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감정에 충실할 자유’는 ‘타인의 자유’ 앞에서 멈춰야
   
▲ 정소담 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이별 통보를 한 여자친구를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충청북도 제천의 한 야산에 묻은 뒤 시멘트로 암매장한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숨진 여성의 유가족은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SNS를 통한 눈물겨운 호소를 이어가는 중이다.

이 일뿐 아니라 여자 친구가 이별을 통보하자 무자비하게 차로 들이받은 사건, 헤어지자는 동거녀에게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사건, 교제를 반대한 여자 친구의 아버지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 등 올해에만 비슷한 사건이 이미 여러 차례 발생했다. 이별 통보에 대한 분노가 폭력을 넘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명 ‘이별 범죄’는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잘못된 집착에 얽매여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갈수록 많아지는 걸까.

예전엔 자식사랑이 유난하면 팔불출 소리를 들었지만 요즘은 ‘자식바보’를 자처하는 부모 아래에서 모두가 공주님 왕자님으로 자라난다. 시대적 분위기가 ‘당신이 바로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덕분에 개인의 자존감이 고취되고 각자의 고유한 개성과 다양성을 인정받는 좋은 세상이 왔지만 부작용도 생겼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자기중심적인 착각들이 그만큼 많아진 것이다. 당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건 세상을 무대로 원대한 꿈을 마음껏 펼쳐보라는 뜻이지 타인까지 자신의 무대에 끌어들여 제 멋대로 드라마를 써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 이별 통보를 한 여자친구를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충청북도 제천의 한 야산에 묻은 뒤 시멘트로 암매장한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별 통보에 대한 분노가 폭력을 넘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명 ‘이별 범죄’는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즉각적인 감정표현을 권장하는 문화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당당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라’는 끊임없는 주문 속에, 당신의 감정만큼 타인의 감정도 소중하다는 기본전제는 어느 틈에 생략돼 버리고 만 게 아닐까. ‘본인감정에 충실할 자유’는 ‘타인의 자유’ 앞에서 멈춘다는 사실을 늘 잊어선 안 된다.

한때나마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이와 남이 된다는 건 참 시린 일이다. 그러나 살면서 이 저릿한 슬픔 한번 겪지 않는 이가 어디 있을까. 오랜 연인과 간밤에 이별한 이도 아무 일 없는 얼굴로 출근해 자판을 두드리고 가장 가까웠던 친구를 떠나보낸 이도 화장실에 가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채 남몰래 눈물을 훔친다.

실연의 상처를 사방팔방에 내보이지 않는 건 덜 슬퍼서가 아니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온전한 자기 몫의 슬픔이 있다는 걸 아는 어른이기에 그렇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는 ‘이별 공식’은 그 시기의 아픔을 오롯이 혼자 감내한 뒤 찾아오는 내적성숙을 의미하는 게 아니던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작가의 시 ‘너에게 묻는다’는 오래도록 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시는 즐겨 외면서도 정작 그 안에 담긴 진리에는 무심한 게 아닐까 싶을 때가 많다.

너에게 묻는다. 날 버린 이에 대한 원망대신 고단한 삶의 옆자리에 있으면서도 뜨거운 위로가 돼 주지 못했던 인연에 오히려 작은 미안함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나보기가 역겨워 가신다는 이는 말없이 고이 보내주면 된다. 다름 아닌 당신의 행복한 앞날을 위해서 그것이 옳은 길이다. /정소담 칼럼니스트, 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