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서민적인 대통령’ 칭호 얻었던 소신남…FRB에도 영향
   
▲ 이원우 기자

2015년 6월 8일은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의 사망 17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인들에겐 썩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요소는 있다. 그는 종종 ‘미국의 노무현’으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비주류 출신 대통령이라는 점에서는 확실히 닮았다.

1767년 테네시 변방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앤드류 잭슨은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먼 훗날 잭슨이 하버드에서 라틴어 분야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때 미리 외워둔 라틴어 문구를 외쳤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게 회자된다.

무질서한 개척시대의 잭슨이 변호사로 경력을 쌓았다는 점도 흥미롭다. ‘주먹이 곧 법’이었던 시절에 토지 문제, 폭행 문제, 분쟁 문제 등에 대한 조정업무를 하면서 잭슨은 이름을 알려갔다. 궁극적으론 ‘재산권 갈등 처리’였을 그의 업적이 결국 현대의 화폐(20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것으로 연결됐으니 재미있는 일이다.

한편 최근 미국에서는 20달러 지폐에 새겨진 앤드류 잭슨의 얼굴을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탄력을 받고 있다. ‘전쟁 영웅’으로 인기를 얻어 당선돼 원주민을 탄압한 잭슨의 이력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 출신이었던 잭슨에 대한 비판을 현재의 민주당 인사들이 앞장서 하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현대의 관점으로 과거를 투사하려는 건 어느 나라 어느 정당이나 마찬가지인 걸까.

   
▲ 미합중국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의 초상이 새겨진 20달러 지폐

잭슨이 1820년대부터 시작된 북미 대륙의 원주민 추방에 앞장섰던 건 사실이다. 대통령 취임 직후 인디언 추방법을 제정해 원주민들을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수천 명을 숨지게 한 ‘눈물의 길(Trail of Tears)’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종종 미국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이야기'로 지목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런 앤드류 잭슨을 ‘노예 해방의 아이콘’ 에이브러햄 링컨이 존경했다는 점에 존재한다. 남북전쟁 기간 동안 링컨은 백악관 집무실에 앤드류 잭슨의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라는 책까지 펴내며 링컨에 대한 존경심을 표출했으니, 이렇게 되면 얼추 얘기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용기를 가진 단 한 사람이 과반수를 만든다”는 명언을 남긴 잭슨은 분명 과단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중 유세를 벌여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보유한 서민 대통령이었지만 재임 시에는 ‘국왕 앤드류 1세’라는 핀잔을 들었을 정도로 저돌적인 국정운영을 했다.

금융은 그의 저돌성이 가장 부각된 분야 중 하나다. 잭슨은 오늘날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형태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독립전쟁 이후 부채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제1미합중국은행, 그리고 제1은행 폐지 뒤 20년 기한으로 다시 설립된 제2미합중국은행은 통화 공급을 좌지우지하면서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재선 출마를 앞두고 있었던 잭슨은 이와 같은 중앙은행의 행태를 ‘타락’으로 규정하고 제2은행 재인가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중앙은행을 없애면 경제공황이 발생하고 시민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위기론이 비등해 의회는 재인가 승인 법안을 제출했지만, 잭슨은 여기에도 거부권을 행사하는 ‘소신’을 택했다. 그로부터 77년 뒤 설립된 FRB에는 중앙은행의 횡포를 염려했던 잭슨의 의중이 다수 반영돼 있다는 지적이다.

퇴임 후 8년을 더 살고 1845년 6월 8일 사망한 앤드류 잭슨의 78년 생애는 단순히 한 가지 관점으로만 재단할 수 없는 복잡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한 남자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안에 참으로 여러 가지 이념과 사상과 정치가 생동감 있게 섞여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2015년 6월 8일은 그런 날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