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 SNS는 해돋이 사진으로 도배됐다. 힘차게 떠오른 붉은 해를 배경으로 함박웃음을 짓는 사람들의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 주고받는 덕담은 정겹다. 힘겹게 해돋이 명소를 찾아 함께 복을 받자고 빌어주니 그저 고맙다.

언제부터일까? 이렇게 해돋이에 열광하기 시작한 게. 
명절 고향을 찾는 귀향 행렬도 교통체증과 농촌인구의 도시 이주로 인해 줄어들지 않았던가. 펜데믹이 시작되면서 고향 식구와 상호합의 아래 발길을 돌렸던 우리가 아니던가. 그런데 해돋이 명소를 찾는 인파는 펜데믹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늘어나니 놀랍다. 밤잠을 설치는 건 기본이고 고속도로휴게소에서 토막잠으로 버틴 이들의 무용담이 떠돈다. 살을 에는 추위와 험한 눈길에도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도 많다. 온 가족이 떠오르는 장엄한 아침 해를 맞이하겠다는 의지가 가상할 뿐이다.

모두가 떠오르는 해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대학 합격, 취업, 결혼, 건강 등등 행복을 꿈꾸는 삶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사연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여기에 “부자 되게 해주세요”는 전치사였을 게다. 강한 생명력을 발산하는 해가 바다를 떨쳐내고 떠오르면 소원은 이미 성취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연의 섭리가 우리 안에 내재된 토테미즘적 DNA를 작동시키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반면 돋는 해가 아니라 지는 해를 찾는 이들도 있다. 해돋이가 시작이라면 해넘이는 끝이다. 해돋이가 생명이라면 해넘이는 죽음이다.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서쪽으로 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사람 또한 태어나면 죽는 것이 섭리다. 죽음은 멀리하고 싶은 단어이지만 너무 가까이 있고,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공평한 일상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죽음이 갖는 강력한 힘이다.
철학자 강영안은 죽음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죽음은 무반응이고, 돌아올 수 없는 불귀(不歸)의 상태라는 풀이다. 강영안이 꼽은 세 번째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이다. 그렇다. 죽음은 끝이지만 남은 자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 

   
▲ 죽음을 생각할 때 가벼워진다. 죽음을 생각할 때 현실에서 나아갈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할 때 삶은 다시 생동한다. 죽음을 생각할 때 이해를 넘어서고 편견은 뒤로 밀려난다. 죽음을 생각할 때 궁극의 희망을 볼 수 있다.


여기 형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청년이 있다. 청년의 이름은 도스토예프스키다. 때는 1849년 12월 22일, 장소는 세묘놉스키 사형장이다. 형장의 나무에 묶인 청년 앞에 총을 든 군인들이 도열 했다. 잠시 후 장교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청년은 죽는다. 
“청년은 죽음을 직면하자 모든 잃어버린 과거를 씻어 버리는 것을 느낀다. 그의 전 일생이 다시 깨어나서 그림이 되어 그의 가슴을 유령처럼 스쳐 간다. 심장은 점점 약하게 뛴다. 저편에서 사격을 위해 대열을 이룬다. 총을 맨 벨트는 흔들리고, 손들은 방아쇠 소리를 내고, 북이 울려서 공기를 가른다. 그 1초는 수천 년 나이를 먹게 한다. 
그때 외침 소리 하나, 멈추어라! 장교가 앞으로 나선다. 종이 한 장이 하얗게 펄럭인다. 그의 음성은 맑고도 분명하게 기다리는 적막 속으로 파고든다. 황제께서 그 성스러운 의지의 은총으로 판결을 취소하셨다. 이제 판결은 감형되었다. 그 말들은 아직 낯설게 들린다. 그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형리는 말없이 묶은 끈을 풀어주고 두 손이 갈라진 자작나무 껍질 벗기듯 하얀 천을 타오르는 관자놀이에서 벗겨낸다.
비틀거리며 두 눈은 무덤에서 빠져나온다”

전기문학의 대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묘사한 사형 직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얼굴이 떠오른다. 츠바이크의 살아있는 글이 극적이지만 이 장면 이후 도스토예프스키의 인생은 더욱 극적으로 바뀌었다. 겁을 주기 위한 가짜 사형식 이었으나 ‘죽었다가 살아난’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고결하고 순결해졌다. 감형 이후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생활은 생(生)을 전복시키는 감사한 자양분이 됐다. 인류의 유산으로 남은 그의 작품 대부분이 유형생활 이후 쓰여졌다. 
그는 죽음에서 벗어난 후 형에게 쓴 편지에서 “삶은 선물이고 행복”이라며 “내 영혼과 심장을 순결하게 간직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다짐했고 그렇게 살았다.

살아있음은 죽음을 전제한다. 고인이 된 이어령은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고 나온다”고 적었다. 길가메시부터 진시황을 거쳐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죽음에서 달아나려는 욕망은 끓었으나 모두가 무용했다. 지금도 과학이라는 욕망의 전차에 올라타 전력을 다하지만 소용없음을 우리는 안다. 따라서 죽음에 맞서 헛 힘을 빼기보다는 반복된 생(生)과 사(死)의 까닭을 묻게 된다.
살아있는 것은 죽음에 빚지고 있다는 깨달음이 실타래를 제공한다. 아침에 먹은 생선 한 토막, 고기 한 조각, 풀 한 포기 모두가 죽어서 나를 살게 한 게 아닌가. 그들은 죽음으로써 살아남은 자들의 일상을 만들고 죽음은 끝이 아닐 수 있다는 희미한 그림자를 보여 주는 게 아닐까. 

죽음을 생각할 때 가벼워진다. 죽음을 생각할 때 현실에서 나아갈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할 때 삶은 다시 생동한다. 죽음을 생각할 때 이해를 넘어서고 편견은 뒤로 밀려난다. 죽음을 생각할 때 궁극의 희망을 볼 수 있다.
아침 해가 돋을 때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

미디어펜= 김진호 부사장
[미디어펜=김진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