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최상진 기자] 때는 2012년 봄이었습니다. 나름 호기롭게 시작했던 기자생활이 턱 하고 벽에 부딪혔을 때 공연 2년차에 접어든 ‘푸르른 날에’를 처음 만났습니다.

시작은 뜨뜨미지근 했습니다. 늘 그렇듯 “정말 좋은 작품”이라는 홍보담당 직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5.18? 그럼 또 사회 비판하다가 눈물짜내겠구나’ 하며 극장에 들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현대사를 다룬 연극들은 주로 강한 메시지를 주입식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사실 기대보다는 지루함에 대한 우려가 많았습니다.

   
▲ 사진=신시컴퍼니

그런데 이 작품 뭔가 달랐습니다. 처음부터 객석에서 등장한 배우가 무대를 펄쩍 뛰어오르는 것은 물론 모든 캐릭터가 과장된 표현으로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연기와 반응에 놀라는 것도 잠시, 탄탄한 연기력은 이내 눈과 귀와 아니 온 정신을 이들의 이야기에 고정시켜버렸습니다.

1980년 5월의 오민호는 꼭 나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되 전면에 나서는건 두려워하는,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물러나는 내가 꼭 그와 같았습니다. 결사항전을 외치던 도청에서 나만 살아남았다는 부끄러움에 그만 정신을 놓아 버린 그의 모습이 ‘현장에 있었다면’ 이라는 가정하에 내 모습 같아 그때부터 눈물이 났습니다.

작품 안에서 1980년 5월 광주는 자유로웠습니다. 직업과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든 자유를 외치고, 또 그 말에 동조하며 자유민주주의를 논했습니다. ‘1980년 5월 어느 날이었다’로 시작하는 김남주 시인의 ‘학살1’이 끝나갈 무렵 사정없이 쏟아지는 총탄에 관객들은 경악했고, 오민호는 혼자 살아남아 고문 끝에 동지들들 외면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였습니다.

자신을 내려놓은 그는 결국 임신한 애인을 뒤로하고 불가에 귀의했고, 그렇게 30년이 더 흘렀습니다. 물론 그날의 기억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 사진=신시컴퍼니

그가 다시 세상을 향해 다시 발을 내딛는 첫 걸음은 30년 전 출가할 마음을 전하던 날 태어난 딸의 결혼식에서였습니다. ‘먼 곳에서나마 축복을 빈다’던 그가 자신을 구제한 일정스님으로부터 ‘넘어진 곳에서 일어서라’는 일갈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은 순간, 객석에서는 울음이 터졌습니다. 결국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거와 현재의 화해, 그리고 남겨진 그들을 향한 용서였다는 생각에 숙연해졌습니다.

그리고 결혼식 당일. 여산스님이 된 과거의 오민호는 애인이었던 윤정혜가 지은 옷을 입고 딸의 결혼식을 마쳤습니다. 떠나려는 길, 그에게 “스님, 그곳에는 아직도 뻐꾸기가 울지요”라고 묻는 그녀의 말에 여산스님은 웃음으로 답합니다.

여산스님과 중년의 윤정혜 사이로 젊은날의 오민호와 윤정혜가 서고, 그 뒤로 1980년 5월 함께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그 위로는 꽃비가 흐르고, 송창식의 ‘푸르른 날’이 울려 퍼집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는 서정주 시인의 시가 운율을 타고 관객들의 가슴에 이슬로 맺힙니다.

‘푸르른 날에’의 인물들은 결코 눈물짓지 않습니다. 정의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는 사태라고 규정지었던 과거의 사건이, 그리고 그 속에서 홀로 살아남았다고 자책하던 한 인간이 ‘용서’를 통해 다시 생명을 얻는 순간을 그립니다. 그래서 이를 TV와 책에서만 지켜봤던 사람들은 더욱 부끄러워집니다.

   
▲ 사진=신시컴퍼니

한없이 희극적인 요소들을 활용하지만, 그래서 더 슬프게만 다가옵니다. 꽃비 아래 모두가 웃음짓는 장면은 그 때문인지 더욱 뇌리에 각인됩니다. 살면서 어떤 연극의 ‘장면’이 이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푸르른 날에’의 마지막 장면은 기쁨과 슬픔을 한데 버무려놓은 특별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2012년 처음 공연을 보고 나서 홍보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이런 작품을 만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는 짧은 문장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리뷰는 끝내 쓰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 작품을 평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 생각은 ‘어떻게든 온 필력을 다해 작품같은 리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지만, 끝내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부끄럽게도 저는 이 공연을 전달하는 대신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할 힘을 얻었습니다. 삶이 아무리 고되더라도, 비정하더라도, 정의롭지 않더라도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기억으로만 간직될 것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원없이 울었습니다.

초연 배우들이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 31일 공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커튼콜에서 코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눈물을 참고 있는 배우들의 얼굴을 보며 오랜 친구를 군대에 보내는 듯한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눈물을 꾹 참고 이들의 마지막을 지켰지만, 더 이상 공연에만 집중할 수 없는 기자의 운명 역시 그들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 속으로 울었습니다.

   
▲ 사진=신시컴퍼니

고선웅 연출은 “이 작품이 관객 여러분의 기억에 항상 간직됐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유독 홀로 온 관객이 많은 이날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시 눈가를 훔쳤습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작품, 배우들 앞에서 관객들은 10분이 넘는 기립박수로 모든 배우들과 스태프의 마지막을 빛냈습니다.

돌아오는 길, ‘언제쯤 다시 이 공연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생각이 줄곧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믿고 추천했던 공연이 사라진다는 아쉬움보다 당장 내일 또 새로운 분야에서 만들어내야 할 기사 걱정이 앞섰습니다.

오늘의 ‘푸르른 날에’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마도 힘들 겁니다. 오늘이 지나갔듯 내일의 나는 오늘로 돌아오기 힘들 겁니다. 모든 관객들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더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요. 제 옆에서 펑펑 울던 여성 관객분께 말로나마 위로를 건네지 못했던 점이 더 아쉬워집니다.

가장 사랑하던 작품을 떠나보내기에 너무나도 푸르른 날이었습니다. 극장에서 받은 엽서에 새겨진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요’라는 말처럼 결코 잊지 못할 날이 될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땐 나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리뷰를 쓸 수 있겠지요. 그때도 여산스님이 지금과 같은 미소로 관객들을 맞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3년 전 제작사 홍보담당자에게만 건넸던 인사를 정식으로 전합니다. 꼭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지난 5년간 정말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