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의 실패가 세계대전 발발로 이어져...21세기에 주는 교훈은?
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 복거일 소설가

지난 일들에 대해서 실제로 일어난 것과는 다른 상황이 나왔을 경우를 상정하는 것은 부질없다고 한다. 그래도 한 세기가 끝나가는 지금, 지난 백 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다보노라면, 자연스럽게 그런 상정을 하게 된다.

20세기에서 사람들이 가장 애석하게 여길 일은 아마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실패일 것이다. 국제연맹이 보다 잘 움직였다면, 1930년대에 갑자기 창궐한 파시즘의 기세가 적잖이 줄어들었을 터이고,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덜 받았을 터이다. 그리고 누가 아는가, 혹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국제연맹은 분명히 보다 잘 움직일 수 있었다. 그것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물론 미국이 그것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도한 사람은 바로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이었고, 당시엔 모두 미국이 국제연맹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국제연맹의 실패는 더욱 애석하다. 국제연맹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산물이었다. 그 전쟁이 너무 끔찍한 재앙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전쟁을 막을 장치를 생각하게 됐고 '집단 안보(Collective security)'를 이룰 수 있는 국제기구가 그 방안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미 19세기에 설립된 ’국제전신동맹(International Telegraphic Union)'이나 '만국우편동맹(Universal Postal Union)'이 가리키듯, 경제적 필요와 기술적 가능성은 민족국가들의 국경을 넘으려는 노력을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국제연맹에 관한 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마자 시작했다. 그래서 1915년엔 이미 국제연맹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였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에서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연구하는 기구들이 만들어졌고 잘 마련된 초안들이 여럿 발표됐다. 그리고 윌슨은 그런 노력들을 통합해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주도했다.

특히 그가 1918년에 발표한 '14개조항(Fourteen Points)'는 정의롭고 영구적인 평화의 핵심으로 널리 받아들여졌고 국제연맹의 설립에서 지침 노릇을 했다. 마침내 1919년 4월에 ’국제연맹 규약'이 확정됐고 이듬해 1월엔 ’베르사유 조약'의 한 부분으로 발효됐다. 국제연맹은 총회와 이사회가 중심적 기구들이었는데, 총회는 해마다 열리게 됐다. 의사 결정은 전원일치 방식을 따랐다.

불행하게도, 이때 윌슨은 미국 안에서 정치적 기반을 많이 잃고 있었다. 야당인 공화당은 윌슨에게 심한 적대감을 가졌고 그의 정책들에 반대했다. 그들은 국제적으로는 고립주의를 받아들여서 국제연맹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국제연맹의 규약을 비준할 상원에서 공화당 지도자들은 규약을 아예 반대하기보다는 윌슨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한 유보 조항들을 덧붙이는 방식을 골랐다.

공화당의 이런 전략에 부딪히자, 윌슨은 공화당과 타협하는 대신 미국 시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길을 골랐다. 그는 이내 전국적 유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윌슨은 평화 협상을 주도하느라 심신이 지친 상태여서, 전국적 유세는 무리였다.

마침내 그는 유세 도중 쓰러졌고 혈전증으로 반신불수가 됐다. 그 뒤로 대통령의 직무는 실질적으론 그의 아내 이디스 윌슨(Edith Bolling Galt Wilson)이 처리하게 됐다. 그래서 국제연맹 규약 비준에 더할 나위 없이 나쁜 상황이 나왔다. 병자인 윌슨은 공화당 상원의원들을 설득할 힘이 없었고, 자신의 주장을 굽혀 양보할 생각도 없었다.

유보 조항들이 덧붙여진 비준안이 상정되자, 윌슨은 자신을 따르는 민주당 상원의원들에게 비준안을 거부하라고 얘기했고, 비준안은 끝내 부결됐다. 국제연맹의 탄생을 위해 누구보다도 일을 많이 한 사람에 의해 비준안이 부결되고 미국은 국제연맹에 들어가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 비극은 국제연맹에 치명적이었다. 국제연맹의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미국의 불참은 국제연맹의 권위에 큰 흠집을 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가장 큰 나라인 미국이 빠지자, 잘못을 저지른 나라들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집단 안보의 핵심으로 삼는 국제연맹은 상당히 무력하게 됐다.

그래서 1930년대엔 파시즘을 신봉하는 나라들이 잇따라 국제연맹을 무시했고 자신들에게 불리하면 이내 탈퇴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당신이 어떤 이상을 믿으면, 당신을 소유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If you believe in an idel, you don't own you, it owns you)" 미국 탐정 소설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1888~1959)의 말은 윌슨의 삶을 잘 요약한다.

윌슨은 이 세계를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초국가적 기구라는 이상을 믿었고, 그 이상은 줄곧 그의 삶을 지배했다. 그래서 그는 국제연맹을 될 수 있는 대로 이상적 모습으로 빚으려 애썼다. 아쉽게도, 그는 위대한 정치 지도자였지만, 정적들을 구슬러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 정치적 본능과 수완을 지니지 못했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이 덧붙인 유보조항들이 터무니없는 것들이 아니었고 민족국가들의 주권을 제약하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적 고려에서 나왔으므로, 윌슨으로선 충분히 그들과 타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상을 고집했다. 그래서 그는 국제연맹을 예정된 궤도에 올려놓지 못했고,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인공위성처럼 국제연맹은 지상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국제연맹의 그런 실패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은 막이 올랐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