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이 왕 아드메토스 목숨 구한 왕비 알케스티스 그리스 최고의 열녀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65)- 연명의 욕망과 숭고한 사랑의 교훈
에우리피데스(BC 484?~BC 406?)의 <알케스티스>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때 ‘의리’ 마케팅이 인기를 끌었다. 이때 소구력(訴求力)의 핵심은 변함없는 마음의 소통과 우직함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데 있다. ‘의리’에 주목하는 현상은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불신과 배신이 판치는 현실을 우리가 목도하고 있고, 이에 대한 비판과 조롱, 풍자에 공감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의리는 인간이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이다. 의리는 친구 사이는 물론 부부와 부자간, 정치적, 사업적 동지와 동업자 간에도 요구될 수 있다. 어떤 관계에서도 ‘의리(義理)’는 한자어 뜻이 의미하듯, ‘옳음’과 ‘마땅한 도리’가 근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 옳지 못한 일과 검은 거래에서 의리를 강조하면 그것은 도착(倒錯)된 의리다. 그것은 의리로 가장한 폭력이다. ​

현실세계에서 의리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임금과 신하는 충(忠)으로, 부모와 자식 간에는 효(孝)로, 부부 간에는 지순한 사랑으로, 친구 사이에는 고난에 처한 친구를 외면하지 않는 우정으로 나타난다. 충효도 의리에서 나오지만, 사랑과 우정 역시 의리의 발현이다. 의리의 좋은 사례는 동서양의 고사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충신과 열녀, 효자, 효녀가 유난히 많이 배출되었다. 모두 의(義)와 도리(道理)가 충만했던 사례들이다. ​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설화에서도 의리의 표상들이 많다. 오뒷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트로이 전쟁 참전으로 20년간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정숙한 아내로서 가정과 정절을 지켰다. 남편에 대한 의리를 다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의 힘은 열정이다. 하지만 중년과 노년의 사랑은 의리와 정에서 나온다. 사랑의 나이테가 늘어가면서 그 속에 담긴 정감의 빛깔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도 중년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화가 있었다. 페넬로페에 비교해 덜 알려졌지만, 남편에 대한 사랑과 의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예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에 나타난 알케스티스(Alkestis)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녀는 텟살리아 지방의 페라이의 왕 아드메토스(Admetos)의 왕비였다. 그녀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목숨을 던졌다는 점에서 그 지극성이 페넬로페를 넘어선다. 가히 고대 그리스 최고의 열녀(烈女)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

알케스티스가 죽게 된 사연은 이렇다. 행복한 삶을 이어가던 중 남편인 아드메토스가 죽을 운명에 처한다. 하지만 아폴론이 그를 살리기 위해 나선다. 아폴론이 인간 아드메토스를 돕게 된 까닭은 과거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과거의 사연은 이렇다. 아폴론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는 뛰어난 의술로 자주 인간들의 중병을 고치고 회생시키거나 수명을 연장시켰다. 특히 죽은 사람을 되살릴 정도로 그의 의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일은 제우스의 형제이자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의 권능을 무력화(無力化)하는 일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제우스는 필멸의 인간들을 살려내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의술을 괘씸하게 생각하여 그에게 번개를 던져 죽인다.

   
▲ 죽어서 의술의 신이 된 아스클레피오스의 모습, 에피다우로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폴론은 자신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가 제우스의 분노를 사서 죽게 되자, 아버지 제우스에 반기를 든다. 제우스의 대장장이들인 퀴클롭스들을 죽인 것이다. 신들의 제왕에게 대들었으니 최고의 사랑을 받던 아폴론인들 무사할 리가 없다. 제우스는 아폴론에게 인간 세상에 내려가 페라이 왕의 종으로 양치기 생활을 하도록 징벌한다.

신의 직위를 해제하고 사회봉사 명령을 내린 셈이다. 신이 인간의 종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그보다 더한 수모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드메토스는 신의 권능을 정지당해 자신의 종살이를 하게 된 아폴론을 업신여기지 않고 극진히 예우했다.

아폴론은 예전에 자신을 돌봐준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죽게 된 아드메토스를 살려주려 지하의 신들과 협상한다. 일단 살려주기로 합의를 얻어낸다. 단 조건이 너무 미묘하고 까다롭다. 아드메토스 대신 죽어 줄 사람이 있다면 아드메토스가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아드메토스가 자기 대신 죽어줄 사람을 찾아와야만 한다는 점이다.

평소에는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던 수많은 장수와 신하들이 정작 왕의 연명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사람을 찾으니 나서는 이가 없었다. 나라를 구하는 일에 목숨을 바치는 일이야 명예로운 일이다. 하지만 필연의 죽음 앞에 선 왕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부모 자식 간의 의리보다 더 강한 게 어디 있으랴. 아드메토스는 부모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는 연로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기 대신 죽어줄 수 없냐고 간청한다. 불효도 이만저만의 불효가 아니다. 자기 한 목숨 살자고 부모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읍소하는 아들이라니,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정경이다. 후안무치의 극치다.

제 한 목숨 살기 위해 인간이 얼마나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아드메토스는 자기를 대신하여 죽을 사람을 여기저기서 찾아보지만,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아드메토스의 불경한 요구는 부모를 격분시키고 자연이 만들어준 부모 자식 간의 혈연에 절교가 선언되고 서로 맹비난하는 상황이 된다.

이 때 자신을 위해 아내 알케스티스가 스스로 죽겠다고 나선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죽음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다. ​알케스티스는 애절하게 말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당신을 존중하며, 내가 죽는 대신 당신이 살아서 햇빛을 보게 하려고 당신을 위해 죽는 거예요. 나는 살 수가 있고, 내가 원하는 테살리아인과 결혼하여 이 부잣집에서 살 수가 있는데도 말예요. 나는 당신 없이 고아가 된 아이들과 살고 싶지가 않았고, 그래서 아낌없이 내 청춘을 희생하는 거예요.”

알케스티스는 죽음의 사자(死者)에 이끌려 죽게 되고 장례를 치른다. 이 와중에 아드메토스의 절친인 헤라클레스가 페라이를 방문한다. 아드메토스는 아내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상중에 손님을 대접하지 않는 관례를 깨고 헤라클레스를 손님으로 극진히 대접한다. ​

나중에 알케스티스의 죽음을 알게 된 헤라클레스는 아드메토스가 베푼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 그녀를 살려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그녀의 무덤가에서 지키고 있다 그녀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사자(死者)를 물리치고 알케스티스를 살려내 다시 이승으로 데려 온다. ​저승 세계의 문턱에 까지 간 알케스티스를 구해 온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담력과 의리 넘치는 기개가 돋보인다. 헤라클레스가 맹수나 적과의 대결이 아닌, 남녀 간의 사랑에 개입하여 큰일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죽었던 알케스티스를 저승 세계로 떠나기 전 살려온 헤라클레스가 남편인 페라이의 왕 아드메토스에게 알케스티스를 인계하고 있다. 아드메토스의 놀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만든 이 Johann Heinrich Tischbein the Elder(1722–1789), 1780년 경 作.

헤라클레스는 친구의 아내를 살려냄으로써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남편에게 의리를 지킨 알케스티스는 지하 세계의 신들을 감동시켜,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는 최고의 사랑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리스 최고의 열녀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죽음을 택하여 최고의 아름다운 영예를 얻은 것이다. ​

인간의 목숨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중요하다. 이 세상에 대신 죽어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죽음의 사자와 죽음을 대체할 수 있는 거래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마 막대한 돈과 권력을 가진 숱한 사람들은 온갖 술수를 부려 대신 죽을 사람을 구하려 혈안이 되지 않을까.​ 아드메토스 같은 치졸한 인간성을 가진 인간들은 우리 현실에서 숱하게 많이 나올 것 같다.

아드메토스는 인간의 필멸의 운명을 거부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또 다른 고귀한 생명의 마감을 요구했다. 더군다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죽음으로써 증명해줄 것을 부모와 아내에게 요구했다. 이에 아드메토스의 아버지 페레스는 아들 대신 죽은 며느리의 고귀한 행동을 칭송하며, 제 목숨 아까워하면서 남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아들의 저열한 태도를 질책한다.

“네가 네 목숨을 사랑한다면, 남들도 모두 제 목숨을 사랑한다는 것을! 네가 계속해서 나를 비난하면 너도 거짓말이 아닌 비난을 많이 듣게 되리라.“

하지만 아드메토스는 아버지의 질책에 대해 오히려 아버지가 자신의 생부가 아닐지 모르며, 결코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매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효의 극언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집착에서 부자간의 도리를 여지없이 저버렸던 것이다.

이런 아드메토스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알케스티스의 행동은 의미 있는 것인가? 알케스티스에 대한 아드메토스의 사랑은 허위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이 연명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내의 희생을 통해 얻은 생명에서 지극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아드메토스의 불순한 욕망이 크면 클수록 알케스티스의 희생의 가치는 더욱 커 보인다. 아드메토스는 삶에 대한 집착으로 주변인들에게 도착된 사랑, 도착된 의리를 기대하면서 부모 자식간의 의리와 부부간의 의리를 내팽개쳤다. 알케스티스의 죽음은 암묵적으로 강요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쩌면 강요된 열녀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남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친 알케스티스의 순결한 사랑은 결국 신들의 가호로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 헤라클레스 또한 죽은 친구의 아내를 살려오는 신비한 괴력을 보여 의리와 우정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알케스티스의 부활은 어쩌면 필연을 거부한 아드메토스에게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신의 우회적 질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신의 이런 경고를 아드메토스는 알아차리기나 했을까?

여기서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했었느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작품은 필멸의 인간들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두고 벌이는 비열하고, 후안무치한 행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한편으로 죽음을 초월한 지순한 사랑의 의리와 우정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보여준다. 이를 보고 어떤 감동과 교훈을 얻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우리들의 의리관(義理觀)과 사생관(死生觀)을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 추천도서: <알케스티스(Alkestis)>, 《에우리피데스 비극전집 Ⅰ》,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2011, 2쇄), 6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