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한 개인주의' 바탕으로 갈수록 원숙한 사상체계 선보여
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 복거일 소설가

사람이 나이와 더불어 원숙해지기는 참으로 힘들다. 좌절된 꿈과 허약해진 몸은 사람을 일찍 시들게 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에겐 으레 노년의 욕심과 고집이 기다린다. 갖가지 위험들과 유혹들이 곳곳에 도사린 우리 사회에선 원숙한 사람들을 만나기가 특히 힘들다. “우리 사회엔 원로들이 없다.”는 한탄이 그래서 자주 들린다.

그런 사정은 정치계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니, 정치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원로 정치인들은 거의 없다. 활발하게 움직인 정치인이 '원로 정치가(elder statesman)'로 원숙해지는 일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흔한 것은 아니다. 정치계가 워낙 살벌한 경기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8년에 89세로 죽은 미국 정치가 배리 모리스 골드워터(Barry Morris Goldwater)의 생애는 우리의 눈길을 끈다.

골드워터는 애리조나 주 출신 상원의원이었다. 그의 긴 정치적 이력의 절정은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선 것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우익 정책들을 내걸어 당을 장악한 보수파의 지지를 얻었고, 덕분에 온건한 정책들을 제시한 넬슬 록펠러(Nelson Aldrich Rockefeller, 1908~1979)를 누르고 후보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극단적 정책들을 뒷날에 자주 인용된 선언으로 옹호했다.

“자유의 수호에서 극단은 죄악이 아닙니다.(Extremism in the defense of liberty is no vice.), 정의의 추구에서 온건은 미덕이 아닙니다.(Moderation in the pursuit of justice is no virtue)" 그러나 골드워터가 사회복지 입법에 부정적이고 월남전의 확전을 지지하며 핵무기의 통제 권한을 맡길 만큼 신중한 인물이 못 된다는 민주당의 비판은 유권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까지의 그의 정치적 이력을 살펴보면, 그런 비판이 호응을 얻을 만도 했다. 그는 연방의 권한에 맞선 주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학교에서의 인종 차별을 철폐한 대법원의 역사적 판결을 비판했었고, 조지프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1957) 상원의원에 대한 상원의 불신임 결의를 반대했었고, 핵무기 실험금지 조약의 비준을 반대했었다.

놀랍지 않게도, 그는 그 선거에서 대패했다.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1973)은 4,300만 표를 얻었는데, 그는 겨우 2,700만 표를 얻어서, 애리조나와 남부의 다섯 주들에서 이겼을 따름이다. 그것으로 그의 정치적 이력을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상원으로 돌아와서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떫은 감이 홍시로 익어가듯, 인품과 견해가 차츰 원숙해지면서, 그는 원로 정치가로서 미국 시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됐다. 그런 변모의, 바탕은 미국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튼튼한 개인주의(rugged individualism)'였다.

그의 가족은 원래 유대계 이민들이었는데, 금광들을 찾아다니며 잡화를 파는 행상들로 시작해서 애리조나에서 가장 큰 포목점을 경영하게까지 됐다. 그런 가족적 경험은 자연스럽게 그를 철학적 보수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너그러운 정책들을 지지했고 시강 경제를 신봉했고 깊은 애국심을 지녔다.

그는 편견과 기득권을 지키려고 애쓰는 반동적 보수주의자들과 본질적으로 달랐음을 가리키는 일화들은 많다. 그를 지지한 동료 상원의원들은 대부분 인종차별주의자들이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고 흑인들을 친구들로 가졌었다. 그는 동성애자들의 군복무를 금지하는 조치를 없애라는 주장을 과감하게 폈다.

동성애자라는 사실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를 생각하기 힘들다는 것이 그런 주장의 근거였는데, 이것은 보수주의자들을 자신의지지 기반으로 삼은 정치가로선 정말로 하기 힘든 발언이었다. 비록 골드워터는 정치적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11~2004)이 대통령이 된 뒤부터, 그의 정치적 이념과 정책들은 제대로 평가 받았고 미국 정치사상의 주류가 됐다.

레이건은 실은 골드워터의 선거를 도우면서 그의 정치적 이력을 시작했다. 뒷날 대통령으로 일하면서 '위대한 전달자(the great Communicator)'라는 이름을 얻은 사람답게, 레이건은 뛰어난 연설 솜씨를 발휘했고 골드워터에 대한 지지를 늘렸다. 그러나 골드워터는 레이건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레이건이 공화당의 우상이 된 뒤에도, 레이건이 무엇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그는 레이건을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겐 다행스럽게도, 그때는 이미 그의 인격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덕분에 그런 발언은 성공한 아랫사람을 시기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경우, 말이 인품과 함께 원숙해진 것도 흥미롭다. 모든 정당들이 '작은 정부’를 앞세우는 지금도, 일찍이 작은 정부를 역설한 그의 얘기는 참된 믿음을 지닌 사람들에게서 나온 말들만이 지니는 깊은 울림을 가졌다. “당신에게 당신이 바라는 모든 것들을 줄 수 있을 만큼 큰 정부는 그것들 모두를 앗아갈 만큼 큽니다.(A government that is big enough to give you all you want is big enough to take it all away)"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