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섭보다 자유·집단보다 개인·분배보다 성장 초점 '작은 정부' 추구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4일 오전 자유경제원 회의실에서 “한국에 지금 레이건이 필요한 이유”라는 주제로 로널드 레이건 서거 11주기 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는 강규형 교수(명지대 기록정보과학대학원), 이윤희 사무국장(청년이여는미래), 최승노 부원장(자유경제원), 한정석 편집위원(미래한국)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발제를 맡은 최승노 부원장(자유경제원)은 “레이건의 경제정책은 단순하면서 명료하지만 핵심을 찔렀다. 미국정부의 방향성을 작은 정부로 향하게 했다. 그는 간섭보다는 자유, 집단보다는 개인, 분배보다는 성장, 의존보다는 자치를 강조했다”고 강조했다.

또한 “레이건은 이것이 바로 미국과 미국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관이라고 믿었다. 그는 미국이 이 길을 가게 되면 미국 국민 모두의 자유가 보장되고, 미국이 또다시 번영하는 나라가 되리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미국이 바로 레이건이 제시한 비전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 부원장은 레이건이 펼친 경제정책의 기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했다.

아래는 최승노 부원장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레이건은 1911년 2월 6일 일리노이주 탐피코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리노이주의 한 라디오 방송국 스포츠 해설가로 취직했다. 그는 경기장에서 실제로 경기를 보는 것처럼 분위기를 살려 방송하는 바람에 인기를 얻으면서 라디오 아나운서로 데뷔한다. 그리고 큰 키와 호남형의 외모로 영화 “사랑은 방송 중”을 통해서 1964년부터 영화배우로서 삶을 시작한다.

1947년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 회장에 선출되면서 레이건은 정치활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레이건은 영화배우조합 회장으로 일하면서 일류 배우들이 수입의 80% 이상을 세금으로 빼앗기는 것을 보고 분개했고, 조합원들의 단체교섭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영화계에서의 공산주의 이념논쟁에 휘말렸을 때에 조합내 공산주의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TV프로의 진행자로 전국을 돌았으며 보수주의의 대변자로 통하게 되었다.

레이건은 1962년 공화당원으로 등록하여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을 지지했다. 그는 1964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커져만 가는 미국 정부의 규모와 간섭을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또 미국인과 미국기업에 대한 과중한 세금을 줄여 미국 경제를 살리겠다고 약속했다. 나아가 제국주의적 공산주의는 반드시 해체되어야 하고, 자신이 그 일을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이 연설 덕분에 레이건은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1966년 정치 신인인 레이건은 3선 경력의 민주당 에드먼트 브라운 캘리포니아 주지사에게 도전하여 압승을 거둔 후 주지사에 연임되었다. 이어 대통령에 도전했지만 닉슨과 포드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1980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레이건은 보통 사람들이 은퇴 생활을 하는 70세의 나이에 다시 한 번 대통령에 도전했다. 권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16년 전 자신이 국민에게 약속한 정책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현직 대통령 지미 카터를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4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모두 지켰다. 레이건은 배우 출신답게 언변에 능통했으며 국민들에게 공감을 얻어내는 능력이 대단한 인간미로 승부할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그 덕에 압도적인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했으며, 재선 선거당시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을 상대로 49개 주에서 승리를 거두는 압승을 기록했다.

취임한지 겨우 69일이 지났을 때 저격범의 총탄을 맞았지만 곧 건강을 회복했고 업무에 복귀했다. 위기상황에서도 그는 위엄과 재치를 잃지 않았고 지지도는 더욱 상승했다. 레이건은 의회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 경기부양, 인플레이션 방지, 고용창출, 국방력증강 법안을 법제화했다. 그는 세금과 정부지출을 삭감하는 조치에 착수했고 군비증강으로 인해 재정적자폭이 크게 증가했을 때도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많은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되어(69년 349일) 가장 오래 살다가(93년 119일) 2004년 6월 5일 알츠하이머병으로 세상을 떠난 레이건은 작은 정부를 지향했다. 그의 리더십 속에서 미국은 70년대 월남전과 닉슨 게이트 이후에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강한 미국으로 다시 탄생했다. 이후에 레이건 대통령은 언제나 미국인이 뽑은 위대한 대통령에서 링컨, 워싱턴과 함께 손꼽히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레이건은 미국이 당면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 “정부는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정부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 후에 그가 펼친 정책은 명확했다. 너무나 비대해져버린 정부의 군살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뉴딜정책 이후 ‘풍요한 사회(Affluent Society)’를 거쳐 팽창일로를 걸어온 거대한 미국정부는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의존하는 국민들의 수가 많으니 국가는 더 많은 예산을 쓰게 되고, 늘어난 예산을 맞추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거두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궁극적으로 거대한 정부가 개인의 자유와 기업 활동을 방해한 것이다.

비단 생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레이건은 미국이 겪고 있는 재정적자는 비대해진 정부로 인한 것이란 확신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늘어난 통화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와 물가를 불안하게 만든다고 그는 믿었다. 결국 거대한 미국정부가 미국경제의 뇌관이자 문젯거리였다.

레이건의 경제정책은 단순하면서 명료하지만 핵심을 찔렀다. 미국정부의 방향성을 작은 정부로 향하게 했다. 그는 간섭보다는 자유, 집단보다는 개인, 분배보다는 성장, 의존보다는 자치를 강조했다. 레이건은 이것이 바로 미국과 미국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관이라고 믿었다. 그는 미국이 이 길을 가게 되면 미국 국민 모두의 자유가 보장되고, 미국이 또다시 번영하는 나라가 되리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미국이 바로 레이건이 제시한 비전이었다.

레이건이 펼친 경제정책의 기조는 크게 4가지이다.

첫째, 연방예산 삭감을 추구했는데, 삭감의 주 대상은 뉴딜정책과 민주당 정부가 추진했던 ‘풍요한 사회’ 건설로 인해 지나치게 확대된 사회복지 프로그램이었다. 둘째, 소득세를 3년 동안 해마다 10%씩 삭감하여 모두 30%를 삭감하고, 기업에 투자공제와 감가상각비용을 허용하여 투자 활성화를 유도했다. 셋째, 기업이윤을 축소시키고 경제성장을 둔화시키는 각종 정부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여 기업 활동 활성화를 유도했다. 넷째, 금리를 안정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했다.

레이건은 자신이 제시한 이와 같은 경제개혁 프로그램 ― 정부지출 삭감, 감세, 규제 완화ㆍ철폐, 통화 긴축 ― 을 ‘미국의 새로운 시작: 경기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불렀다. 이 같은 경제철학은 곧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라는 말로 불리게 되었다. (이를 본 따 국내외 많은 지도자들은 노믹스 시리즈를 내놓았다.) 레이건의 경제정책은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확실한 효과를 나타냈다.

세계 평화를 이끈 세계의 지도자

영화계의 공산주의자 침투를 경험한 이후 레이건은 정치 세계에 뛰어들면서부터 공산주의는 없어져야 할 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통령이 선출된 이후 레이건은 자신의 깨달음을 정책으로 실현한다. 1979년 12월에 벌어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강하게 비판한 후 아프가니스탄을 원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련이 ‘악의 제국을 유지하는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려는 정책을 면밀히 검토했다.

그는 공산주의 세력을 꺾기 위해 유럽에 중성자 핵무기를 설치했다. 레이건이 취한 핵심조치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전략방어계획(SDI: Strategic Defence Initiative; 날아오는 적의 미사일을 우주공간에서 낚아채는 방어시스템 구축)으로 알려진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명칭은 공상과학영화 가운데 하나인 스타워즈(Star Wars)에서 따 온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소련의 장군들과 지도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미국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 결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소련 지도자들의 분노와 불안이 폭발했지만 소련 지도부는 분명히 변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레이건의 구상대로 그들은 미국과의 경쟁을 포기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레이건은 처음에는 소련과의 정상회담을 거절하다가 곧 능숙한 외교관으로 변신하여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만났다.

이 회담은 공산주의 붕괴의 서막으로 입증되었다. 레이건이 1987년 베를린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이 장벽을 허물어 버리시오(Tear down this wall)”하고 놀랄만한 요구를 했을 때 사람들은 이를 공허한 희망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 레이건의 시도는 영국에서 또 한명의 위대한 지도자 마거릿 대처의 등장과 함께 세계의 흐름을 바꾸었다. 대처는 레이건과 함께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 낼 만큼 완벽한 파트너십을 통하여 세계경제와 함께 평화에 크게 기여했다. /사진=자유경제원

목표를 향한 레이건의 전략은 적중했다. 동서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드디어 1990년 10월 3일 무너졌고, 이어 자유세계의 적인 소련도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 결과 마거릿 대처가 쓴 대로, 세계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어 로널드 레이건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게 된 것이다.

훗날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1979.5~1990.11)은 2002년에 출간된 저서 『국가경영(Statecraft)』의 표지 다음 쪽에서 이렇게 썼다. - “이 책을 로널드 레이건에게 바친다. 세계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는 레이건 대통령이 냉전을 종식시켜 세계를 핵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낸 것에 대한 감사를 나타낸 말이다.

세계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확대

작은 정부 실현을 위해서는 재정지출과 조세를 삭감해야 한다. 레이건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그렇게 했다. 1930년대의 경제공황 이후에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까지 세계는 재정지출을 늘리고 조세를 늘리는 추세에서 흐름에 역행하는 결단을 보여준 것이다. 그 결과를 미국의 정부규모(GDP)에 대한 일반정부총지출 비율 변화가 보여준다.

미국의 정부규모는 1978년 30.0%로 일본과 함께 OECD 국가 가운데서 가장 작았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아일랜드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정부를 유지해 왔다. 미국의 정부규모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36.8%, 2010년 42.2%로 증가했지만 30여 년 동안 사실상 35% 안팎을 유지했다.

이는 1981년에 정권을 잡은 레이건 대통령의 작은 정부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가져온 결과다. 앞선 정부가 작은 정부 실현에 성공했는데 뒤에 오는 정부가 이를 깨뜨리기란 쉽지 않는 법이다.

레이건의 시도는 영국에서 또 한명의 위대한 지도자 마거릿 대처의 등장과 함께 세계의 흐름을 바꾸었다. 대처는 레이건과 함께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 낼 만큼 완벽한 파트너십을 통하여 세계경제와 함께 평화에 크게 기여했다.

경제에는 시장경제를 퍼뜨리고 사상으로는 자유주의를 전파하며 소련의 붕괴와 공산주의와의 이념전쟁을 갈무리하였다. 이후 뉴질랜드가 1984년에, 아일랜드가 1987년에, 독일이 2000년대 초에, 스웨덴과 프랑스가 2007년에 시장경제를 표방하고 나선 것을 보면 그들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세계경제가 호황에 접어든 1992년부터 글로벌 금융위기 전 해인 2007년까지의 16년을 대상으로 보면, 1992년 정부규모 OECD 평균치는 42.4%였는데 2007년에는 39.9%로 2.5%포인트 감소했다.

같은 기간 OECD 30개국 가운데 정부규모가 증가한 나라는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스위스 다섯 나라뿐이고, 한국 외에는 증가폭이 작다. 나머지 25개국은 정부규모가 모두 감소했다. 특히 세계에서 정부규모가 가장 큰 나라 스웨덴은 1992년 69.4%에서 2007년 51.4%로 15년 동안 무려 18.0%포인트 감소했다.

이 같은 추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세계는 그동안 작은 정부를 만들고자 경쟁적으로 노력해 왔다. 이러한 흐름 변화의 최선봉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기여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원리 원칙을 통한 노동문제 해결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 해는 1980년이었다. 1981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레이건이 맨 먼저 부딪혀야 했던 것은 항공 관제사 노조의 파업이었다. 1930년대 이래 미국의 노동조합은 항상 민주당 편이었다.

그런데,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에 미국 노조 역사상 처음으로 항공 관제사 노조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레이건을 지지했다. 당시 막강한 전문가 협회를 구성하고 있던 항공관제사 노조는 1981년 8월 3일 레이건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더 낳은 보수에다 더 낳은 근무환경을 주장하며 주32시간 근무조건을 내 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법과 원칙으로 파업중인 항공관제사들을 다스렸다. 50년 동안의 전통을 깨고 자기를 지지해 주었던 항공 관제사 노조에게 칼을 들이 댄 것이었다. 레이건은 항공 관제사 노조가 자기를 지지한 세력이라는 데 전혀 구애를 받지 않았고, 불법파업을 벌이는 항공관제사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기자회견에 나와 항공관제사의 파업은 공무원 노조의 파업을 금지한 미국법을 명백히 위반 했다며 그 불법성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파업자들이 48시간 내에 복귀하지 않으면 전원 파면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이 할리우드 배우 노조의 조합장으로서 파업을 지도한 적이 있다고 소개하면서 “그러나 법에 따라 공무원들은 파업을 할 수가 없다. 파업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지 않았는가”라고 공격하였다. 파업을 벌이고 있던 관제사들은 레이건이 자기들을 해고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만하고 있었다. 국민들도 레이건 대통령의 말을 믿지 않았다.

레이건 대통령의 이 명령이 하달되자 업무에 복귀한 관제사는 파업에 참가한 전체 인원 13,000여 명 중 1,300여명에 불과했다. 겨우 10% 만이 대통령의 명령에 따랐던 것이다. 그러자 레이건 대통령은 파업개시 이틀 후인 1981년 8월 5일 명령불복종의 이유를 들어 11,345명을 무더기로 해고시켜 버렸다. 그러면서 단서도 달았다. 업무복귀 명령에 불복한 파업 참가자는 이날 이후 평생 어떠한 공직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강력한 조건이었다.

그는 대체 인력을 신속하게 투입하여 혼란을 수습하는 한편, 불응하는 관제사들 1만 1000여명을 전원 해고 조치하는 과단성을 보였다. 또한 이에 머물지 않고 파면된 관제사들의 공공부문 취업도 영구적으로 금지시켰다. 새로운 항공관제사들이 숙련될 때까지 1년 이상 여객기 운항에 차질을 빚었지만 노조의 불업파업에 단호히 대처했다.

이런 조치를 당한 항공관제사 노조는 결국 정부에 의해 1981년 10월 22일 해산을 당하고 사라졌다. 미국 국민은 레이건의 강력한 조치에 지지의사를 보냈고 그 당시 높은 대우로 인해 귀족노조에 속하던 항공관제사는 졸지에 노숙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강력한 대통령의 리더십 뒤에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강력한 국민들의 지지라는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법에 책임을 묻지 않거나 적당히 덮고 넘어가면 그게 관행이 되고 비슷한 일은 언제든 되풀이된다. 우선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진짜 좋은 건 옳은 건 옳게 하고 그른 건 바로 잡는 것이다. 타협과 소통은 중요하지만 법과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알아야할 것은 법과 원칙에 따른 단호한 대처와 철저한 대비다.

레이건을 통해 본 대한민국이 가야할 길

레이건의 가장 위대한 측면은 바로 붕괴되고 있던 미국인들의 자신감을 회복시켰다는 점이다. 단순히 경제력과 군사력을 강화시킨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고 있던 지난 시기의 미국인들의 "낙관주의 정서"를 재구축해낸 것이다. 그가 추구한 것은 변해버린 미국의 가치관을 되찾는 일이었다. 뉴딜과 함께 시작된 정부간섭은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했으나 궁극적으로 볼 때 미국의 근본적인 가치관을 파괴하고 작금의 경제적, 외교적 문제를 일으킨 핵심 주범이었다.

레이건은 정부간섭에서 벗어나 전통적 가치인 자유주의로 돌아가고자 했다. 집단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되찾을 때라 생각했다. 의존적인 생활방식을 버리고 자존을 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가지 축으로 이를 이루어 냈다.

레이건 대통령 이후에 미국은 다시 세계 최고의 강대국 위치를 공고히 했다. 작은 정부로 경제를 살리고 자유주의라는 명확한 집권철학으로 국가를 운영하면서 국민들에게 자립의 의지를 확고히 했다. 브레튼 우즈 체제를 스스로 깨버린 미국이 기적적으로 회생한 데에는 레이건 대통령의 리더십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레이건이 준 교훈은 명확하다. 규제를 풀어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고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무분별한 복지정책으로 국민들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도록 자립심을 심어주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세계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장에 최대한의 자유를 주고 정부의 간섭을 줄여야 한다.

또한 무분별한 불법파업을 실행하는 노조에 대해서는 강력한 대처로 기업과 사용자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주어야한다. 고용과 해고는 기업의 자유이며 기업은 자유로이 경영을 하라는 신호가 필요하다. 레이건이 미국을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정부가 시장을 자유롭게 할 때 경제는 성장하고 국민들의 삶은 윤택해 질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대한민국도 사회 곳곳에 찌든 나약하고 의존적인 생각들을 타파하고 혁신적이고 자립적인 사회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