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정 미디어펜 기자
1993년 소련 군사유학생 출신들이 북한에서 거사 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있다. 일명 ‘프룬제 군사대학사건’은 거사도 하기 전에 실패했지만 엘리트층에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첫 시도를 한 것이어서 획기적이다.

이 사건에 연루돼 검거되고 총살당한 유학생 대부분이 중앙당, 인민무력부, 제2경제위원회, 제2자연과학원에서 근무하던 고위 간부의 자식들로 실제 쿠데타로 이어졌을 경우 성공했을 가능성도 컸다.

이들의 거사 모의를 사전에 파악해 검거에 나선 조직은 당시 인민무력부 보위국이었다. 사건을 종결지은 후 총정치국 산하 보위사령부로 격상됐고, 중장 계급이던 원웅희 보위국장은 대장으로 승급했다.

이때부터 보위사령부는 국가의 모든 부문을 검열하고 단속하는 기관으로 권력을 쥐게 됐다. 우리의 기무사령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보위사령부는 군부뿐 아니라 중앙당 정치사건까지 담당할 정도로 권력이 커진 것이다.

당과 국가의 고위 간부들에 대한 정치사찰은 국가 안전보위부가 주도하고 있지만, 군대 내 사건과 김정은의 특별 지시를 받은 중요 사건들은 보위사령부가 도맡아 집행하고 있다. 특히 김정은의 한마디 지시로 시작되는 사건은 보위사령부가 모두 수행한다.

   
▲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특히 보위사령부 산하에 총참모부 보위부, 인민무력부 보위부, 각 군단·사단들에 보위부가 들어가 있어 군 간부들과 군에 배속된 기관기업소 간부들에 대한 사상적 색출을 진행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 각 군마다 보위사령부 파견 부서가 있다.

보위사령부는 간부들을 검열하는 것뿐 아니라 직접 색출해 즉결로 처리할 정도의 무소불위의 존재로 산하에 감호소를 별도로 두고 있다.

보위사령부에 체포된 이들에게는 재판 한번 받을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정치범수용소행인지 즉결처형인지만 결정될 뿐이다. 간혹 보안부 사건으로 분류돼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흔치 않다고 한다.

보위사령부는 김정일 시절 최대의 숙청사건으로 기록되는 ‘심화조 사건’을 뒤집는 역할도 주도했다. 심화조 사건은 김정일 정권 출범을 앞두고 단행된 공포정치의 대표 사례로 1996년부터 3년에 걸쳐 간첩 혐의로 당 간부와 그 가족 등 2만5000여명을 제거한 사건이다.

3년이 채 못가 심화조 사건의 후유증이 터져나왔다. 간부들 사이에서 “김일성 시기에 충실했던 고위급 간부 대다수가 간첩이고 반당반혁명 분자였으면 어떻게 나라를 지탱해왔겠냐”는 항의가 이어지자 김정일은 보위사령부에 지시해 사건의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다.

보위사령부는 심화조 사건을 주도한 채문덕 사회안정성 정치국장을 체포해 2000년 7월13일 ‘극악한 살인마’ 혐의로 총살하고, 인민보안성 본부에서만 심화조 요원 100여명을 색출해 전국적으로 8000여명의 연루자를 제거시켰다.

북한의 다른 비밀조직이 그렇듯이 보위사령부도 특히 ‘말 반동’ 즉, 반동 발언을 좇아 사람들을 감찰하고 색출해 처결하는 일을 한다. 인민무력부장과 군단 사령관을 비롯한 고위급 군부 간부들도 항시적 감시 대상자이다.

군 간부들이 사상적으로 변질됐는지를 감시하고 있으니 이번에 숙청된 것으로 알려진 현영철 무력부장 역시 보위사령부의 감시망에 걸려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 당국은 현영철에 대해 군벌 관료주의에 물들었다는 혐의를 씌운 것으로 알려졌다. 현영철이 김정은에 대해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 정치 지도자이자 군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을 종종 토로했다고 한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최고 존엄’의 명예를 훼손하는 ‘말 반동’으로 명백한 처벌감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