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최상진 기자] “지금까지 본 공연 중에 뭐가 가장 좋았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질문을 조금 틀어 “작품을 좀 추천해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장 먼저 튀어나오다시피 하는 작품은 언제나 ‘푸르른 날에’다.

‘푸르른 날에’는 2011년 초연부터 햇수로 5년째 5월이면 꼭 명동을 찾게 만드는 작품이다. 주목받지 못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며 올해까지 ‘자리가 없어 못 보는’ 최고의 인기 작품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스타캐스팅만으로 승부하는 최근 공연계의 흐름과 달리 오직 작품성만로 일궈낸 보기 드문 신화적인 작품이다.

   
▲ 사진=신시컴퍼니

작품의 주 무대는 1980년 5월 광주. 대학생이자 야학교사였던 오민호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자 결의했으나, 마지막 순간 친구와 학생들을 잃고 살려달라 애원한다. 극적으로 살아난 그는 임신한 상태였던 애인 윤정혜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불가에 귀의한다. 30년 뒤 자신의 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신부입장을 돕기 위해 다시 속세로 나선다.

지극히 비극적인 이야기는 다분히 희극적으로 풀이된다.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됐고, 대사는 툭툭 끊어낸다. 이야기와 연기와 어법이 다분히 이질적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순간적으로 빨려들어간다. 누구나 익히 알고있는 광주민주화운동의 흐름보다 평범했던 사람이 사건에 말려들며 벌어지는 ‘인간의 추락과 성찰’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장면과 이미지 위주로 머릿속에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젊은날의 오민호가 불가에 귀의하며 여산스님이 되고, 연약했던 윤정혜는 아이를 위해 강해진다. 오민호의 든든한 형 오진호와 추락했던 그를 일으켜 세운 일정스님, 그리고 도청에서 죽어간 사람들까지. 이들이 그려내는 이미지는 그 어떤 매체와 역사책보다도 현실적이며 애절하다.

각종 방송은 5월마다 광주 망월동 묘지를 비춘다. 추도사를 하는 정부 관계자, 그리고 희생자의 묘소 앞에서 눈물 흘리는 어머니, 그리고 짧게 스쳐 지나는 희생자들의 사연까지 매번 똑같은 내용이 되풀이된다. 요즘에는 하나 더 늘었다. 추도식마다 불리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해야 하냐 제창해야 하냐는 가치 없는 논란이 몇 년째 되풀이되고 있다. 오늘도 5월 광주의 기억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 사진=신시컴퍼니

그런 면에서 ‘푸르른 날에’가 보여주는 용서에 대한 메시지는 가치가 크다. 작품은 35년 전 도청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 그곳에서 살아남은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외면했던 우리들 모두를 용서하자고 말한다.

꽃비 아래로 여산스님과 윤정혜 사이로 젊은날의 오민호와 윤정혜가 비친다. 이 가운데 광주의 자유를 만끽하던 사람들의 웃음이 완연히 피어오른다. 공포의 고문실이었던 무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용서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가슴에 꽂는다.

관객들은 커튼콜이 시작돼도 쉽사리 작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지극히 연극적이어서 더 강렬한 이미지 탓에 커튼콜마저 작품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버린다. 커튼콜 마지막에 오민호를 연기한 이명행이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치며 관객들 앞에 나서야 비로소 작품에서 빠져나온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관객들은 비로소 펑펑 눈물을 흘린다.

2011년부터 5년간 항상 같은 배우들이 함께했던 ‘푸르른 날에’는 오늘(31일) 공연이 마지막이다. 제작사측은 “다음에 무대에 오를 때는 어떤 배우가 바뀌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고 설명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즌은 예년과 달리 모든 티켓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관객들의 요구에 시야방해석까지 내놓았지만, 그마저도 순식간에 매진됐다.

늘 마지막 공연을 챙겨왔던 만큼 올해도 어김없이 극장으로 향하는 길, 초연 배우들의 마지막 공연인 탓인지 하마터면 티켓을 구하지 못할 뻔 했던 만큼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정말 작품 제목처럼 기가 막히게 푸르른 날이다.  

   
▲ 사진=신시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