견들은 정설로 자리 잡은 가설들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것들이다. 자연히, 정설에 따라 예상된 자료들에 접근하는 것으로는, 다시 말하면, 주어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으로는, 큰 가치를 지닌 발견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과학사가(科學史家) 버널(J.D.Bernal)이 지적한 것처럼 과학적 발견에서 흔히 가장 어려운 대목은 우연한 발견의 참뜻을 인식하는 것이다. 정설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얽매이지 않은 마음만이 정설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현상들에 주목하고 그런 현상들을 제대로 설명할 길을 찾게 된다. 우연한 발견의 참뜻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로는 '프라운호퍼 흡수선(Fraunhofer absorption lines)'의 발견을 들 수 있다.

1814년 독일 뮌헨의 광학기구 회사에서 일하던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Joseph von Fraunhofer, 1787~1826)는 망원경 앞에 프리즘을 놓고서 창문 차양의 틈새로 들어온 빛을 살폈다. 예상한 대로, 빛을 프리즘에 의 회절(回折)되어 무지개 빛깔들이 생겼다.

그때 그는 무지개 빛깔들에 수직이 되게 둘레보다 어두운, 아주 가는 금들이 난 것을 보았다. 그 금들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프라운호퍼는 그것들이 햇빛에 내재하는 것이지 그의 실험 과정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그것들을 열심히 관측하여 600개가량의 금들을 표정했다.

그리고 가장 뚜렷한 것들엔 이름을 붙였다.(현재 그런 금들은 2만개가 넘게 알려졌는데, 프라운호퍼가 붙인 이름들은 대체로 살아남았다.) 이어 그는 달과 금성, 화성을 관찰하여 그 빛들의 스펙트럼에서 나온 금들이 햇빛에서 나온 금들과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반면에, 다른 별들의 스펙트럼에서 나온 금들은 햇빛의 그것들과 다를 뿐 아니라 서로 달랐다.

별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지문이 발견된 것이었다. 그것은 작지 않은 발견이었다. 그러나 프라운호퍼는 그런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스스로 개량한 회절발-회절발은 프리즘에서 한걸음 나아간 원시적 분광기로 프라운호퍼가 만들어 쓴 것은 1cm남짓한 유리 표면엣 3,200개의 금을 판 것이었다.-을 써서 실험실의 가스 불빛들을 살폈다.

가스 불빛들에도 특유의 금들이 있었는데, 별빛의 금들과는 달리 둘레보다 밝았다. 이 금들은 높은 온도로 가열되어 빛을 내는 물질들이 낸다 해서 뒤에 '방출선(emission lines)'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햇빛의 스펙트럼에 난 어두운 금들과 가스 불빛에 난 밝은 금들 가운데 위치가 일치하는 것들이 있음을 알아냈다. 이것은 어두운 금들의 성격을 밝히는 단서가 된 중요한 발견이었다. 안타깝게도, 프라운호퍼는 그 수수께끼를 풀기 전에 아까운 나이에 죽었지만, 그는 그 어두운 금들이 해나 별들에 있는 무엇이 빛의 스펙트럼에 있는 밝은 금들을 지운 것이라고 놀랄 만큼 정확하게 추측했다. 프라운호퍼가 죽은 뒤, 그의 연구를 잇는 스펙트럼 분석 연구들이 많이 나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1859년에 독일 물리학자 구스타프 키르히호프(Gustav Robert Kirchhoff, 1824~1887)와 독일 화학자 로베르트 분제(Robert Wilhelm Bunsen, 1811~1899)이 일련의 실험들을 통해 원소들이 가스 상태로 탈 때 내는 빛들의 스펙트럼엔 독특한 방출선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어 키르히호프는 흡수선의 정체에 관한 프라운호퍼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밝혔다.

이렇게 해서 사람의 우주관을 근본적으로 바꾼 천체물리학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프라운호퍼의 연구에서 뛰어난 점은 '잡음(noise)'으로 여겨지기 쉬운 정보를 정보원에 관한 진정한 정보로 옳게 보았다는 것이다. 햇빛의 스펙트럼에서 흡수선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들을 잡음으로 여기고, 즉 망원경이나 회절발이나 관찰자의 눈에 있는 결함에서 나온 것들로 생각하고, 지나칠 것이다.

그것들을 잡음으로 여기지 않은 사람들도 그것들이 탐구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흡수선을 맨 처음 본 사람은 화학과 물리학에서 큰 업적을 남긴 영국의 과학자 월리엄 하드 올러스턴(William Hyde Wollaston, 1766~1828)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빛깔의 띠를 나누는 틈새들로 여겼다.

한 사람이 보고 지나친 것을 다른 사람은 이내 중요한 현상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울러스턴이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오고 27세에 '왕립협회’에 들어간 과학자였지만, 프라운호퍼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유리 세공업자의 도제(徒第)가 되어서 공식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해지며, 더욱 흥미롭다.

토머스 쿤(Thomas Kuhn)이 지적한 것처럼, 어떤 분야에서 새로운 학설의 바탕이 될 만큼 중요한 발견들은 다른 분야에서 연구를 시작해서 정설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각에서 사물들을 살필 수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잡음으로 여겨지기 쉬운 현상이 진정한 정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발견의 계기가 된 또 하나의 경우는 미국 수학자 에드워드 로렌즈(Edward Lorenz)가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를 발견한 일이다. 로렌즈는 기상 현상에 관심을 갖고 기상의 장기 예측을 연구한 수학자였는데, 1960년에 진공관을 쓰는 원시적 컴퓨터로 조그만 기상 모형을 만들어서 기상을 연구했다.

1961년 겨울 어느 날 그는 어떤 기상 계열을 다른 때보다 길게 만들어보기로 했다. 시간과 종이를 줄이려고, 그는 중간에서 시작하기로 하고 먼젓번 인쇄지에서 나온 수치들을 초기 조건으로 입력했다. 그리고는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한 시간 뒤 돌아와 인쇄지를 살폈을 때, 그는 뜻밖의 결과를 보았다. 같은 프로그램에 같은 수치들을 입력했는데도, 먼젓번 결과와 차이가 났고 그 차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커진 것이었다. 그래서 몇 달 뒤의 결과들을 서로 크게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결과가 잡음의 영향으로 생겼다고 여길 것이다. 즉 컴퓨터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거나 그의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실제로 로렌즈에게 먼저 떠오른 생각도 “진공관이 또 말썽을 일으킨 모양이구나.”였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다른 결과가 나온 까닭을 이내 깨달았다.

그의 컴퓨터의 기억 장치는 수치들을 소수점 아래 여섯 자리까지 기억했다. 그러나 인쇄지엔 공간을 줄이려고 수치들이 소수점 아래 세 자리까지만 나왔다. 그래서 그는 컴퓨터에 기억된 0.506127 대신 인쇄지에 나온 0.506을 입력했었다. 0.000127의 차이는 너무 작아서 무시해도 좋으리라 생각하고서.

이런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이, 기상 체계의 초기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큰 차이가 나온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한 종속(sensitive dependence on initial conditions)'이라고 불리게 된 이 발견은 기상분야에선 반 농담으로 '나비 효과'라고 알려졌다. “북경에서 공기를 휘젓는 나비는 다음 달엔 뉴욕의 폭풍 체계들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로렌즈의 발견은 중요한 함의들을 지닌 발견이었다. 기상 분야에 관한 실제적 함의는 장기적 날씨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기상 자료들을 모으는데 아무리 큰 자원을 들여도, 장기적 날씨 예측에 필요한 만큼 정확한 초기 조건을 얻을 수는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훨씬 중요한 함의는 물질세계에 대한 고전적 철학인 결정론(determinism)에 대한 회의였다. 결정론에 따르면, 어떤 체계의 초기 조건과 해당되는 물리적 법칙들을 알면, 그 체계의 움직임을 아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조건을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과학자들은 어떤 물리적 체계의 초기 조건에서의 조그만 차이는 그 체계의 움직임에 조그만 차이만을 불러온다고, 따라서 어떤 체계의 초기 조건을 개략적으로 알면 그 체계의 움직임을 개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이제 그런 가정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로렌즈의 발견은 재발견이었다.

「궁극적 이론의 꿈들(Dreams of a Final Theory」에서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가 지적한 것처럼, “간단한 체계들에서의 혼돈의 가능성은 실제로는 20세기 초엽부터 알려졌다. 그때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앙리 푸앵카레는 행성을 둘만 가진 태양계처럼 간단한 체계에서도 혼돈이 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토성의 고리에 있는 검은 틈들은 궤도를 도는 어떤 입자들이 그들의 혼돈적 운동에 의해 튕겨나오는 위치들에서 일어난다고 여러 해 전에 이해되었다. 혼돈의 견구에서 새롭고 흥미로운 것은 혼돈이 실재한다는 발견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혼돈들은 수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거의 일반적인 몇 가지 특질들을 보인다는 발견이다.”

어쨌든, 로렌즈는 사람들이 잡음으로 여기기 쉬운, 실은 잡음으로 여기는 것이 정상적인, 정보를 두 차례나 옳게 보았다. 한 번은 기상 패턴에서 차이가 난 까닭을 제대로 알아낸 것이고, 다른 한 번은 초기 조건에서의 조그마한 변화가 결정적 중요성을 지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후자는 어렵고 중요한 업적이었다.

그는 정설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어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과학철학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 현상에서 새로운 철학을 이끌어냈다. 잡음으로 보이지만 실은 진정한 정보인 현상들에 주목하는 것만이 중요한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명백히 잡음인 현상들이 지난 중요성을 깨달아 그것을 연구에 노력을 쏟는 것도 중요하다.

이내 떠오르는 예로는 러시아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 1849~1936)가 실험을 어렵게 만드는 잡음에 주목해서 '고전적 조건부여(classical conditioning)'를 발견한 것을 들 수 있다. 파블로프는 처음부터 '조건반사(conditioned reflex)'를 연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래 한 연구는 개의 타액선이 여러 가지 음식들에 대해 반응하는 모습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런 연구를 통해 그는 진 음식보다는 마른 음식에 많은 침이 나온다는 것 따위 결과들을 얻었다.

그런 연구를 하면서 그는 개들이 흔히 실험실에 들어서거나 먹이를 주는 사람들을 보면 침을 흘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계획에 없는 침의 분비'는 실험을 방해해서 그는 짜증이 났다.

그러나 그는 곧 그런 현상이 조직적 연구를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종소리를 중성 자극으로 삼은 실험을 했고, 거기서 조건 부여를 발견했다. 영국 생물학자 앨릭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이 푸른곰팡이에 오염된 포도상 구균 배양 접시에 주목해서 항생제 페니실린을 발견한 일은 널리 알려졌는데, 이것도 파블로프의 경우와 성격이 같다.

1946년에 처음 관측되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1961년에야 비로소 정체가 밝혀진 '우주 배경 복사(cosmic background radiation)'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이 흥미로운 일화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들에겐 ’타임-라이프 북스 Time-Life Books'에서 펴낸 '우주 속으로의 여행 Voyage through the Universe’ 연작의 『우주(The Cosmos)』를 추천하고 싶다.)

그러나 잡음의 연구엔 큰 문제가 있다. 정보처럼 보인 잡음이 실제로 잡음일 가능성이다. 그것은 시간과 돈을 잘못 투자할 가능성을 뜻한다. 그런 위험은 얼마나 클까? 현대에서 정보로 여겨진 잡음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19세기 후반에 관측된 화성의 '운하’일 것이다. 19세기까지 화성을 자세히 관찰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화성은 작아서, 지름이 지구의 반을 조금 넘는다.

그래서 19세기의 망원경으로는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화성이 태양 뒤쪽에 있을 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1877년에 화성에 관해 두 가지 중요한 발견들이 나왔다. 화성의 회합 주기는 779.94일이다. 그래서 780일 마다 충(衝, opposition)이 나와, 지구와 화성은 가장 가까워진다. 그리고 15년과 17년마다 쌍으로 특히 가까운 충들이 나와서, 화성은 지구에서 5천 6백만km까지 다가온다.

태양으로부터의 평균 거리가 지구는 1억 5천만km고 화성은 2억 2천 8백만km이므로, 그것은 상당히 가까운 거리다. 그렇게 특별한 충이 1877년에 있었다. 망원경 제작에서의 발전과 화성 관측에 특히 좋은 기회가 어우러져서, 1877년에 그렇게 중요한 발견들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첫 발견은 미국의 천문학자 에이서프 홀(Asaph Hall, 1829~1907)이 화성의 위성 둘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는 안쪽 위성에 '포보스(Phobos)’라는 이름을 붙이고 바깥 쪽 위성엔 '데이모스(Deimos)’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어로 '두려움’을 뜻하는 포보스와 '공황’을 뜻하는 데이모스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화성을 가리키는 전쟁의 신 '아레스(Ares)'의 시종들이었다.

다음 발견은 이탈리아 천문학자 조반니 스키아파렐리(Giovanni Virginio Schiaparelli, 1835~1910)가 '유로(流路)들’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는 화성 표면에 길고 가는 직선들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 그는 이것들을 'canali'라고 불렀다. ’canali'는 '유로들(channels)’을 뜻하는 이탈리아 말인데, 영어로 운하를 가리키는 'canals'라고 번역되었다. 그것은 물론 정확한 번역은 못되었다. 모든 물길을 뜻하는 유로와는 달리, 운하는 인공적 물길을 뜻한다.

그래도, 19세기가 운하의 전성기였음을 생각하며(수에즈 운하는 이미 1869년에 개통되었고, 1877년 당시엔 파나마 운하가 계획되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필연적인 번역이었다. 한번 운하라는 말이 쓰이자, '화성의 운하'라는 생각은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았다. 운하는 발전된 문명의 존재를 뜻했고, 그런 문명은 당연히 '화성인'의 존재를 가리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화성을 관측하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특히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미국 사업가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이었다.

1894년 그는 애리조나 주에 천문대를 설치하고 화성을, 특히 '운하들’을 열심히 관측하기 시작했다. (로웰은 젊었을 때부터 일본과의 무역에 종사해서 큰돈을 벌었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을 소개하는 글들을 발표했다. 그런 글 가운데 하나는 1885년에 나온 「조선-조용한 아침의 나라(Chosun-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화성 표면의 검은 부분들은 식물들이 자라는 지역이라고, 즉 화성의 대부분을 덮은 사막 가운데 남은 오아시스들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봄마다 양극에서 적도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 물결(wave of darkening)'을 보았다는 천문학자도 나왔다. 그런 움직임은 녹음 얼음이 물을 공급해서 식물들이 자라나는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로웰은 그렇게 물이 움직이려면 유로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서로 떨어진 검은 부분들을 연결하는 운하들이 바로 그런 유로들이라고 여겼다. 그는 화성이 메말라가는 세계며 지능을 가진 생물들이 점점 더 나빠지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영웅적으로 노력한다고 믿었다. 그는 그런 견해를 화성 『화성(Mars)』(1895), 『화성과 운하들(Mars and Its Canals』(1906) 및 『삶의 둥지로서의 화성(Mars as the Abode of Life』(1908)에서 밝혔다.

이 세 권의 책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천문 관측 기술이 발전하면서, 스키아파렐리와 로웰의 관측이 잘못된 것이었음이 점점 불명해졌다. 특히 분광 분석은 화성의 대기엔 산소나 수증기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로웰은 500개가 넘는 운하들을 보았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본 것들은 화성 표면의 서로 관련이 없는 지형들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려는 마음이 빚어낸 환상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다.

1976년 바이킹(Viking) 탐사선이 화성에 닿자, 그런 결론은 확인되었다. 화성은 무척 춥고 거의 대기가 없었다. 비록 먼 옛날에 물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유로들이 있었지만, 운하들은 없었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스키아파렐리와 로웰은 잡음을 정보로 여기고 그것을 관측하는 데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

그런 투자는 일단 순수한 낭비였다고 볼 수 있다. 놀랍게도, 얘기는 상당히 다르다. 화성에 관한 그 두 사람의 관측 결과들과 견해들은 많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래서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엽에 걸쳐, 화성을 주제나 무대로 삼은 문학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1898년에 나온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1946)의 『세계들의 전쟁(The War of the Worlds』, 1912년부터 30년에 걸쳐 나온 에드거 라이스 버로즈(Edgar Rice Burroughs, 1875~1950)의 『바숨(Barsoom)』의 연작, 그리고 1950년에 나온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의 『화성 연대기(The Martian Chronicles)』는 대표적 작품들로 당시엔 무척 큰 인기를 누렸고 지금도 널리 읽힌다. 이들의 작품이 없었다면, 적어도 당대의 문학 독자들은 적잖이 허전했을 것이다.

그 작품들의 영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작품들은 독자들의 외계에 대한 관심을 높여서 뒷날 우주 탐사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만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화성이 혹독한 환경 속에서 문명을 이어가려고 영웅적으로 투쟁하는 지능을 가진 생물의 고향이 아니라 또 하나의 밋밋한 행성으로 남았다면, 우주 탐사의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스키아파렐리와 로웰 자신들에게도 그 일은 그리 해롭지 않았다. 화성에 관한 '발견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거의 틀림없이 잊혀졌을 터이다, 비록 그들이 명성이 좀 야릇한 종류의 명성이긴 하지만, 더구나 로웰은 아마추어 천문학자에서 전문적 천문학자로 성공적으로 변신했으니, 해왕성 바깥에 행성이 있으리라는 그의 예언은 천문학에 대한 그의 실질적 기여였다.

그는 그런 행성을 'X 행성 planet X'이라 불렀는데, 그가 세운 ’로웰 천문대'에 근무한 클라이드 톰보(Clyde William Tombaugh)가 1930년에 명왕성을 발견함으로써 천문학사에서 로웰이 차지하는 자리를 튼튼하게 했다. 위의 일화는 물론 예외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잡음을 정보로 잘못 알고서 그것의 연구에 투자하는 일에 따르는 위험이 언뜻 보기보다는 작을 가능성을 가리킨다.

어린아이들의 창조성이 공식 교육에 의해 무디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만 나오는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을 위해 '입시 지옥’을 마련해놓은 우리 사회에서 그 폐해가 유난히 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 폐해는 실은 젊은이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덮고 있다.

음악적 재능이 연주에서의 재능과 동의어가 되다시피 해서 뛰어난 연주자들은 많이 나오지만 세계적 영향력을 지난 작곡가를 내지 못한 사정은, 그리고 그런 사정에 대한 걱정이 나오지 않는 사정은, '주어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한 지적 활동’으로 여겨지는 우리 풍토의 한 단면일 따름이다.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옳게 해석하는’일과 그의 작품들에 비길 만한 작품을 내놓는 일 사이엔 창조성에서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사정과 기술자들이나 과학자들이 무슨 기술이나 실험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사정은 한 뿌리에서 나왔다. 입시를 겨냥한 교육이 창조성에 미치는 나쁜 영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범으로 자리 잡은 것들을 부정하고 질서를 깨뜨리므로, 참으로 창조적인 지적 산물들은 큰 저항을 만난다. 그런 저항은 예술 작품들의 경우에 훨씬 흔하고 크지만, 과학적 발견들에서도 결코 드물거나 작지 않다. 그래서 창조적인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자산은 자신의 지적 산물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 믿음 없이는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적대적 반응을 견뎌내기 힘들다.

안타깝게도, 입시를 겨냥한 교육은 그런 믿음을 길러주지 않는다. 입시를 겨냥한 교육의 폐해들을 당장 시원스럽게 줄일 길은 없다. 그런 폐해들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우리는 먼저 입시를 겨냥한 교육이 '주어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한 지적 활동이다’라는 전언을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내놓는다는 사실을 또렷이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좋은 물음을 스스로 찾아서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