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시장경제·자본주의에 대한 오해…공자의 정명론이 주는 교훈은?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9일 ‘정명종합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번 토론회의 주제는 <2015 대한민국, 정명운동을 시작하자>로 총 3차에 걸쳐 진행해온 기업·교육·세금 분야 용어, 이념·사상 문화 분야 용어, 노동 분야 용어의 정명을 총 망라해 본격적인 정명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이날 토론회는 사회에 복거일 작가, 기조강연에 송복 교수(연세대학교 명예교수)가 함께한 가운데 진행됐다.

토론자로 참석한 신중섭 교수(강원대학교 윤리교육과)는 "사람은 옳고 그름과 같은 윤리적 언사에 대해서는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히며 "언어는 현상을 정확하게 서술하기 보다는 현상과 관계없이 극단적으로 좋은 의미 또는 나쁜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 교수는 ‘이념은 사회의 기둥’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널리 쓰이는 왜곡 언어들을 걷어내는 정명운동이 대중으로 하여금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래는 신중섭 교수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신중섭 강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정명론의 효시는 공자다. 공자의 정명론을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적용하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자유주의 관점에서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하고 있는 사람이 자유기업원 현진권 원장이다. 그는 경제학자지만 공자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공자는 도덕철학자이면서 정치가, 경세가 또 경제학자인지도 모른다.

공자는 당시 모든 제도의 붕괴, ‘천하무도(天下無道)’를 목도하고 정명론을 제시했다. 천하무도를 물리치고 ‘天下有道’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정명 운동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공자는 정치와 사회의 모든 구석에 질서가 있는 시대를 천하유도의 시대로, 정치와 사회의 모든 질서가 파괴된 시대를 천하무도의 시대라고 하였다.

천하유도의 시대에는 예악정벌(禮樂征伐) 곧 예의의 제정, 음악의 제작, 출병과 징벌을 비롯한 중요한 일들을 모두 최고 통치자인 천자가 결정한다. 그러나 천하무도의 사회에서는 제후가 예악정벌을 결정한다.

예악정벌을 제후가 결정하면 10대 안에 무너지고, 대부가 결정하면 5대 안에 무너지고, 대부의 가신이 결정하면 3대 안에 무너진다. 천하에 도가 서 있다면 국가 권력이 대부의 수중에 있을 리 없고, 천하에 도가 서 있다면 서인들이 국가의 정치를 좌지우지할 리 없다고 공자는 주장하였다.

공자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려면 천자는 천자, 제후는 제후, 대부는 대부, 백성은 백성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름과 실제가 일치해야 한다는 정명사상이다.

공자는 위나라 임금이 공자 자신에게 정치를 맡기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야 물론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正名)이다”라고 하였다.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을 “개념을 바로 잡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논어 ‘자로(子路)’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자로가 말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하고자 하면, 선생님은 장차 무엇을 먼저 하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반드시 개념을 바로 잡겠다(正名).”

자로가 말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선생님의 말씀은 실제와 거리가 멉니다.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천박하구나, 자로야.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법이다. 개념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이치에 따르지 못하고, 말이 이치에 따르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와 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와 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알맞지 못하고, 형벌이 알맞지 못하면 사람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군자가 개념을 붙이면 반드시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면 반드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니, 군자는 그 말에 대하여 구차하게 하는 것이 없을 뿐이
다.”

정명은 개념과 실제를 상응하게 하는 것으로, 개념을 실제의 본질에 부합하게 하고 실제의 본질을 개념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다. 실제의 본질이 있으면 그것에 합당한 개념이 있으며, 개념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에 부합하는 실질이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정치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게 되는 것(君君, 臣臣, 父父 子子)이다.”라고도 하였다.

정명사상은 모든 이름은 각각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현실에서 그 이름의 본질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은 각각의 역할이 있으며, 각자 이 역할을 잘 수행할 때 “천하의 도가 바로 선다(天下有道).”는 것이다.

물론 공자가 정명사상을 이름과 그것의 역할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고(모난 술잔의 이름)가 모나지 않으면, 그것을 고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한 것처럼 이름과 실제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이름과 그 이름이 지시하는 사물에도 적용하였다. 삼각형은 세 각이 있어야 삼각형이고, 사각형은 네 각이 있어야 사각형이듯이 이름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명사상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플라톤은 철인 군주와 그를 보조하는 군인과 경찰, 생활필수품을 보급하는 일꾼인 농부, 장인, 상인들, 세 계급으로 구분하고 그들에게 엄격한 역할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사회 정의 또는 안정은 각 사람이 각자에게 적합한 기능을 잘 수행하고 다른 사람들을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계층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뒤를 이어 전국시대 공손용은 그의 名實論에서 공자의 정명사상을 일반 사물에 적용하였다.

천지와 그 천지가 낳은 것은 사물이다. 사물은 그 사물이 된 바대로 사물이라고 하는데,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을 실제의 본질(實)이라고 한다. 본질은 그 본질이 된 바대로 본질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을 결여하지 않은 것을 제자리(位)라고 한다. 마땅한 제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제자리가 아니다. 마땅한 제자리에 처해 있는 것을 바름(正)이라고 한다.

그 바른 것으로써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잡는 것이다. 그 바르지 못한 것으로써 그 바른 것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바른 것은 그 본질을 갖추는 것이다. 그 본질을 바르게 갖추는 것은 그 개념(名)을 바로 잡는 것이다.

   
▲ 자유경제원은 6월 9일(화) 오전 10시 정명종합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번 토론회의 주제는 2015 대한민국, 정명운동을 시작하자로 총 3차에 걸쳐 진행해온 기업·교육·세금 분야 용어, 이념·사상 문화 분야 용어, 노동 분야 용어의 정명을 총 망라해 본격적인 정명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사진=자유경제원

그 개념이 바르게 되면 이것과 저것에 맞게 된다. 저것을 말하는데 저것이 저것에 맞지 않으면, 저것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이것에 맞지 않으면, 이것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합당함과 합당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합당하지 않은 것을 어지러움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저것은 저것이 저것에 합당하면 저것에 맞는 것으로서, 저것이 성립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것이 이것에 합당하면 이것에 맞는 것으로서, 이것이 성립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물은 그것의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물이 되는 것이다. 그 본질을 바르게 하는 것은 그 개념이 본질을 구현하게 하는 것으로써 이것이 바로 정명이다. 정명론의 핵심은 이름(개념)과 그 이름이 지시하는 사물의 본질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름과 그 이름이 지시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감정과 정명

영국의 철학자 흄은 “이성은 감정(passions)의 노예이며 오직 노예이어야만 하며, 감정에 복종하고 봉사하는 일 이상의 어떠한 다른 임무를 절대로 요구할 수 없다.”고 했다.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도 “인간 본성의 가장 복잡한 양상은 인간의 지성에 있지 않고 감정에 있다. 지적인 기교는 목적에 대한 수단에 불과하다. 감정은 우리가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야만 하는가를 결정한다. 지성은 개인에 속해 있다. 감정은 집단, 가족, 부족, 인류 혹은 자연에 속해 있다.”

고 했다. 이들은 감정만이 우리의 행동을 지시해 주고 이성은 오직 사실의 문제와 그 추론의 관계만을 알려줄 뿐이라는 통찰을 주고 있다. 인간 행동에서 주인은 감정이고 이성은 감정이 결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만을 강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옳고 그름과 같은 윤리적 언사에 대해서는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와 연관되어 있으면 그것이 실제로 그런가를 따지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는 무조건 좋은 것으로 각인되어 있어 민주주의적이 아닌 것은 나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이 반대하는 것을 반민주적인 것으로 매도하면 그 매도는 설득력을 얻는다.

이런 현상은 윤리학의 정의(定義)와 관련이 있다. 윤리학에서 정의는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려는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즉 윤리학에서 특정 개념에 대한 정의는 인간의 태도를 강화하거나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리면서 자신의 정의가 ‘진실된’ 그리고 ‘참된’ 정의라고 주장한다. 윤리학에서의 정의는 중립적이거나 공정할 수 없다.

이념과 관련된 개념의 정의는 ‘설득적 정의’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라는 말은 “지배권의 소재가 보통 선거권에 의해 설립된 정부”라는 고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말이 사용되면서 본래의 서술적 의미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이제 그 말을 호의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원래 그 말이 호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이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에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와 상관없이 자신의 주장을 포장하거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언어는 현상을 정확하게 서술하기보다는 현상과 상관없이 특정의 의미 좋은 의미 또는 나쁜 의미를 지니게 된다. 현 원장이 발표문에서 제시한 ‘양극화’가 대표적이다. 원래 ‘양극화’는 “둘 이상의 물체나 사람 또는 집단이 서로 상반되는 경향으로 분리되는 현상”이라는 명확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제는 ‘소득’이나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 현상을 지칭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실제로 소득이나 부의 차이는 ‘양극화’가 아니라 스펙트럼 형태로 분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극화’는 ‘소득격차’나 ‘부’의 격차를 의미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양극화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양극화를 극복하려는 정책은 무조건 좋은 정책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이미 ‘양극화’는 나쁜 것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에 ‘양극화’ 극복을 위한 정책은 그 정책 자체의 성격과 관계없이 무조건 좋은 정책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양극화를 초래한 원인으로 오인된 ‘시장경제’나 ‘자본주의’는 나쁜 것으로 인식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념과 관련된 용어의 오염을 바로잡기 위한 정명(正名) 운동은 우리 사회에 널리 확산된, 현실을 왜곡하는 언어들을 걷어내고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고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념은 사회의 기둥이다. 이념이 바로서야 사회가 바로 선다. 정명은 이념 바로 세우기 운동이다. 고착된 언어 사용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렵겠지만, 용어 오염을 깨달은 사람들이 노력한다면 용어가 정화되고 사회도 정화되어 이념이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신중섭 강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